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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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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25회 작성일 11-11-06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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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션 임파서블(mission impossible)

마5:43~48

2011. 11/6   08:00, 11:00

백혈구의 사랑

혼자서 수요일 저녁예배에 다녀온 후 달라진 남편의 태도에 아내는 깜짝 놀랐다. 자신에게 다정한 것은 물론 부엌으로 들어가 아무런 잔소리도 없이 설거지를 하고, 몸이 아파서 며칠 동안 치우지 못해 엉망인 방도 깨끗이 정리했다. 아내는 남편이 아무래도 예배에서 큰 은혜를 받은 것이라 생각하고, 목사님이 무슨 내용의 설교를 했는지가 궁금했다. 그래서 다음 날, 목사님에게 전화를 해서 남편이 수요예배를 다녀온 후 크게 달라졌다면서 자신은 몸이 아파 예배에 참석을 못했는데 무슨 설교를 했냐고 물었다. 그러자 목사님이 대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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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원수를 사랑하라.’

 

아무튼 이 남편의 적용에는 문제가 있으나 설교를 열심히 들었다는 점, 들은 말씀을 자신의 생활에 적용했다는 점에 대하여 크게 칭찬을 하고 싶다. 사실 설교를 대충 듣는 사람들이 얼마나 많고, 설교니까 그러려니 정도로 생각하며 들은 말씀을 기억해서 적용하는 사람은 더욱 없다. 게다가 자신의 아내나 남편을 원수만도 못하게 여기는 인간들(?)도 많다.

 

혈액에는 백혈구, 적혈구, 혈소판, 혈장이라는 성분이 있다. 그 중에서 백혈구는 우리 몸에 어떤 침입자(병균)가 들어오면 그 침입자를 처리하는 일을 한다. 그런데 백혈구가 침입자를 처리하는 모습은 우리에게 큰 교훈을 준다. 백혈구는 침입자를 향해 무력을 사용하지 않는다. 대포도 발사하지 않고, 총을 쏘지도 않는다. 화학약품을 쓰거나 욕설도 하지 않는다. 그저 자신의 온 몸을 던져서 뜨거운 사랑으로 그 침입자를 꼭 감싸 준다. ‘사랑하다 죽어버려라.’고 한 정호승 시인의 시처럼 사랑하다 죽어버린 것이다. 상처가 아물면서 나온 고름은 침입자를 목숨 걸고 사랑한 백혈구의 시체인 것이다. 침입자까지 사랑하여 우리 몸의 건강을 지켜주는 백혈구의 사랑이 정말 놀랍지 않는가? 참 사랑의 본질을 깨달게 하는 좋은 예다. 어떤 종류의 사랑이든 사랑에는 희생과 헌신이 있고, 사랑할 수 없는 대상까지 사랑하는 그 사랑을 통해서 사랑의 진가가 드러난다.

 

무겁지만 영광스러운 요구

5장에서 율법에 대한 주님의 해석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유대교에 의해 왜곡된 말씀을 바로잡아 주는 것이다. 본문 역시 마찬가지다. 그들은 “네 원수를 사랑하라”는 말씀이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다고 판단하여, “네 이웃을 사랑하고 네 원수를 미워하라.”고 변경시켜 가르쳤다. 이는 상식적이고 합리적이지만 말씀에 대한 심각한 왜곡이다. 종교를 도덕적 수준으로 끌어내린 것이고, 자신의 편의에 따른 자기 합리화다. 또한 이것은 사람을 이웃과 원수로, 사랑할 자와 미워할 자로 나누고 있다. 이 역시 차별이 없으시는 하나님의 속성에 대한 왜곡이다(45). 그러므로 율법의 수호자를 자처하면서 주님을 율법 파괴자(17)라 비난하였던 그들이 실상은 율법의 파괴자였던 것이다. 이는 우리가 깊이 생각해 볼 일이다. 주님의 영광을 위한다면서 주님의 영광을 가리고, 주님의 말씀을 능력이라고 하면서 말씀의 능력을 부정하고, 교회를 위한다면서 교회를 헐고 있는 자가 아닌지 말이다.

 

사람이 사람다운 삶을 살기 위해서는 짐승과의 차이를 알아야한다. 몸을 가지고 있다는 점에서 사람과 짐승이 다르지 않다. 그러나 사람에겐 짐승에게 없는 영혼이 있고, 양심이 있고, 이성이 있고, 도덕성이 있다. 따라서 사람은 이성적으로 살아야하고, 도덕적으로 살아야하고, 양심적으로 살아야한다. 신자가 신자답게 살기 위해서도 마찬가지다. 몸과 영혼을 가진 한 사람의 인격을 가지고 살아간다는 점에서 신자나 불신자나 동일하다. 하지만 신자는 주님을 믿고 구원을 얻은 주님의 자녀이고, 주님의 영이 그 안에 계신다. 신자가 불신자와 다른 것은 신자 안에는 바로 이러한 신적인 면이 있다는 점이다. 따라서 신자는 이 세상에서 단순히 인간답게만 살아서는 안 된다. 인간답게 사는 것은 기본이고, 주님의 자녀로서 ‘주님의 자녀답게’ 살아야 할 책임이 있다. 그런데 유대인들은 율법에 대한 잘못된 해석으로 주님의 자녀다움을 포기하게 만들었다. 그리고 사람을 이웃과 원수로 나누어서 사랑할 사람과 미워할 사람으로 구분하고, 호의를 베푼 사람에게만 호의를 베푸는 철저한 ‘받고 주는’(give and take) 원리에 따라 살도록 한 것이다. 이것은 누구나 할 수 있는 일이다. 세리도 자기를 사랑하는 자들은 사랑하고(46), 이방인도 자기 형제에게는 인사한다(47). 깡패도 자기들끼리는 아껴주고 돌보아준다. 반면에 주님은 사람을 사랑해야할 사람과 미워해야할 사람으로 나누지 않고 모두가 사랑해야할 대상이라는 것(이웃과 원수의 구분을 폐지하심), 받은 만큼 돌려주는 ‘받고 주는’ 원리를 넘어서야 함을 강조하신다.

 

“나는 너희에게 이르노니 너희 원수를 사랑하며 너희를 박해하는 자를 위하여 기도하라. 이같이 한즉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아들이 되리니, 이는 하나님이 그 해를 악인과 선인에게 비추시며 비를 의로운 자와 불의한 자에게 내려주심이라.”(44,45).

 

바로 이와 같은 것이 주님의 자녀다운 신자의 삶이다. 신자의 삶은 세상 사람들과 달라야하고, 더 나아야한다. 이것이 본문에서 원수라도 사랑하라는 말씀의 뜻이다. 하지만 무거운 요구가 아닐 수 없다. 그렇다고 이와 같은 주님의 요구에 낙담하거나 미리 겁먹고 포기하지 말자. 어떤 교사도 초등학생에게 고등학생이나 대학생이 풀 수 있는 문제를 주면서 그것을 풀라고 하지 않는다. 나보다 나를 더 잘 아시는 분이 주님이시다. 그런 주님이 우리에게 원수를 사랑하라고 하신 것은 우리가 놀랍게 변화된 존재이기 때문이다. 원수까지도 사랑할 수 있는 존재가 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본문은 ‘불가능한 명령’(mission impossible)이 아니다. 불가능한 명령으로 우리를 곤경에 빠뜨리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 아니다. 우리를 격려하기 위해서, 우리 얼마나 대단하고 놀라운 존재인가를 확인하고 확증하도록 하기 위해서 주신 말씀이다. 원수까지 사랑할 수 있는 엄청난 능력의 소유자임을 확인해주는 말씀이다. 그러니 본문은 무겁지만 영광스러운 요구인 것이다. 이 사실을 깨닫기 전에는 (모든 말씀이 그렇지만 특히)이 말씀 앞에 서기만 하면 내 자신이 그렇게 초라할 수가 없었다. (물론 여전히 이 말씀에 삶이 미치지 못하고 있지만)하지만 지금은 주눅 들지 않고 ‘주님께서 부족한 나를 이렇게 봐주시다니 감사하다.’고 오히려 기쁘게 고백한다.

 

왜 원수를 사랑해야 하는가?

꽁꽁 얼어붙은 얼음 덩어리는 세찬 망치질로 없앨 수 없다. 그저 깨어 부수기만 할 뿐이다. 하지만 따뜻한 햇볕에는 힘없이 녹아버리고 만다. 얼음같이 굳은 마음을 녹일 수 있는 것은 햇볕과 같은 따뜻한 사랑이다. 사랑만이 악을 궁극적으로 이길 수 있다. 주님의 십자가가 바로 그 상징이다. 십자가는 악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보여주는 사건이다. 하늘과 땅의 모든 권세를 가지신 주님은 얼마든지 그 능력으로 반대자들을 제압할 수 있었다(마26:53). 그런데 주님은 그 방법, 그 쉬운 길을 포기하고, 원수까지도 용서하고 사랑하는 십자가의 길, 죽음의 길을 택하셨다. 주님은 부수고 무너뜨려 굴복시키기 위해서 오신 것이 아니라 녹여서 변화시키기 위해 오셨기 때문이다. 그래서 권력을 휘두르지 않고 죽기까지 사랑하신 것이다. 이것이 곧 주님의 방법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가 원수를 사랑해야 할 이유가 있다. 그것은 ‘주님’ 때문이다. ①주님이 그렇게 하셨기 때문이다(45). 주님은 선한 사람에게만 해를 비추시고, 의로운 사람에게만 비를 내려주시는 편협하신 분이 아니시다. 악인과 선인, 의로운 사람과 불의한 사람을 가리지 않고 사랑하시는 분이시다. 또한 ②주님이 그렇게 하기를 원하시기 때문이다(44). 믿는다는 것은 주님과 하나가 되는 것이다. 주님을 닮아 주님처럼 사는 것이다(※‘사랑하며.......기도하라’는 현재형이고, ‘아들이 되리니’는 부정과거형이다). 그러므로 주님의 자녀가 되었고, 주님께서 원수를 사랑하셨으므로 우리 또한 그렇게 살아야 하는 것이다. 이것은 주님의 요구이기도 하지만 우리의 사명이다. 자녀를 보면 부모를 알 수 있다. 자녀는 부모를 닮기 때문이다. 신자는 주님의 자녀다. 우리가 원수까지 사랑할 때, 원수를 사랑하신 주님을 닮은 주님의 자녀로 나타나게 된다. 윌리엄 플러머(W. S. Plume)는 이렇게 말했다. ‘선을 악으로 갚는 것은 악마적이고, 선을 선으로 갚는 것은 인간적이며, 악을 선으로 갚는 것은 신적이다.’ 그리고 “그러므로 하늘에 계신 너희 아버지의 온전하심과 같이 너희도 온전하라.”(48)는 주님의 무거운 요구도 원수 사랑을 통하여 성취된다. 사랑이 곧 율법의 완성이고(롬13:8,10), 최고의 사랑은 주님처럼 원수까지 사랑하는 것이기 때문이다. 우리 모두 이 최고의 사랑을 실천하여 주님의 자녀됨을 유감없이 발휘하자.

 

사랑은 무덤이다.

가이드 포스트(2001.7.)에 실린 감동적인 이야기다. 아버지가 세상을 떠난 다음, 아버지의 유품을 정리하다가 노트 한 권을 발견했다. 노트를 펼쳐보니 평소 아버지가 사랑하던 사람들의 이름이 적혀 있었다. 맨 먼저 가족들의 이름이 나오고, 그 다음에는 친구들과 이웃들, 그런데 끝 부분에 20여명의 생소한 이름이 적혀 있었다. 그래서 그 노트를 어머니에게 보여 주며, ‘이 노트가 무슨 노트냐’고 물었더니 ‘아버지의 기도노트’라고 하였다. 아버지는 매일 잠들기 전에 그 노트를 펼쳐놓고 한 사람, 한 사람 이름을 짚어가면서 조용히 기도했다고 한다. 그리고 생소한 이름의 사람들은 아버지의 마음을 상하게 했던 사람들이라고 했다. 아버지는 사랑하는 가족과 친구들을 위해서 기도했지만, 마음을 상하게 했던 미운 사람들을 위해서도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것이다.

 

비록 크게 드러나지는 않았으나 원수 사랑을 몸소 실천한 사람이다. 남을 미워하는 사람, 그래서 용서하지 못하고 증오로 날밤을 새우는 사람은 스스로 자기를 죽이는 사람이다. 미움이나 증오를 가지면 감정이 격하게 되고, 그러면 스트레스성 호르몬 아드레날린이 분비된다. 이 물질은 심장의 비정상적인 박동을 가져오고, 혈압을 높이고, 면역력을 떨어뜨려 질병에 쉽게 걸리게 한다. 결국 미워하는 사람은 다른 사람을 헤치기 전에 자신을 죽이는 것이다. 반면에 사랑은 이와 같은 감정을 해소시키는 해독제다. 불완전하고 비정상적인 우리의 삶과 관계는 끊임없이 미움과 증오, 분노와 같은 나쁜 생각, 악한 감정을 만들어낸다. 사랑은 이와 같은 나쁜 생각이나 악한 감정을 모두 묻어버릴 수 있는 무덤과 같다. 원수까지도 묻어버릴 수 있는 커다란 사랑의 무덤을 간직하고 산다면 주님처럼 온전한 주님의 자녀로서 큰 행복을 경험하고, 주변과 건강한 관계를 유지하며 살 수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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