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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라를 만났을 때(06-08-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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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059회 작성일 06-08-20 17:3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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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의 마라를 만났을 때
출15:22~27

두 사람이 함께 전도여행을 떠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발걸음을 하나님께 맡기고 하나님이 인도하시는 대로 최선을 다해서 복음을 전했습니다. 때로는 산 속을 헤매는 가운데 굶주릴 때도 있었고, 또 때로는 복음을 거부하는 사람들을 만나서 모진 핍박을 당할 때도 있었습니다. 그래도 두 사람은 때를 얻든지 못 얻든지 하나님의 복음을 전하는 일에 최선을 다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입니다. 사막을 가로질러서 여행을 하게 되었습니다. 두 사람은 열심히 전진했지만 눈앞엔 끝없는 모래벌판만 나타났습니다. 그러다가 사막에 갇히고 말았습니다. 몇 날을 사막에서 방황했습니다. 식량도 떨어졌고 마실 물조차 남지 않았습니다. 나중에는 타고 가던 낙타마저 쓰러져버리고 말았습니다. 결국 두 사람은 사막 한가운데서 죽음을 바로 눈앞에 두고 하나님께 마지막 기도를 드리게 되었습니다.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제가 열심히 복음을 전한 결과가 고작 이것입니까? 어떻게 저로 이 사막에서 목말라 죽게 만드십니까? 하나님, 정말 너무하십니다."

그러나 다른 한 사람은 이렇게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제 이곳에서 저의 모든 복음사역을 마치게 하시고, 하나님께서 저를 위해서 예비해 주신 영원한 본향으로 인도해 주시니 진실로 감사합니다." 첫 번째 사람은 원망 섞인 기도를 했지만, 이 사람은 죽음을 눈앞에 두고서도 감사의 기도를 했습니다. 그런데 그들이 기도를 끝냈을 때 뜻밖의 기적이 일어났습니다.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 종려나무 몇 그루가 보였던 것입니다. 오아시스였습니다. 두 사람은 종려나무를 바라보면서 힘을 다해 그곳으로 달려갔습니다. 이윽고 그들이 종려나무 밑에 이르렀을 때, 거기에는 조그만 웅덩이가 하나 있었습니다. 그런데 물은 거의 다 말라버리고 겨우 한 두 모금 정도 남아있을 뿐이었습니다.

그것을 보면서 첫 번째 사람은 또 원망 섞인 말을 했습니다. "하나님, 이왕 물을 주시려면 많이 주시지 이 적은 물을 가지고 어떻게 저의 갈증난 목을 축일 수 있단 말입니까?" 그러나 두 번째 사람은 "하나님, 비록 적은 물이지만 이 물을 가지고 저의 갈한 목을 조금이라도 축일 수 있게 되었습니다. 그로 인해 제 생명이 조금 더 연장되어 마지막으로 한 번 더 하나님께 기도할 수 있게 해주시니 참으로 감사합니다." 고 기도했습니다. 그의 기도는 감사였고, 감격이었습니다.

인생을 살다보면 실망스럽고 낙심되는 일들이 많습니다. 우리 주변에는 우리를 실망시키는 요소가 정말로 많습니다. 여러 가지 환경이나 사람들, 그리고 어떤 때는 자기 스스로가 자신을 실망시키기도 합니다. 이런 때 사람들은 대개 두 가지로 반응합니다. 불평과 원망만 하다가 낙심한 사람과 이런 와중에도 감사의 조건을 찾고 하나님께 기도하므로 소망을 갖는 사람입니다. 우린 전자를 믿지 않는 사람이라 말하고, 후자를 신자라 말합니다. 신자 중에서도 전자를 성숙하지 못한 사람이라, 후자를 성숙한 사람이라고 부릅니다. 우리는 후자와 같은 태도를 가져야 합니다. 그렇지 않고 불평, 원망하게 되면 영적 침체에 빠지게 되고, 나아가선 자신이 불평하고 원망한대로 비참하게 됩니다. 사실 우리에게 일어난 사건이나 환경 자체가 문제가 아닙니다. 그것을 대하는 우리의 태도와 자세가 문제입니다. 아무리 중요하고 심각한 사건이나 문제도 감사와 기도로 받으면 축복이 되고, 아무리 사소한 일도 불평과 원망으로 받으면 화가 되는 것입니다.

오늘 하나님 말씀 속에서 모세는 우리에게 실망과 낙심을 어떻게 다루어야 하는지 그 해답을 주고 있습니다. 모세는 이런 문제를 다루는데 있어서 아주 지혜로웠습니다. 홍해를 건넌 이스라엘 백성은 3일 동안을 수르 광야를 지나게 되지만 그곳은 사막인지라 마실 물을 구할 수가 없었습니다. 불과 3일 전만 해도 물이 깊어서 어떻게 건널까 하는 게 문제였는데 지금은 물 한 방울 얻을 수 없는 문제에 부딪히게 된 것입니다. 겨우 오아시스를 발견했지만 그 곳의 물은 쓴 물이어서 마실 수가 없었고, 이스라엘은 실망했습니다. 여지없이 모세와 하나님을 향해 원망하며 불평했습니다. 하나님의 백성에게서 나타나면 안 되는 사단적인 반응이 하나님의 백성들에게서 나타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불평과 원망은 사단적인 반응입니다. 불평과 원망이 있는 곳에 사단이 역사합니다. 반면 감사와 찬양이 있는 곳에는 주님의 성령이 임하십니다.

사람들은 자신이 기대한 것만큼 되지 않을 때 실망하게 됩니다. 기대감이 무너지면서 '고작 이것뿐인가!' 하는 생각이 들 때 사람은 실망하게 됩니다. 그리고 더 이상 문제 해결의 가능성이 보이지 않을 때 사람은 낙심합니다. '다 끝났다'고 생각하며 낙심합니다. 또 현실적인 어려움과 고통이 너무 심할 때도 그렇습니다. 인내하지 못하고 주저앉아버리고 맙니다. 지금 이스라엘이 처한 상황이 이와 같습니다. 그들이 힘들게 사막을 가다가 오아시스를 만났는데, 고작 마라였습니다. 물이 써서 마실 수가 없었습니다. 우리들은 어떻습니까? 우리에게 혹시 마라의 문제가 없습니까? 경제적인 마라, 건강에 있어서의 마라, 가정이나 자식으로 인한 마라, 대인관계에 있어서의 마라. 우리에게 이런 마라를 만날 때 어떻게 해야 할까요?

첫째, 무엇보다 기도해야 합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마라를 주심은 기도하라는 사인(sign)입니다. 이런 사인에 올바로 반응하는 것이 신자의 모습입니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마라 앞에서 신앙적인 올바른 반응을 보이지 못했습니다. 그들은 모세와 하나님을 원망했습니다. 그러나 모세는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25절에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것이 모세가 인생의 마라를 만날 때마다 대처하는 방법입니다. 그는 자신이 해결하겠다고 인간적인 방법을 찾지도 않았고, 백성들처럼 원망하지도 않았습니다. 자신을 향해 원망하는 백성과 맞서지도 않았습니다. 그저 하나님 앞에 엎드려 하나님께 부르짖었습니다. 그렇습니다. 고통에 직면할수록, 마라와 같은 문제들이 엄습할수록 더욱 하나님께 매달려야 하는 것입니다. 언제나 인생에는 고통이 따를 수 있습니다. 우리 중 누구라도 극심한 고통에 시달리게 될 수 있습니다. 목사라고 그런 일이 없겠습니까? 인생에는 고통도 있고 슬픔도 있고 힘에 겨운 문제들도 얼마든지 있습니다. 그럴 때 이기는 방법이 기도인 것입니다. 무엇보다 주님께 가까이 나아가 부르짖는 것을 우선해야 합니다. 기도는 쓴 물을 단 물로 바꾸어 놓는 능력이 있습니다. 기도는 묶인 것을 풀어주고, 닫힌 곳을 열어주고, 길이 없는 곳에 길을 만들어 줍니다.

25절 말씀을 다같이 읽어보겠습니다. "모세가 여호와께 부르짖었더니 여호와께서 그에게 한 나무를 지시하시니 그가 물에 던지매 물이 달아졌더라.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아멘!

하나님께 기도할 때 하나님께서 해결책을 주셨습니다. 한 나무를 지시하십니다. 그 지시하신 나무를 쓴 물에 던져 넣었습니다. 그랬더니 물이 달아졌습니다. 문제가 아주 손쉽게 해결된 것입니다. 문제 해결의 길이 아주 가까운데 있었습니다. 하나님께서 하시면 아무리 심각한 문제도 이처럼 간단하게 해결됩니다. 이 하나님의 방법을 동원하는 비결이 바로 기도입니다. 그런데 사람들은 이 기도의 방법을 알지 못합니다. 기도하면 되는데 인간적인 방법이나 경험들을 동원합니다.

물론 하나님은 우리가 어려움을 당했을 때 대개는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을 통해 해결해주십니다. 돈이 있어야 해결할 수 있는 문제는 돈으로, 유능한 사람의 도움을 받아야 할 문제는 유능한 사람으로 해결해주십니다. 우리에게 문제가 있을 때 하나님은 대개 그렇게 해결해주십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집니다. 쓴 물에 나무를 던져 넣게 하셨습니다. 세상에서 생긴 문제에 세상에 있는 나무를 던져 넣게 하셔서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중요한 것은, 아무 나무나 던져 넣는다고 해서 쓴 물이 단 물 되는 것은 아니라는 사실입니다. 비록 세상에 있는 나무를 던져 넣을지라도 반드시 하나님께서 지시하시는 나무여야 합니다. 모세가 제멋대로 아무 나무나 집어던진 것이 아닙니다. 그 나무는 하나님이 지시하신 나무였습니다. 결국 세상에 존재하는 방법 역시 하나님의 손길 속에 있는 것입니다. 바로 이 하나님의 손길을 찾는 것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기도해야 하는 것입니다. 기도하면 하나님이 무엇이 적절한 방법인지 알려주십니다. 그 방법을 따라 순종하면 해결을 받게 되는 것입니다.

둘째, 마라를 두신 의미를 깨달아야 합니다.
기도하는 것만큼 마라의 의미를 깨닫는 것이 중요합니다. 왜냐하면 그 의미를 알아야 기도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25절 하반절 말씀입니다. "거기서 여호와께서 그들을 위하여 법도와 율례를 정하시고 그들을 시험하실새" 하나님께서 이스라엘 백성들 앞에 마라를 두셨던 이유를 말씀하고 있습니다. 하나님의 법도와 율례대로 사나 살지 않나 시험하여 확인하시려고 마라의 문제를 두셨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하나님 뜻대로 사는지 안 사는지 살피시는 이유는 애굽 사람에게 내린 질병을 내리지 않기 위해서라고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너희가 너희 하나님 나 여호와의 말을 청종하고 나의 보기에 의를 행하며 내 계명에 귀를 기울이며 내 모든 규례를 지키면 내가 애굽 사람에게 내린 모든 질병의 하나도 너희에게 내리지 아니하리니, 나는 너희를 치료하는 여호와임이니라."(26) 마라를 두신 이유는 결국 축복하시기 위해서라는 말씀입니다. 우리 인생의 마라는 하나님이 축복을 주시기 위해 마련하신 관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여러분, 인생에서 곤고한 일을 당할 때는 언제든지 그 곤고한 일을 주신 하나님의 뜻을 기억하시기 바랍니다. 괴롭게 하시려고 주신 고통이 아니라, 축복을 위해서 주신 고난입니다. 괴로움 중에도 하나님을 떠나지 않고 감사하는 마음으로 하나님 뜻대로 살면, 예비 된 축복은 바로 그 사람의 것입니다.
    큰 물결 일어나 나 쉬지 못하나
    이 풍랑 인연하여서 더 빨리 갑니다.(찬송가 503장 2절)
어떻게 이런 고백의 찬양이 가능할 수 있겠습니까? 그것은 마라의 의미를 깨달았기 때문입니다. 하여 고통스러운 마라 때문에 더 빨리 간다고 찬양한 것입니다.

셋째, 하나님께서 엘림을 준비해 놓으셨다는 것을 기억해야 합니다.
이 세상은 마라의 연속입니다. 인간은 날 때부터 울음을 터뜨리며 태어납니다. 살면서도 마찬가지입니다. 좋은 직장이라고 찾아가 보면 거기에도 마라가 있습니다. 생활이 조금 나아지면 천국이 될 줄 알았는데 거기에도 마라가 숨어 있습니다. 인생 자체가 마라입니다. 그러나 오늘 본문 27절은 이렇게 말씀합니다. "그들이 엘림에 이르니 거기 물 샘 열둘과 종려 칠십 주가 있는지라. 거기서 그들이 그 물 곁에 장막을 치니라."

우리에게는 하나님이 예비하신 엘림이 있습니다. 엘림은 쉼터란 뜻입니다. 평안과 안식의 장소란 의미입니다. 엘림은 하나님이 급조하신 장소가 아닙니다. 이미 준비되어 있었던 곳입니다. 하나님은 엘림에 물 샘 열둘과 종려나무 칠십 주의 축복을 준비해놓고 계셨습니다. 완벽한 오아시스입니다. 그러므로 엘림은 마라와 같은 세상, 마라와 같은 인생 가운데 하나님께서 마련하신 쉼터, 즉 평안과 안식의 장소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이 엘림은 어디입니까? 우리가 인생의 장막을 치고 안전히 쉴 수 있는 곳이 어디입니까? 교회입니다. 마라가 세상이라면 엘림은 교회입니다. 왜 교회가 엘림입니까? 교회에는 영혼의 생수인 예수님이 계십니다. 하나님의 생명의 말씀이 샘솟습니다. 성령의 생수의 강이 흐르는 곳이 교회입니다. 그리고 모든 믿는 자를 위한 십자가 그늘이 바로 교회에 있습니다. 우리가 세상에서 피곤하고 힘들고 괴로울 때는 주님이 우리를 위해 피 값으로 세우신 주님의 몸 된 성전을 기억할 수 있어야 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안식과 샘솟는 축복을 위해 예수님의 피 값으로 광야 같은 이 세상에 교회를 세우셨습니다.

사랑하는 성도여러분, 세상에서 괴롭고 힘든 일을 만났을 때, 위로 받고 싶을 때, 힘을 내어 언제든지 교회로 나오시기 바랍니다. 주님의 몸된 이 교회로, 주님의 피 값으로 세우신 이 성전으로 와서 예배하고 기도하고 찬송하십시오. 교회가 엘림입니다. 인생에 만족할만한 축복과 평안을 주시기 위해 하나님이 마련하신 축복의 장소입니다. 여기서 우리는 영육간의 치료를 받고, 참된 쉼을 얻을 수 있을 것입니다. 우리 인생의 치료자, 영혼의 치료자이신 하나님(26下)이 바로 여기에 계시기 때문입니다. 우리가 드리는 이 예배 가운데, 우리들이 함께 드리는 기도와 찬양 가운데 치료자 하나님이 계시기 때문입니다.

인생 마라를 만났을 때 더욱 기도하며 교회를 가까이 하십시오. 그러면 예비된 축복과 상처받은 영혼의 치료와 안식을 경험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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