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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Ⅴ, ‘고통’(가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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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356회 작성일 12-02-26 15:0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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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Ⅴ, ‘고통’(가시)

고후12:7~10

2012. 2/26   08:00, 11:00

중요한 것은 해석이다.

랍비 아키바가 나귀와 닭, 그리고 양초를 가지고 길을 떠났다. 나귀는 짐을 싣고, 닭은 아침에 일찍 일어나고, 양초는 밤에 성경을 읽기 위해서였다. 날이 어두워질 무렵 어느 마을에 도착한 그는 마을 사람들에게 하룻밤만 재워달라고 청했으나 야속하게도 다들 거절했다. 결국 그는 들판에서 잠을 자게 되었으나 누구도 원망하지 않고 이를 하나님의 섭리로 생각하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일이야’ 하고 중얼거렸다. 그는 자리를 펴고 눕기 전에 성경을 읽으려고 촛불을 켰는데, 느닷없이 세찬 바람이 불어와 촛불을 꺼버렸다. 그리고 어디선가 갑자기 맹수가 나타나 나귀와 닭을 물어갔다. 그야말로 불행이 겹으로 닥친 것이다. 그러나 그는 이 또한 하나님의 섭리로 여기며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이니 괜찮아’ 하고 스스로를 위로했다. 다음 날 아침, 그는 깜짝 놀라고 말았다. 그를 박대했던 마을이 시커먼 폐허로 변해 있었다. 알아보니 간밤에 산적들이 마을로 들이닥쳐 사람들을 모조리 잡아가고 마을에 불을 질렀던 것이다. 이 때 그는 하나님께 기도를 드리며 생각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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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만약 내가 마을에서 잠을 잤더라면 나도 산적들에게 잡혀갔을 것이고, 촛불이 꺼지지 않았더라면 불빛 때문에 들켰을 것이고, 나귀와 닭이 맹수에게 잡혀가지 않았더라면 그들이 내는 소리 때문에 역시 불행한 일을 당했을 것이다. 아, 역시 하나님께서 하시는 일은 모두 좋은 일이구나.’

 

사건(문제)이나 사실보다 중요한 것이 ‘해석’이다. 해석에 따라 그 의미(평가)와 태도가 결정되기 때문이다. 랍비 아키바처럼 불행한 사건도 믿음 안에서 긍정적으로 해석하면 긍정적인 의미를 발견하여 감사할 수가 있다. 그리고 해석을 결정하는 것은 생각이다. 항상 좋은 생각, 긍정적인 생각, 믿음의 생각을 가지고 있으면 좋고 긍정적으로 해석하게 되는 것이다. 모든 문제와 사건을 신앙적으로 해석할 수가 있다. 또한 이 생각을 지배하는 것은 믿음이다. 합력하여 선을 이루시는(롬8:28) 하나님에 대한 믿음이 항상 좋은 생각, 선한 생각, 긍정적인 생각, 믿음의 생각을 갖게 한다.

 

바울로 무릎을 꿇게 했던 육체의 가시

이 시간에는 복의 통로 다섯 번째 ‘고통’(고난)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한다. 사실 고통을 ‘복의 통로’로 해석하고 받아들이는 일이 결코 쉽지 않다. 특히 고통에 직면에 있는 당사자 입장에서는 더욱 그렇다. 그러므로 이것은 깊은 신앙적 통찰에서 나온 신앙고백이다.

 

본문은 고통에 대한 바울의 고백이다. 여기에 고통에 대한 바울의 생각과 해석, 그리고 태도가 잘 나타나고 있다. 바울은 자신의 고통을 몸에 박힌 ‘가시’, ‘사단의 사자’에 비유하고 있다(7). 가시는 헬라어로 ‘스콜롭스’(σκολοψ)인데, ‘말뚝’이란 뜻이다. 이는 몸에 말뚝이 박혀있다는 의미로 극심한 고통을 묘사한 것이다. 또한 이를 사단의 사자라고 한 것은 문제의 심각성, 즉 이 일로 복음사역에 큰 장애가 되고 있음을 강조한 것이다. 무엇이든 복음 사역을 방해하고 사역에 장애가 되는 것은 사단의 역사인 것이다. 바울의 몸에 박힌 가시가 무엇인가에 대한 학자들의 의견이 여러 가지나 그것이 무엇인지는 누구도 알 수 없다. 하지만 그것이 바울에게 심각한 고통거리였고, 그의 사역에 중요한 영향을 주었던 것은 분명하다. 그래서 그는 이를 제거해 달라고 주님께 세 번 기도를 드렸다(8). 이 세 번이란 단순히 숫자를 의미한 것이 아니라 이 문제를 위해 끊임없이 기도했다는 뜻이다(이를 통해서 이 문제가 그에게 얼마나 심각했는지를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이에 대한 주님의 응답은 ‘내 은혜가 네게 족하다.’(9)였다. 문제를 해결해 주신 것이 아니라 그 문제를 안고 살아가라는 뜻이다. 이는 가시에 대한 새로운 이해, 해석, 태도를 가지라는 의미이기도 하다. 이것이 주님께서 우리의 삶에 시련의 아픔과 고통을 주신 이유이기도 하다. 우리도 살다보면 심각한 가시에 찔릴 수 있다. 그 때 우리가 할 수 있는 일은 바울처럼 기도하는 것이다. 그런데 기도해도 그 문제가 해결되지 않는다면 그것을 새롭게 이해하고, 새롭게 해석하고, 그것에 대한 새로운 태도를 가질 필요가 있다. 그러면 생각지 못한 은혜를 경험하게 될 것이다.

 

가시에 대한 바울의 태도

우선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던 바울의 태도가 이제는 그 가시로 인하여 크게 ‘기뻐하고’, 가시를 ‘자랑하게’ 되었다.

 

“나에게 이르기시기를 내 은혜가 네게 족하도다. 이는 내 능력이 약한 데서 온전하여짐이라 하신시지라. 그러므로 도리어 크게 기뻐함으로 나의 여러 약한 것들에 대하여 자랑하리니 이는 그리스도의 능력이 내게 머물게 하려 함이라.”(9).

 

바울은 가시를 제거해 달라고 기도했으나 부정적인 응답을 받았다. 부정적이라기보다는 황당한 내용이다. ①가시가 ‘은혜’라는 것이고, ②그것을 ‘만족’하게 여기라는 것이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어떻게 말뚝이 박힌 것처럼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목숨보다 귀하게 여기는 사역(행20:24)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는 것을 크게 기뻐하고 자랑할 수가 있을까? 어떻게 이것을 은혜로 여기고, 만족하며 살 수 있을까? 그런데 바울은 이에 실망하거나 항변하지 않고 도리어 크게 기뻐하고 자랑하게 되었다. 이는 가시에 대한 새로운 이해와 해석을 가지게 되었기 때문이다. 무엇이든 생각이 변하고 해석이 변하면 태도도 변하게 되는 것이다(우산을 파는 아들과 짚신을 파는 아들을 둔 엄마 이야기). 그러므로 환경이나 상황과 같은 어떤 객관적인 사실을 바꾸려고 하기 전에 생각과 해석을 바꾸는 것이 중요하다.

 

가시에 대한 바울의 해석

우선 가시에 대하여 바울은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생각했다. 7절에서 바울은 “여러 계시를 받은 것이 지극히 크므로 너무 자고하지 않게 하시려고 내 육체에 가시 곧 사단의 사자를 ‘주셨으니’......”라고 했다. 가시가 비록 자신의 육체를 고통스럽게 하고 사단의 사자처럼 사역에 심각한 장애가 되고 있음에도 불구하고 그것이 주님으로부터 온, 주님께서 주신 은혜의 선물로 생각한 것이다. 이런 생각의 변화는 가시에 대한 새로운 해석을 가지게 했다. 바울은 자신에게 주어진 가시를 두 가지로 해석했다.

 

첫째, 교만을 막는 안전장치로서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해석했다(7).

바울은 많은 장점을 가진 사람이다. 혈통적으로는 순수한 히브리인이었고, 당대 최고의 율법학자 가말리엘에게서 율법을 교육받은 율법적으로 흠이 없는 사람이었다. 그리고 당시 세계에서 행세를 하려면 로마 시민권을 가져야했는데, 그는 나면서부터 로마 시민권을 가진 사람이었고, 헬라철학에도 능통했던 사람이다. 종교적 열심도 탁월했고, 기독교인이 된 다음에는 주님과 그의 복음을 위해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았던 사람이다(고후11:22~27). 그런데 본장 1절 이하의 내용은 보석반지 위에 값비싼 보석을 첨가한 반지를 더욱 돋보이게 하는 것과 같다. 여기서 바울은 한마디로 누구보다도 탁월한 여러 가지 영적 체험을 했다는 것이다. 이는 아마도 고린도교회 내에 있었던 영적 체험과 은사를 자랑하는 사람들을(고전12:~14:) 교훈하기 위하여 자신의 영적 체험을 말한 것 같다. 그런데 그런 그에게 주님께서 치명적인 가시를 주셨다. 그 이유는 이런 많은 장점으로 인하여 그가 교만하고, 교만해서 넘어질까 염려하여 그 안전장치로서 가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달리 표현하면 이 모든 장점들을 지키기 위하여, 그리고 그것을 선용하도록 하기 위하여 가시를 주셨다는 것이다. 그러니 그것이 어찌 은혜가 아니고, 그것을 기뻐하지 않고 자랑하지 않겠는가?

 

둘째, 주님의 능력을 머물게 하는 방편으로서 주님께서 주신 은혜로 해석했다(9).

물은 항상 높은 곳에서 낮은 곳으로 흐른다. 주님의 은혜도 마찬가지다. 본문은 은혜와 능력의 성격을 이렇게 말하고 있다. 주님의 은혜는 약한 데서 온전하여 지고, 주님의 능력은 약한 곳에 머문다. 가시는 자신의 연약함을 보게 하는 창문과 같다. 가시를 통하여 자신의 연약함을 발견하게 되고, 연약함을 깨닫게 된다. 겸손하게 된다. 그래서 주님 앞에 기도를 드리게 되고, 기도를 하니까 주님의 은혜와 능력이 그에게 머물게 되는 것이다. 그러니 가시가 은혜의 통로, 복의 통로인 것이다. 파스칼의 팡세는 누워서 기도하며 묵상하다가 영감이 떠오르는 것들을 써서 모은 것이다. 건강이 약하여 남들보다 더 많은 시간을 기도하며 지내다보니 이런 역작을 만든 것이다. 이것이 가시에 대한 바울의 또 다른 해석이다. 그가 가시를 크게 기뻐하고 자랑한 이유다.

 

우리나라 신학계에 성경 66권의 주석서를 남긴 이상근 목사님이 계신다. 이 목사님은 16세 때 발에 생긴 병으로 3년 동안 바깥출입을 못하여 학교도 못가고 집안에만 있어야했다. 설상가상으로 어머니가 단방약을 붙인 것이 독이 되어 평생 낫지 못하게 되었다. 검정고시로 고등학교졸업은 했으나 대학진학도 못했다. 대신 바깥출입을 못하니까 집안에서 성경을 거의 외우다시피 했다. 그 때 열심히 읽었던 성경이 성서학자가 되는 원동력이 되었다. 그런데 1993년 은퇴한 후에, 의사의 권유로 수술을 받았는데, 발뒤꿈치에서 1.5센티미터 정도 되는 머리카락 굵기의 철사가 나왔다. 어렸을 때 맨발로 다니다 찔린 철사가 속에 들어가서 평생 가시가 된 것이다. 이 목사님은 발 수술을 받은 후 철사를 들고 ‘이 철사가 나의 가시가 되어 60년 동안 나를 찔렀으나 나로 하여금 성서학자가 되게 한 주님의 은혜의 도구였다. 주님의 은혜가 내게 족하도다.’고 말했다.

 

고통은 인생의 양념이다.

아프리카의 어떤 풀은 입에 넣고 씹으면 몹시 쓰고 떫은데, 그것을 씹고 난 후에는 무슨 음식을 먹어도 달고 맛이 있다고 한다. 쓰디쓴 고난과 고통은 인생을 살아가는데 불가피한 양념과 같다. 그러므로 무엇이든지 믿음 안에서 감사함으로 받으면 버릴 것이 없다(딤전4:4). 주님께서 하신 일에 어찌 실패가 있고, 실수가 있겠는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뜻 없이 이루어진 일이 없다. 고난이나 고통도 예외가 아니다. 바울처럼 우리를 힘들게 하는 고통까지도 신앙적인 생각, 신앙적인 해석, 신앙적인 태도를 가지고 은혜의 통로, 복의 통로가 되게 하자.

 

 

 

※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오늘 말씀을 통하여 새롭게 깨달은 내용은 무엇입니까?

 

2. 오늘 말씀 중에 당신에게 도전이 되었던 내용이 있다면 어떤 부분입니까?

 

3. 당신에게는 어떤 가시가 있습니까?(오늘의 말씀에 비추어 새롭게 생각하고, 새롭게 해석해 봅시다. 당신의 가시를 어떻게 해석합니까?)

 

4. 살아오면서 어렵고 힘들었던 것(사건이나 사고, 문제)이 오히려 유익이 되었던 것이 있었다면 이야기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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