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활은 ‘승리’의 상징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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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131회 작성일 12-04-09 08:26본문
부활은 ‘승리’의 상징이다.
고전15:50~58
2012. 4/8 11:00(부활주일)
3D에서 3L로
초대교회에는 부활절에 인도자가 ‘주님이 살아나셨다.’고 선창하면 이를 받아서 회중이 ‘그가 정말 살아나셨다.’고 대답했다. 1세기 라틴교회에서는 ‘그가 살아있다.’(Vivit)고 선창하면, ‘그는 진정 살아있다.’(Vere Vivit)고 대답했다. 우리도 한 번 해보자. 새벽에는 초대교회처럼 했으니 이 시간에는 라틴교회처럼 해보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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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독교는 예수님의 부활이라고 하는 역사적이고, 객관적인 사실 위에 세워진 종교다. 부활은 우리 신앙의 핵심이다. 그래서 바울은 “만일 그리스도께서 다시 사신 것이 없으면 너희의 믿음도 헛되고 너희가 여전히 죄 가운데 있을 것이요.......만일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의 바라는 것이 다만 이생뿐이면 모든 사람 가운데 우리가 더욱 불쌍한 자리라.”(고전15:17~19)고 하였다. 부활의 사실성과 함께 부활신앙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씀이다. 지난 2,000년 동안 박해를 당하고, 신앙을 무너뜨리려는 각종 노력들이 수포로 돌아갔던 이유가 부활신앙 때문이다. 왜냐하면 부활은 승리의 상징이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부활의 승리는 구체적으로 무엇에 대한 승리일까? 주님의 부활은 죽음(Death)에 대한 ‘생명’(Life)의 승리, 어둠(Darkness)에 대한 ‘빛’(Light)의 승리, 미움(Dislike)에 대한 ‘사랑’(Love)의 승리이다. 부활은 ‘3D’(Death, Darkness, Dislike)를 ‘3L’(Life, Light, Love)로 바꾼 위대한 사건이다.
1. 부활은 죽음(Death)에 대한 생명(Life)의 승리다.
세 사람이 교통사고로 죽었다. 함께 저승으로 가면서 자신의 장례식에 찾아온 조문객과 가족에게 듣고 싶은 말에 대하여 이야기를 했다. 그러면서 첫 번째 사람이 자신은 ‘직장에서는 훌륭한 의사였고, 가정에서는 좋은 가장이었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두 번째 사람은 ‘가정에서는 좋은 남편이었고, 학교에서는 아이들에게 미래를 심어주는 훌륭한 교사였다.’는 말을 듣고 싶다고 했다. 이들의 이야기를 듣고 있던 세 번째 사람이 말했다.
‘앗, 저 사람 움직인다!’
그렇다. 사실 죽은 사람에 대한 찬사란 죽은 사람을 위한 것이 아니라 결국은 산 사람을 위한 것이다. 그러니 죽은 사람에게 그가 ‘다시 살았다.’는 말보다 더 절실한 것이 어디 있겠는가? 죽음은 모든 사람에게 가장 큰 고통이고, 절망이고, 골칫거리기 때문이다. 사람이 죽으면 어떻게 다시 살 수 있는가? 이것은 인류 최대의 관심사고, 인간 이성으로는 해결되지 않는 영원한 숙제이다. 그래서 성경은 ‘죽음을 맨 나중에 멸망 받을 원수’(고전15:26)라고 하였다. 그런데 이 죽음의 세력을 꺾어놓은 사건이 ‘주님의 부활’이다.
본문에서 바울은 ‘사망아, 너의 이기는 것이 어디 있느냐? 사망아, 너의 쏘는 것이 어디 있느냐?’고 외쳤다. 더 이상이 사망이 그 능력을 상실하였다는 선언이다. 죽음은 십자가에서 패배하였기에 그 이빨은 빠졌고, 그 세력은 꺾였다. 겨울의 세력이 봄기운에 물러나듯이 생명의 기운 앞에 죽음의 세력은 기를 쓰지 못하게 된 것이다. 죽음의 쏘는 가시인 죄가 소멸되고, 죽음의 권세를 휘두르던 사탄이 주님 앞에 굴복하였기에 죽음의 겨울은 더 이상 이 세계를 지배할 수 없다. 그래서 죽음이 신자들에게는 더 이상 위협이 되지 못했고, 소망을 품고 죽음을 맞았다(행7:59). 죽음을 끝으로 여기지 않고 부활하기 위해 죽었다. 그래서 ‘죽었다’ 하지 않고 ‘잔다’(행7:60)고 했다. 영면(永眠)이 아니라 긴 잠으로 생각한 것이다. 장막 집과 같은 이 세상에서 영원한 집으로 옮겨가는 것(고후5:1)으로 생각하였다. 주님의 부활로 죽음에 대한 이해나 해석, 태도가 완전히 바뀌게 된 것이다. 부활의 생명이 죽음을 완전히 삼켜버린 것이다. 이는 제자들의 모습에서 확인할 수 있다. 주님의 죽으심을 보고 뿔뿔이 흩어졌던 제자들, 두려워서 문을 닫고 꼭꼭 숨었던 제자들이 예루살렘 거리를 활보하며 ‘예수님이 그리스도다. 주님이 부활하셨다.’고 외쳤다.
2. 부활은 어둠(Darkness)에 대한 빛(Light)의 승리다.
어느 가정 이야기이다. 남편의 얼굴이 근심으로 구겨져 있었다. 무엇으로도 남편의 얼굴이 펴지지 않았다. 아내는 걱정이 되어 원인을 곰곰이 생각해보니 최근에 남편에게 달여 먹인 한약이 문제였음을 알게 되었다. 그 한약 이름이 무엇이었을까? ‘구기자’탕이다. 구기자를 달여 먹였더니 그만 남편의 얼굴이 구겨져 버린 것이다. 이제 아내는 어떻게 남편의 얼굴을 펼까 고민하였다. 드디어 묘안이 떠올랐다. 아내가 남편에게 선물을 하나 주었더니 남편의 얼굴이 환하게 펴졌다. 아내가 남편에게 준 선물은 무엇이었을까? ‘피자’다. 아내는 구기자로 구겨진 남편의 얼굴을 피자로 활짝 펴주었다.
인간사가 항상 그렇지만 세상의 온갖 염려와 근심이 우리를 짓누르고 있다. 잘 안되는 사업, 실직의 두려움, 막연한 미래에 대한 불안, 뜻대로 되지 않는 인간관계, 병고와의 싸움, 감당하기 버거운 책임들, 평탄치 못한 가정사 등. 그리고 우리를 언제나 속상하게 만드는 한심한 사회, 정치적 병리현상들도 있다. 이런 것들로 인하여 우리의 얼굴이 펴질 날이 없다. 선거철마다 연출되는 장면이지만 후보자들이 저마다 대안을 제시하고 있으나 뚜렷한 해결책은 없고, 오히려 근심만 더 할 뿐이다. 이렇게 길이 없는 여기에 길이 있다. 그것은 주님 앞으로 나오는 것이다. 주님은 구겨진 인생, 구겨진 삶을 펴주시는 분이시다. 특히 주님의 부활은 ‘구기자’ 인생을 ‘피자’ 인생으로 변화시키는 중요한 사건이다. 주님의 부활은 모든 인생에게 드리워져 있는 어둠의 세력에 대한 빛의 승리다. 부활하신 주님은 우리의 빛이다. 이 빛이 우리 마음에 있고, 가정에 있고, 삶의 현장에 있을 때 어둠이 말끔히 걷히고, 생명과 진리로 충만하게 된다.
3. 부활은 미움(Dislike)에 대한 사랑(Love)의 승리다.
줄기에 작은 가시가 무수히 많이 있는 ‘며느리밑씻개풀’이라는 다소 민망한 이름의 풀이 있다. 화장지가 없던 시절, 며느리를 학대하던 시아버지가 이 풀을 화장실 입구에 심어놓고 이 풀로 화장지를 대신하게 했다는 데서 붙여진 이름이다. 아마도 그 시절 며느리들의 고통스런 시집살이를 풍자한 것이라 여겨지는데, 아무튼 미움이 얼마나 고약한 것인가를 생각하게 한다. 아무리 며느리가 미워도 그렇지, 줄기에 가시가 무수한 풀을 화장지 대용으로 사용하게 했다는 사실이 너무 끔찍하다. 미움이란 이렇게 잔인하고 무섭구나 하는 생각이 든다. 그래서 성경은 ‘미움을 살인’(1요3:15)이라고 말씀한 것이다. 미움은 증오를 낳고, 증오는 살인을 부른다. 미움은 살인의 동기다. 살인의 뿌리다. 살인을 위해 살인한 사람은 없다. 대부분 미움 때문에 살인을 한다. 요셉의 형들은 요셉에 대한 미움이 쌓여서 결국 그를 죽이려고 했다(창37:20). 주님도 미움 때문에 죽으셨다. 그러므로 이 미움을 잠재울 수 있는 방법은 사랑뿐이다.
주님의 부활은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를 보여준 사건이다. 십자가에서 죽으면서까지 원수를 용서했던 주님의 사랑 앞에 미움은 설자리를 잃었다. 원수가 없는, 원수를 모르는 사랑! 이 사랑 앞에, 모든 증오와 미움과 갈등이 살아졌다. 주님은 모든 미움과 증오를 십자가에 못 박고, 그것들을 무덤에 묻고서 부활하셨다. 그러므로 십자가가 사랑을 위한 희생적인 실천이라면 부활은 사랑의 승리다. 이 사랑의 힘으로 스데반은 돌로 몰매를 맞으며, 피투성이가 된 얼굴을 들고 무리들의 죄를 용서해 달라고 기도했다. 그러한 힘이 어디에서 나올 수 있었을까? 하늘보좌에 앉아 자신을 지켜보고 있는 놀라운 사랑의 근원,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았기 때문이다. 그러니 우리의 마음과 삶과 관계 속에서 미움을 잠재우고 사랑으로 승리하는 비결은 부활의 주님을 바라보는 것이다. 부활의 신앙을 간직하는 것이다.
부활의 신앙으로 무장하라.
초대교회는 엄청난 고난과 핍박 속에서도 승리하는 교회다. 그것은 부활의 능력 때문이다. 주님을 따르는 고난과 역경의 삶을 이기고 고난 속에서도 기쁨을, 실패 속에서도 승리를 노래할 수 있었던 것은 부활의 능력 때문이다. 그렇기 때문에 부활을 의심하는 것은 곧 교회의 존재를 의심하는 것이나 한가지다. 교회의 존재가 부활의 가장 확실한 증거이기 때문이다. 실패한 예수, 십자가에서 처형당한 예수를 구세주로 선포하는 이 놀라운 반전은 부활에 대한 확신 없이는 생각할 수 없고, 도망갔던 제자들이 다시 모여 예수를 전하는 교회공동체를 이루게 된 사실도 부활 없이는 불가능한 일이다. 그래서 바울은 “그리스도께서 만일 다시 살아나지 못하셨으면 우리가 전파하는 것도 헛것이요, 또 너희의 믿음도 헛것이며.”(고전15:14)라고 말하였다. 내가 미쳤다고 이 엄청난 고난을 당하면서 십자가에 ‘저주받은’ 예수를 전하러 다니겠느냐는 말이다. 다시 말하면 주님의 부활이 사실이기에 사람들이 말하는 이런 ‘미친 짓’(?)을 하고 있다는 것이다.
고난 속에서도, 어려운 삶의 여건 속에서도 이렇게 승리에 찬, 기쁨으로 충만한 삶을 산 초대교회 신자와 오늘날 우리들의 삶은 너무 대조적이다. 그들과는 비할 수 없을 정도의 안락한 삶, 물질적 풍요 속에서도 우리는 우울하게, 무겁게, 근심과 염려, 두려움 속에서 어둡게 살고 있다. 이것은 무엇보다도 우리에게 부활에 대한 확신이 결여되어 있기 때문이다. 주님의 부활은 죽음에 대한 ‘생명’의 승리, 어둠에 대한 ‘빛’의 승리, 미움에 대한 ‘사랑’의 승리이다. 부활의 생명으로, 부활의 빛으로, 부활의 사랑으로 승리하는 삶이 되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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