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의 통로16, ‘충성스러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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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153회 작성일 12-05-27 16:32본문
복의 통로16, ‘충성스러움’
시101:1~8
2012. 5/27 08:00, 11:00
곁에 두고 싶은 사람
사람들 중에는 늘 곁에 두고 싶은 사람과 멀리 하고 싶은 사람이 있다. 경영자들은 다음과 같은 사람을 ‘늘 곁에 두고’ 함께 하고 싶어 한다고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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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째, 팀워크(연합) 역량이 높은 사람이다. 암컷 랍스터를 익힐 때는 뚜껑을 안 닫아도 되는 반면 수컷 랍스터를 익힐 때는 반드시 뚜껑을 닫아야 한다. 수컷 랍스터는 자기들이 ‘끓는 물에서 죽는구나!’라고 인식하면 서로가 사다리를 만들어서 밖으로 나가도록 도와준다. 그런데 암컷은 서로를 잡고 끌어내린다. ‘나만 죽을 수 없어 다같이 죽자!’ 이런 식의 논리다. 수컷 랍스터처럼 어려움에 처했을 때, 전체를 생각하며 서로 도울 줄 아는 사람, 나아가 함께 승리할 줄 아는 사람을 곁에 두고 싶어 한다.
둘째, 열정적인 사람이다. 누구도 부정적인 태도와 비판적인 자세를 가진 사람, 불평과 불만을 쏟아내는 사람, 낙심하여 비통함에 젖어 있는 사람과 함께 하고 싶어 하지 않는다. 식어버린 열정을 다시 타오르게 만들고, 힘들고 포기하고 싶은 순간에 보기만 해도 힘이 솟구치고, 지처서 안주하고픈 마음이 들 때 다시 시작하게 만들어 주는 열정의 사람을 좋아한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일하는 사람이 실력이 뛰어난 사람보다 더 놓은 자리를 차지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셋째,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사람들은 능력 있는 사람보다 충성스러운 사람을 더 좋아한다. 물론 충성이란 단어가 봉건왕조에서부터 독재정권에 이르기까지 통치이념이 되다보니 부정적인 시각도 많지만 관계를 형성함에 있어서 그 무엇보다도 중요한 덕목이다. 충(忠)이란 글자가 보여주듯(忠=中+心), 모든 것(者)에 ‘자기의 진심을 다하는 것’이다. 일을 할 때는 하는 일에 진심을 다하고, 부모를 섬길 때는 부모에게 진심을 다하고, 다른 사람을 대할 때는 그 사람에게 진심을 다하고, 주님을 섬길 때는 주님께 진심을 다하는 것이 충이다. 그래서 이런 사람을 늘 곁에 두고 싶어 하는 것이다.
제일(第一)은 ‘충성’이다.
참으로 마음 깊이 새겨두고 싶은 말이다. 하지만 이 셋 중에서 하나만 꼽으라면 그것은 충성이다. 충성스러운 마음이 있어야 팀워크의 역량을 높일 수 있고, 올바른 열정은 충성스러운 태도에서 나오기 때문이다.
본문은 다윗의 통치철학을 반영하는 시(詩)다. 본문에서 다윗은 하나님의 통치방식을 따라서 의롭게 나라를 다스리겠다는 자신의 통치철학과 함께 인사원칙을 말하고 있다. 우선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와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5)를 멀리하겠다고 한다. ‘자기의 이웃을 은근히 헐뜯는 자’란 왕의 총애를 얻기 위해 다른 사람을 깎아내리면서 아부하는 사람을 가리킨다. 이런 사람은 권력이 있는 곳이면 어느 곳에서든 쉽게 찾아볼 수 있는 간신배의 한 유형이다. 그리고 ‘눈이 높고 마음이 교만한 자’는 교만하고, 탐욕과 욕심이 그 마음에 가득한 자이다. 반면에 ‘충성된 자’(6)를 곁에 두겠다고 한다. 다윗이 선택한 신하의 자격은 고상한 가문출신이나 재력, 재능, 업적, 아첨하는 입술, 비굴할 정도의 고분고분함 등이 아니라 변함없는 충성심이 될 것이라는 뜻이다. 충성을 인사원칙의 최우선으로 삼겠다는 것이다. 사실 다윗을 따른 사람들이 그랬다. 다윗이 사울을 피하여 아둘람 굴로 도망하였을 때 환난을 당한 자와 빚진 자와 마음에 원통함이 있는 자들이 그에게 나아왔다(삼상22:1~2). 이런 사람들이 다윗에게 충성하여 가장 멋진 왕국을 건설한 것이다. 이와 같은 다윗의 인사원칙은 하나님께서 사람을 쓰시는 방법이다(고전4:2). 그러므로 충성은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로서 우리에게 절실히 요구되는 것이고, 주님의 복을 부르는 소중한 통로이다. 그래서 이 시간은 복의 통로 열여섯 번째, ‘충성스러움’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
잠언은 “충성된 사자는 그를 보낸 이에게 마치 추수하는 날에 얼음냉수 같아서 능히 그 주인의 마음을 시원하게 하느니라.”(25:13)고 말씀하고 있다. “추수하는 날”이란 보리와 밀을 추수하는 5,6월을 말하는데, 중동지방은 이때가 가장 무더울 때다. 이 때 시원한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이 충성스러운 사자라는 것이다. 이는 충성의 중요성과 충성스러운 사람의 가치를 말씀하고 있는 것으로 얼음냉수처럼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신자가 되라는 말씀이다. 그 비결이 충성이다.
고린도전서에서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라고 하면서 “저희가 나와 너희의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16:17,18)라고 말하고 있다. ‘시원하게 하다’는 말은 ‘위로를 주다’, ‘안식을 주다’, ‘생기를 넣어주다’는 말이다.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로부터 위로를 받고, 마음의 쉼을 얻고, 힘을 얻어 사역을 더 잘 할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들이야말로 바울에게 있어서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들이다. 그래서 그들이 그에게 온 것이 큰 기쁨이 된 것이다.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열을 받게 하는 사람, 그리고 열을 식혀주는 사람이다. 어떤 사람은 보기만 해도 답답해지는 사람이 있다. 문제를 가지고 만나면 문제가 해결되는 것이 아니라 더 심각해지고, 즐거운 마음으로 만났는데 결국은 불쾌한 마음을 가지고 돌아오게 하는 사람이다. 성경은 충성스러운 사람의 반대를 ‘게으른 사람’이라고 한다. 그리고 게으른 사람을 ‘그 부리는 사람에게 마치 이의 초 같고 눈의 연기 같다.’(잠10:26)고 했다. 초는 이를 시게 하고, 연기는 눈을 맵게 한다. 이는 사람을 괴롭게 하는 것을 뜻한다. 충성스럽지 못한 사람은 그 주인을 괴롭게 만드는 사람이다. 열을 받게 하는 사람이다. 반면에 만나면 마음이 시원해지는 사람이 있다. 문제를 가지고 있어도 그 사람 때문에 그것이 절반으로 줄어들고, 즐거운 마음으로 만나면 그 즐거움이 더 커지는 사람이 있다. 불쾌하다가도 그를 만나면 기분이 좋고, 힘이 나고, 용기가 생기는 사람이 있다. 뜨거운 감동을 주는 사람이 있다. 이런 사람이 “얼음냉수”와 같은 사람이다. 다윗이 충성스러운 사람을 찾아서 곁에 두고자 했던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다윗의 세 용사 이야기, 삼하23:13~17 참조).
모쪼록 우리와 우리 교회가 사람들의 눈에서 눈물을 흘리게 하는 연기와 같은 존재, 이를 시게 하는 초와 같은 존재, 그래서 열을 받게 하는 존재가 아니라 얼음냉수와 같이 열을 식혀주는 존재가 되기를 바라며, 나아가서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릴 수 있기를 소원한다. 그래서 주님으로부터 이런 칭찬을 들었으면 좋겠다. ‘내가 너를 보니 더위가 싹 달아나고, 내가 너를 보니 얼음냉수를 들이킨 것보다 더 시원하고, 내가 너를 보니 내 마음이 너무너무 즐겁다!’ 주님의 얼음냉수! 이 세상의 얼음냉수! 이것이 건강한 신자이고, 교회의 모습이다. 주님은 바로 이런 사람, 이런 곳에 복을 주시고, 그 주변을 복되게 하신다.
빈사(瀕死)의 사자상
로마교황청을 지키는 근위병이 있다. 그런데 그들이 모두 스위스군인이다. 이탈리아 한가운데 있는 교황청의 방위와 경비를 이탈리아군대가 맡지 않고, 왜 스위스군대가 맡고 있는 것일까? 여기에는 이런 이유가 있다. 프랑스 대혁명(1792. 8. 10) 때, 당시 루이 16세를 호위하던 호위병은 프랑스 병사들과 스위스 용병 768명을 비롯한 일단의 외국 용병들로 구성되어 있었다. 혁명이 일어나 분노한 시위대가 왕궁으로 진격해 오자 스위스용병을 제외한 모든 호위병들이 도망갔다. 더 이상 왕위를 지킬 수 없다고 생각한 왕은 자신을 호위하는 사람들에게 ‘너희는 프랑스와 아무 상관이 없으니 쓸데없이 목숨 잃지 말고 고향을 돌아가라.’고 했다. 하지만 용병을 지휘하던 12명의 스위스장교들이 긴급회의를 가진 후 이런 결론을 내렸다. ‘우리 스위스군대는 한 번 지킨 충성과 신의는 끝까지 지킨다.’ 그리고 그들은 단 한 명도 도망가지 않고 왕을 지키기 위해 시민 혁명군과 항전을 벌였고, 그 결과 768명 모두가 전사했다. 그 후 유럽에서 충성은 스위스군대의 트레이드마크가 되었다. 이런 이유로 바티칸은 스위스사람에게 근위병 임무를 맡기고 있는 것이다.
스위스 뤼체른(Lyutsern)이라는 도시의 공원에 ‘빈사의 사자상’이 있다고 한다. 사자가 상처를 입고, 등에는 창이 꽂혀 죽음을 기다리는 모습이다. 포효하는 용맹한 모습의 사자도 있는데 왜 하필 이런 비참한, 마지막 숨을 거두기 직전의 사자모습을 조각했을까? 이 빈사의 사자상이 죽기까지 충성과 신의를 지켰던 근위병을 기리기 위해 조각된 조각상이다. 이것이 충성이다. 목숨을 걸고 약속한 것을 끝까지 지키는 것, 손해가 되더라도 그 약속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다. 주님께 대한 충성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우리에게 맡겨주신 일을 감당할 때 때로는 손해를 볼 수 있고, 때로는 뜻하지 않는 어려움을 겪을 수도 있고, 심지어 어떤 경우에는 내 목숨을 내놓아야할 만큼 큰 시련을 겪을 수도 있다. 그럴지라도 주님과의 약속을 기억하며 신의를 끝까지 지키는 것, 이것이 곧 충성이다. 이런 사람이 충성된 사자다.
오늘 주님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논리 정연한 ‘머리꾼’이 아니다. 교회행정을 잘 알고, 교회정치를 잘 아는 ‘행정가’나 ‘정치가’도 아니다. 목사의 설교는 어떻고, 교회는 어떻고, 누구는 어떻고, 자기 논리와 판단으로 잣대질하는 ‘비평가’가 필요한 것이 아니다. 오늘 교회에 필요한 사람은 ‘충성스러운 사람’이다. 주님의 사랑에 감격하여 어떤 어려움에도, 어떤 손해도, 어떤 여건에도 굴하지 않는 ‘헌신된’ 믿음의 용사가 필요하다. 주님은 이런 사람들과 함께 하시고, 이런 사람들을 통하여 일하시고, 이런 사람들에게 복을 주시고, 이런 사람들 때문에 그들이 섬기는 곳을 복되게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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