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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기뻐하라.(06-09-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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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041회 작성일 06-09-19 17:56

본문

항상 기뻐하라.
살전5:16~18


기쁨을 갈망하는 사람(세상)들, 기쁨을 주지 못하고 있는 교회(신자)
어느 교회 관리인이었습니다. 낮에 교인들에게 얼마나 스트레스를 받았던지 그만 술을 잔뜩 마시고 말았습니다. 그리고 막 잠을 자려고 하는데, 누가 요란하게 교회 문을 두들겼습니다. 문을 열고 보니 지나가는 어느 술꾼이었습니다.
술에 취한 목소리로 관리인이 술꾼에게 ‘무슨 일이요.’하며 퉁명스럽게 물었습니다.
그러자 술꾼이 ‘이제부터 이 교회 교인이 되고자하는 사람이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엇 때문에 교인이 되려고 하는데요.’하고 또 관리인이 묻자,
‘나는 지금 너무 괴롭소. 그런데 듣자니 예수란 양반을 만나면 마음의 괴로움이 사라지고 기쁜 마음을 얻을 수 있다기에 그 분을 믿어보려고 그러오.’라고 술꾼이 대답했습니다.
그러자 이 관리인이 이렇게 말하고 문을 꽝 닫고는 들어가 버렸습니다. ‘여기 그런 분 없소!’

이 이야기는 지어낸 유머일 것입니다. 신실하게 교회를 섬기는 관리인이 스트레스를 술로 풀 리가 없고, 믿겠다고 찾아온 사람을 그렇게 불성실하게 대할 수는 없다고 봅니다. 그렇지만  이 이야기가 우리가 주는 교훈은 실로 크다고 봅니다. 여기 이 술꾼은 예수를 모르고 살아가는 세상과 세상 사람들의 모습이라면, 관리인은 이 시대의 교회와 신자들의 모습입니다. 참된 기쁨, 참된 평안은 신자들만 추구하는 것이 아닙니다. 이 세상과 세상 사람들도 참된 기쁨, 심령의 낙을 갈망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런 기쁨이 채워지지 않으니까 가짜 기쁨인 육체적이고 정욕적이고 마귀적인 쾌락을 추구하고 있는 것입니다. 참된 기쁨, 참된 행복에 취하지 못하니까 술에 취하고 약물에 취하고 재물에 취하고 명예에 취하고 요즈음 한참 뉴스거리가 되고 있는 사행성 오락에 취한 것입니다. 이 때문에 사람들의 심령은 병들고 가정은 파괴되고 사회는 점점 혼탁해 지는 것입니다.

헬라어에 기쁨이란 단어가 두 종류가 있습니다. 하나는 ‘헤도네’라는 단어이고, 다른 하나는 ‘카라’라는 단어입니다. ‘헤도네’는 육체적인 쾌락(영, enjoy)이란 뜻이고, ‘카라’는 영적 정신적인 즐거움(영, rejoice)이란 뜻입니다. 헤도네는 세상적이고 마귀적인 것이요, 카라는 예수 그리스도께서 주신 것입니다. 그런데 이 헤도네는 사람들에게 절대로 만족을 주지 못합니다. 오히려 더 깊은 갈증으로 빠져들게 만듭니다. 오직 카라만이 심령의 평안과 만족을 줄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래서 세상에서 헤도네에 지친 사람들이 카라를 찾아 교회로 왔는데, 문제는 교회와 신자들 역시 그 기쁨(카라)을 주지 못한 점입니다. 교회와 신자들이 참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세상 사람들에게 보여주지 못한다는 점입니다. 앞 이야기에서 ‘여기 그런 분 없소!’라고 말한 관리인의 대답이 무엇을 의미하겠습니까? 한마디로 나도 그 기쁨을 간직하지 못하여 술을 의지하고 있는데, 이 교회 안에 기쁨이 없어서 서로에게 상처를 주면서 고통하며 살아가고 있는데 무슨 소리냐는 것입니다. 정말 비극이 따로 없습니다. 이것이 바로 비극입니다. 신자들의 비극이고, 교회들의 비극, 이 시대의 비극입니다.

왜 기뻐해야합니까?
정말 우리와 우리 교회는 이 세대와 이 세대 사람들에게 기쁨의 근원이신 예수 그리스도를 보여줄 수 있어야 합니다. 그 비결은 우리와 우리 교회 안에서 먼저 주님께서 주시는 기쁨으로 충만해야 합니다. 내가 기쁘고 행복해야 이 기쁨, 이 행복을 전할 수가 있지 않겠습니까? 내게 이런 기쁨이 없으면 우리 역시 앞 이야기의 관리인처럼 ‘나 그런 사람 모르오, 여기 그런 사람 없소. 다른 곳에 가서 알아보시오’라고 말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에게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왜 기뻐해야 합니까?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오늘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그토록 갈망하고 소원하는 ‘나(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을 아주 명쾌하게 말하고 있습니다. 그것은 항상 기뻐하는 것, 쉬지 않고 기도하는 것, 범사에 감사하는 것입니다. ‘기쁨-기도-감사.’ 이 세 가지가 우리가 순종해야 할 하나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사실 하나님의 뜻은 너무 쉽고 간단합니다. 만약 아브라함처럼 외아들을 제물로 바치는 것이 하나님의 뜻이라면 어떻게 되었겠습니까? 그런데 하나님은 기뻐하는 것, 기도하는 것, 감사하는 것이 우리를 향한 당신의 뜻이라고 말씀하고 있습니다. 저는 이 세 가지 중에서 기쁨에 대하여 여러분과 함께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쁨을 모르는 세상에서 기뻐하는 것, 그리고 이 기쁨을 전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그리고 명령입니다. 본문을 비롯하여 이 기쁨과 관련된 대부분의 문장들이 ‘현제 명령형’으로 되어 있습니다. 현재의 형편이나 상황에 관계없이 기뻐하라는 것입니다. 이는 선택이 아니라 명령입니다. 신자란 누구입니까? 바울이 고백한 것처럼, 주님의 뜻에 살고 죽는 사람들입니다. “우리가 살아도 주를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를 위하여 죽나니 그러므로 사나 죽으나 우리가 주의 것이로다.”(롬14:8) 또한 주님의 명령에 순종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러면 왜 우리가 기뻐해야 하는가는 자명한 일이 되는 것입니다. 기뻐하는 것이 우리를 향하신 주님의 뜻이요, 명령이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무엇을 기뻐해야 합니까?
1. 주님 안에 있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요15:11 “내가 이것을 너희에게 이름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 우리가 이 땅에서 예수님 믿고 누리는 가장 복은 주님과의 연합의 복입니다. 예수님이 내 안에 찾아와 나와 함께 하여 주신 것입니다. 이것은 참으로 엄청난 사건입니다.

어떤 일에 푹 빠져서 사는 사람을 그 일의 매니아라고 말합니다. 이런 매니아들은 그 일 때문에 인생을 기쁘게 삽니다. 축구 매니아는 축구 때문에 기뻐하고, 등산 매니아는 등산 때문에 기뻐합니다. 인터넷 매니아는 인터넷 때문에 기뻐하고, 독서 매니아는 책 읽는 재미로 삽니다. 이들에겐 비록 다른 것이 없거나 불편해도 그것만 있으면 됩니다. 그리스도인은 그리스도의 매니아들입니다. 우리는 그리스도 때문에 기뻐하는 사람들입니다. 비록 내가 지금 환경적으로는 어렵고 힘들어도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신다는 것만으로 기뻐하는 믿음을 가져야 합니다. 환난이나 곤고나 핍박이나 기근이나 위험이 있어도 생명의 주인, 만유의 주인, 능력이신 주님이 나와 함께 하심을 기억하며 기뻐할 수 있어야 합니다. 이것이 바로 그리스도인입니다.

2. 주님의 몸된 교회의 지체됨을 기뻐해야 합니다.
주님이 내 안에 계시고, 내가 주님의 거룩한 몸된 교회의 지체라는 것. 얼마나 놀라운 사실입니까? 구약의 성도들은 세상에서 왕후장상(王侯將相)보다 주님의 전의 문지기로 있기를 소망했습니다. 구약시대 같으면 우리와 같은 이방인들은 성전 뜰도 밟을 수 없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주님의 은혜로 이 거룩한 성전의 지체가 된 것입니다. 그러니 어떻게 기뻐하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우리 찬송가(141장 5절)에, ‘늘 울어도 눈물로써 못 갚을 줄 알아 몸밖에 드릴 것 없어 이 몸 바칩니다.’라는 가사가 있습니다. 이 눈물은 좌절의 눈물, 회한의 눈물, 회개의 눈물이 아닙니다. 나 같은 것을 구원하여 몸된 교회의 지체되게 하심에 대한 감사의 눈물, 나 같은 것을 주님의 자녀 삼아 주시고 천국의 백성이 되게 하심에 대한 은혜의 눈물, 기쁨의 눈물입니다.

3.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음을 기뻐해야 합니다.
딤전1:12~13절에서 바울은 이런 고백을 하고 있습니다. “나를 능하게 하신 그리스도 예수 우리 주께 내가 감사함은 나를 충성되이 여겨 내게 직분을 맡기심이니, 내가 전에는 훼방자요 핍박자요 포행자이었으나 도리어 긍휼을 입은 것은 내가 믿지 아니할 때에 알지 못하고 행하였음이라.” 수요일 밤 예배마다 사도행전을 통해 배우고 있듯이, 바울이 복음전도에 목숨을 걸고 헌신한 이유, 핍박을 받으면서도 복음전도사역을 기쁨으로 감당한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자격이 없는 자신을 충성되이 여겨 복음전파의 직분을 맡겨주심에 대한 보답입니다. 주님의 거룩한 사역에 쓰임받고 있다는 기쁨 하나로 모든 박해, 고난, 고통, 불편함을 극복한 것입니다.

어떻게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있을까요?
1. 쉬지 않고 기도와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입니다.
본문의 ‘기쁨-기도-감사’는 서로 독립적인 내용이면서 동시에 서로의 방법이 되기도 합니다. 기쁨은 주님의 선물이고, 성령의 열매입니다. 주님은 기도하는 자녀에게 성령을 선물로 주신다고 하셨습니다. 그리고 이 성령의 열매가 기쁨입니다. 그러므로 항상 기뻐하는 삶은 쉬지 않고 기도함에 있습니다. 또한 기쁨은 감사의 원인이자 결과이기도 합니다. 감사하는 사람은 기뻐합니다. 범사에 감사하는 것이 항상 기뻐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2. 섬기는 생활입니다.
사람은 의미와 가치를 추구하는 존재입니다. 기쁨은 바로 이 의미와 가치있는 삶의 결과입니다. 사람은 의미있고 가치있는 일을 할 때 보람과 기쁨을 갖게 됩니다. 그 일은 누군가를 섬기는 일입니다. 무엇보다도 주님을 섬기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섬기는 일입니다. 주님을 섬기는 마음으로, 몸된 교회를 섬기는 심정으로 다른 사람을 섬기고, 가정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고, 맡겨진 일에 최선을 다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기뻐하는 삶의 비결입니다.

3. 기뻐하는 삶의 습관화입니다.
본문에서 항상 기뻐하라! 이 말씀은 두 가지 의미가 있습니다. 하나는 환난이나 시험, 역경이나 순경, 기쁠 때나 슬플 때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사람이 되라는 의미이고, 다른 하나는 기뻐하는 것이 습관이 되도록 하라는 것입니다. 본문에 ‘기쁨-기도-감사’ 앞에 ‘항상-쉬지 말고-범사에’라는 수식어가 붙어 있습니다. 이들의 의미는 한마디로 ‘몸에 배게’라는 뜻입니다. 즉 몸에 배도록 기뻐하고, 몸에 배도록 기도하고, 몸에 배도록 감사하라는 뜻입니다. 이렇게 ‘기쁨-기도-감사’가 습관이 되기 위해선 지속적인 훈련이 있어야합니다. 세상에 거저 되는 것은 없습니다. 합당한 대가를 치러야 이룰 수가 있는 것입니다.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우리가 예수를 믿어서 구원을 받은 것은 거저 받은 은혜이지만 신앙생활은 훈련을 필요로 합니다. 훈련을 통해 성숙한 신앙, 영적 좋은 습관들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무슨 일이든 몸에 배면 그냥 흘러넘치게 됩니다. 기뻐하는 생활도 마찬가집니다. 기뻐하는 생활이 몸에 배면 어떤 상황에서도 기뻐하는 삶을 살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항상 기뻐하는 삶을 살 수 있는 비결입니다.

솔트라인(salt-line)이란 말이 있습니다. ‘소금 띠’로 해석해도 괜찮을지 모르겠습니다. 흐르는 강물과 잔잔한 바닷물이 만나는 지점을 솔트라인이라고 합니다. 그런데 이 솔트라인은 유동적입니다. 비가 오질 않아 강물이 줄어들면 솔트라인이 강물 안쪽으로 형성이 되고, 비가 와서 강물이 많으면 솔트라인이 바다 깊숙이 형성이 됩니다. 우리 신앙생활도 마찬가집니다. 성령이 충만하여 은혜가 충만하고, 기도생활 감사생활이 충만하여 삶에 기쁨이 넘치면 세속적인 불안 염려 걱정 등이 우리 삶에서 멀리 떠나게 됩니다. 성령 충만하지 못하고 기도와 감사생활에 실패하여 삶에 기쁨을 잃어버리면 불안 염려 걱정 등이 우리의 삶 깊이 파고들어 우리를 파멸로 이끄는 것입니다. 우리 모두 성령이 충만하여 은혜가 충만하고, 기도생활 감사생활이 충만하여 항상 기뻐하는 삶,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서도 기뻐할 수 있는 삶을 삽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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