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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6, ‘동사형 인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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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974회 작성일 12-10-14 15: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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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의 통로36, ‘동사형 인간’

수1:1~6

2012. 10/14. 08:00 11:00

믿음은 동사다.

‘재해경제’(economics of disaster)라는 말이 있다. 지진, 홍수, 태풍과 같은 재해가 지나간 뒤 일정기간이 지나면 재해지역의 경기가 좋아진다는 것이다. 재해경제는 3단계로 구분되는데, 1단계는 재해 직후 손실의 시기다. 2단계는 간접손실의 시기다. 재해로 인한 실업증대, 여가활동의 손실 등이다. 그 후 3단계는 회복의 시기다. 재건의 기운을 타고 돈이 풀리고, 일자리가 많이 생기고, 거래가 활발해진다. 그래서 재해를 당한 것이 당장에는 엄청난 손실이고 재앙처럼 보이지만 장기적으로 보면 오히려 새로운 발전의 기회가 될 수 있다는 것이다. 어떤 힘들고 어려운 상황도 그 안에 희망의 씨앗을 품고 있다는 것을 경제적으로 해석한 것이다. 이것은 경제뿐만 아니라 모든 일이 그렇다. 당장에는 불행이고 실패이고 고통처럼 보여도 그 안에 행복의 씨앗, 성공의 씨앗, 기쁨의 씨앗이 있다. 이렇게 보고, 이렇게 해석하는 것이 ‘믿음’이다. 믿음은 ‘없는 것’(nothing)보다 ‘있는 것’(something)을 보고, ‘문제’(problem)보다 ‘가능성’(possibility)을 보기 때문이다. 그래서 믿음은 문제를 넘어서는 역동적인 ‘동사형’ 인간이 되게 한다. 이는 믿음의 본질이 ‘동적’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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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떤 시인은 ‘의심은 장애물을 보고 믿음은 대로(大路)를 본다. 의심은 어두운 밤을 보고 믿음은 밝은 낮을 본다. 의심은 발걸음 옮기는 것을 두려워하고 믿음은 높이 치솟는다. 의심은 누가 믿겠냐고 속삭이고, 확신은 내가 믿는다고 대답한다.’고 했다. 이런 멋진 말도 있다. ‘믿음 없는 사울에게는 골리앗이 치기에 너무 컸고, 믿음의 사람 다윗에게는 골리앗이 놓치기에 너무나 컸다.’(too big to hit, too big to miss). 즉 다윗의 돌멩이가 비켜가기에 골리앗이 너무 컸다는 뜻이다. 믿음은 골리앗을 보고 숨지 않고 일어서게 하고, 골리앗을 향하여 선포하며 나아가게 한다. 이것이 다윗이 보여준 신앙의 본질이다. 성경은 우리 역시 이런 신앙의 사람이 되기를 기대한다. 그래서 예수님은 “믿음 없는 자가 되지 말고, 믿는 자가 되라.”(요20:27)고 하시며, “할 수 있거든이 무슨 말이냐 믿는 자에게는 능히 하지 못할 일이 없느니라.”(막9:23)고 하셨다. 이런 믿음의 사람에게 주님의 복이 임하고, 주님의 복이 따르고, 그 복을 주변에 뿌리는 사람이 될 수 있다. 그렇다면 주님의 복이 임하고, 주님의 복이 따르는 믿음은 어떤 믿음일까?

 

전진하는 신앙

구약에서 신앙의 역동성을 강조한 책이 여호수아서다. 여호수아서의 메시지는 ‘신앙의 행진’이다. 약속의 땅 가나안을 향해 계속 나아가라는 것이다. 그렇다. 신앙의 본질은 항상 ‘동적’이다. 이를 몸으로 실천한 사람이 정글 선교의 선구자 리빙스턴(D. Livingston)이다. 그는 이렇게 외쳤다. ‘앞으로 가는 곳이라면 나는 어디든지 간다.’ 이것이 그의 좌우명이었다. 오늘 본문 역시 이를 강조하고 있다. 본문 2절이 바로 그것이다.

 

“내 종 모세가 죽었으니 이제 너는 이 모든 백성과 더불어 일어나 이 요단을 건너 내가 그들 곧 이스라엘 자손에게 주는 그 땅으로 가라.”(2).

 

여호수아서는 모세의 죽음으로 시작하고 있다(1). 이는 새로운 시대, 모세시대가 가고 여호수아시대가 왔음을 의미한다. 광야시대가 지나가고 새로운 가나안 정복시대의 도래를 선포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여기엔 이스라엘 백성이 치러야할 중요한 대가가 있다. 그것은 모세로부터 단절이다. 때문에 2절에서 ‘모세의 죽음’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심지어 모세가 죽어서 벧브올 맞은편 모압 땅에 있는 골짜기에 장사되었는데, 오늘까지 그 묘를 아는 자가 없다고 하였다(신34:6). 이것은 이스라엘로 하여금 모세에게 더 이상 연연하지 않도록 하기 위함이다. 분명 모세는 출애굽의 영웅으로 이스라엘에게 국부적인 존재다. 하지만 거기서 벗어나야한다. 그래야 온전한 여호수아시대, 가나안 정복시대를 기대할 수가 있다. 그래서 하나님께서는 여호수아시대를 맞이하여 하신 첫 명령이 ‘일어나.......가라’는 것이었다. 이것은 모세시대에 연연해하지 말고 박차고 일어나 전진하라는 것이다. 이는 마치 주님께서 38년 된 병자에게 “일어나 네 자리를 들고 걸어가라”(요5:8)고 명령했던 것과 같다. 신앙은 병 때문에 평생 침상에 의지하여 살았던 삶에 도전하는 것이다. 지금까지 의지했던 모든 것들을 뒤로 하고 앞으로 전진하는 것이다. 신앙은 진행형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의 특징이다.

 

도전하는 신앙

본문에 또 하나의 중요한 동사가 나온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으라.’는 말씀이다. 본문 3~4절 말씀이다.

 

“내가 모세에게 명한 바와 같이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너희에게 주었노니 곧 광야와 이 레바논에서부터 큰 강 유브라데 강까지 헷 족속의 온 땅과 또 해 지는 쪽 대해까지 너희의 영토가 되리라.”(3,4).

 

신앙이란 싸워서 취하는 것이 아니다. 이미 이겨놓은 싸움이다. 하나님께서 이미 허락하신 것을 믿음으로 거두는 것이다. “너희 발바닥으로 밟는 곳은 모두 너희에게 주었노니”(3)라고 선언하고 있다(완료형). 그러니 그 땅에 들어가 발로 밟기만 하면 나의 영토가 된다. 그렇지만 이 말씀은 이미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지만 발바닥으로 밟지 않으면 얻지 못할 수도 있음을 뜻한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허락하셨을지라도 모든 것이 자동으로 주어진 것이 아니라 자신의 발바닥으로 밟아서 정복해야 하기 때문이다. 4절은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서 허락하신 발바닥으로 밟아서 취할 땅을 보여준다. 하나님이 이스라엘에게 허락하신 땅은 지금의 이스라엘 지역은 물론이고 레바논과 시리아까지 포함되는 땅이다. 이것은 이스라엘의 전성기보다도 훨씬 더 넓은 땅이다. 결국 이스라엘이 하나님께서 허락하신 땅을 완전히 회복한 적이 없었다는 뜻이다. 그것은 믿음이 부족해서 ‘너희 발바닥으로 밟으라.’고 하신 말씀을 온전히 실천하지 못했기 때문이다.

 

이런 예는 이스라엘만이 아니라 오늘날 우리도 마찬가지다. 주님께서 말씀을 통해서 약속하신 것은 많은데 우리는 그 일부분만 소유해서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주님께서는 이미 주었다고 하셨는데, 믿음이 없어서 발바닥으로 밟지 못한 까닭이다. 예를 들면 십일조(말3:10)나 주일성수(사58:13,14), 나눔의 생활(잠11:25)에 큰 복을 약속하셨는데, 그것을 온전히 받지 못하고 온전히 누리지 못함은 믿음이 부족하여 발바닥으로 밟지 못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니 주님의 약속에 대한 확실한 믿음을 가지고 도전하는 신앙이 필요하다. 신앙이란 ‘모험’(venture)이기 때문이다. 어느 신학자의 인생 표어다. ‘Nothing venture, nothing win!’(모험이 없으면 승리도 없다!). 믿음으로 모험할 때 승리자로, 성공자로 살아갈 수 있다. 복둥이로 살아갈 수 있다는 뜻이다. 신앙은 모험을 감행할 때 그 빛을 발하게 된다. 생의 험한 길을 무릅쓰고 오직 주님만 믿고 도전하는 신앙은 약속의 땅 가나안을 정복할 수가 있다. 주님의 약속을 온전히 누릴 수가 있다. 신자에게 있어서 모험은 상식이고, 용감한 전진은 매일의 일과이다.

 

호리병 신앙

호리병은 몸통에 비하여 주둥이가 아주 작다. 입구가 작기 때문에 병 속에 들어 있는 것들이 빠져나올 때 어렵다. 특히 나오기가 어렵다보니 그 안에서 고이게 되고 고이다 보면 썩게 된다. 신앙도 호리병과 같은 신앙이 있다. 말씀을 늘 듣고, 읽고, 공부는 하지만 그것을 삶으로 드러내지 못한 경우가 있다. 말씀을 삶에 적용하여 순종하지 않고, 다른 사람들에게 전하지 않으면 결국 안에서 썩게 된다. 이것이 호리병 신앙이고 호리병 신자다. 우리에게 필요한 것은 화려하게 형용사로 늘어놓는 말(입술) 뿐인 신앙, 다양한 명사로 정의된 추상적인 개념의 신앙이 아닌 동사와 같은 실천의 신앙, 다소 거칠고 투박해도 삶으로 표현이 되는 역동적인 신앙이다. 이것이 살아 있는 신앙, 복이 따르는 신앙이다.

 

하나님은 본문에서 이렇게 전진하고 도전하는 역동적인 신앙, 동사형 신앙인들에게 다음 세 가지를 약속을 하고 있다. 첫째는 가나안 땅을 ‘주리라’(6)는 약속이다. 성경은 주시겠다는 말씀을 2천 번 이상 반복한다. 하나님은 우리에게 주시기를 기뻐하시는 분이란 뜻이다. 둘째는 ‘함께 하리라’(5)는 약속이다. 혼자 가도록, 혼자 하도록, 혼자 감당하도록 놓아두지 않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셋째는 ‘형통하리라’(7,8)는 약속이다. 형통이란 ‘성사시켜 준다.’는 뜻이다. make success이다. 반드시 성취하도록 하겠다는 것이다. 우리가 처한 상황이 어렵고 힘들수록 주님께서 성사시켜 주시는 형통의 은혜가 필요하다. 주님은 믿음으로 사는 사람을 위해 형통(성공)을 보장해주신다. ‘믿음으로 사는 사람에게 어렵지 않은 일도 없지만, 되지 않는 일도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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