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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덮어준 사람, “셈과 야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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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886회 작성일 12-12-23 13: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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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물을 덮어준 사람, “셈과 야벳”

창9:18~29

2012. 12/23. 08:00, 11:00

노아의 실수

 본문에 노아가 술에 취하여 실수한 장면이 나온다. 탈무드는 이 내용을 다음과 같이 설명하고 있다. 노아가 포도나무를 심고 있는데 사단이 찾아와서 무엇을 하느냐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나무를 심는다고 대꾸했고, 사단은 포도나무가 어떤 나무냐고 물었다. 노아는 ‘포도는 과일인데 달고 또 적당한 신맛을 가지고 있어 이것을 발효시키면 사람의 마음을 즐겁게 하는 술이 된다.’고 했다. 사람이 먹고 즐겁게 된다는 소리에 심술이 난 사단은 ‘재나 뿌려야겠다.’고 생각하여 양, 사자, 돼지, 원숭이를 죽여서 그 피를 포도밭에 뿌렸다. 아무 것도 모른 노아는 포도나무가 자라서 열매를 맺자 술을 만들어 마셨는데, 처음에는 양처럼 순하더니, 좀 더 마시자 사자처럼 강해지고, 좀 더 마시니 돼지처럼 더러워지고, 더 마시니 원숭이처럼 폴짝폴짝 뛰어 다니다가 숨이 차서 옷을 다 벗어버렸다. 그리고는 벗은 채로 골아 떨어졌다고 한다.

 

술이라고 하는 것이 얼마나 치명적인 것인가를 잘 보여준 이야기다. ‘의인이요, 당대에 완전한 자, 하나님과 동행한 사람’(창6:8)이었던 노아를 순식간에 무너지게 만든 것이 술이다. 더욱 놀라운 것은 성경이 이와 같은 노아의 치명적인 실수를 숨김없이 드러내고 있다는 점이다. 이는 노아가 홍수심판에서 구원을 받은 것이 전적으로 하나님의 은혜였다는 것, 사람은 누구나 실수할 수 있고, 넘어지기 쉬운 연약한 존재라는 것, 그러니 방심하지 말고 항상 깨어있어야 한다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선 줄로 생각하는 자는 넘어질까 조심하라.”(고전10:12)는 말씀을 새기며 겸손하게 자신을 살필 줄 알아야 한다.

 

실수에 대한 반응

그런데 본문의 강조점은 이와 같은 노아의 실수보다 그의 실수에 대한 아들들(셈, 함, 야벳)의 반응에 있다. 실수도 문제지만 다른 사람의 실수에 대한 반응이 더 중요한 문제라는 것이다. 바로 거기에 그 사람의 신앙과 인격이 그대로 드러나기 때문이다. 노아의 실수에 대한 아들들의 반응이 두 가지로 나타나고 있다. ‘들춰낸’ 것과 ‘덮어준’ 것이 그것이다.

 

들춰낸 사람, 함

본문은 노아의 모습을 “포도주를 마시고 취하여 그 장막 안에서 벌거벗은지라.”(21)고 기록하고 있다. 여기서 “벌거벗은”이란 말은 아주 완곡한 표현이고, 원래의 뜻은 ‘마땅히 감춰야할 부분이 노출되었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런 그의 모습을 둘째 아들 ‘함’(22)이 먼저 보고, 이 사실을 두 형제에게 알렸다. 술에서 깬 후 이 사실을 알게 된 노아는 함에게 저주를 퍼붓고(25), 셈과 야벳에게는 축복을 했다(26,27). 얼핏 보면 이런 노아의 태도가 이해할 수 없다. 하지만 ‘보다’는 말과 ‘알리다’는 말의 원어를 알면 그 이유를 알 수 있다. 여기서 ‘보다’는 말은 살짝 보고 고개를 돌린 것이 아니라 ‘(비웃고 멸시하는 눈으로)주의해서 보며 즐겼다’는 뜻이고, ‘알리다’는 말도 조용히 가서 살짝 말한 것이 아니라 ‘(기뻐하며 조롱하듯)웃고 떠들어댔다’는 뜻이다. 아버지의 실수를 보고 형제들에게 알린 것이 무슨 잘못이겠는가? 문제는 함이 아버지의 실수를 악의적으로 즐긴데 있고, 그것을 비웃고 조롱하고 떠들어댄데 있다. 이것은 부모에 대한 자식의 도리에서 있을 수 없는 일이다. 함은 실수를 빌미로 부모를 조롱의 대상으로 전락시킨 패륜을 저지른 것이고, 성경은 이와 같은 함의 죄를 지적하고 있는 것이다. 서로 잘 아는 만큼 그 허물을 들춰내면 상대에게 깊은 상처와 배신감을 준다. 결국 사랑의 관계는 깨어지고 만다. 그래서 아버지의 허물을 들춰낸 함은 아버지의 저주의 대상이 된 것이다.

 

가나안은 저주를 받아 그의 형제의 종들의 종이 되기를 원하노라.(25).

 

취모구자(吹毛求疵)라는 말이 있다. 입으로 털을 불어서 흠을 찾는다는 뜻으로, 일부러 다른 사람의 흠(약점이나 실수)을 찾아내려는 사람을 두고 하는 말이다. 참으로 무섭고 야박한 태도다. 그런데 이보다 더 한 것은 다른 사람의 실수를 ‘안타까워’(좋은 사람)하거나 ‘두려워’(경건한 사람)하기는커녕 ‘통쾌하게 여기며 즐기는’(야비하고 비뚤어진 사람) 사람이다. 이것이 함의 죄다. 그것도 다른 사람도 아닌 자기 아버지의 실수를 즐기고 떠들어댔다. 그렇다. 다른 사람의 실수나 허물을 통쾌하게 여기며 즐기고, 그것을 소문내고 돌아다니는 것은 정말 극복해야 할 악한 태도다.

 

덮어준 사람, 셈과 야벳

같은 부모의 자식이지만 이렇게 다를 수가 있구나 하는 생각을 하게 된다. 함으로부터 아버지의 이야기를 들은 셈과 야벳은 전혀 다른 반응을 보인다.

 

셈과 야벳이 옷을 가져다가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덮었으며 그들이 얼굴을 돌이키고 그들의 아버지의 하체를 보지 아니하였더라.(23).

 

이 모습이 마치 거룩한 예식을 거행하는 것 같지 않는가? 단순히 아버지의 실수를 덮어주는 차원을 넘어 경건한 예식을 거행하는 것과 같은 감동을 준다. 아버지가 무슨 대단한 일을 한 것도 아니고, 그저 술주정으로 쓰러져 있는데, 그것을 예를 갖춰서 덮어주고 있다. 함이 아버지의 실수로 인하여 자기 인격의 바닥과 아버지에 대한 무례를 보여주었다면 셈과 야벳은 인격의 성숙함과 아버지에 대한 존중을 보여주었다. 이처럼 덮어주는 것은 그 사람의 인격과 신앙의 성숙을 보여주는 창이다. 특히 셈과 야벳이 훌륭한 것은 아버지를 존중할 수 없는데도 존중하고, 사랑할 수 없는데도 사랑한 것이다. 덮어준다는 것이 바로 이와 같은 것이다. 그러므로 덮어준다는 것은 상대방을 지키고 보호하는 것이다. 셈과 야벳은 아버지를 덮어줌으로 아버지의 명예를 지켜주었다. 사랑하는 것이다. “허물을 덮어주는 자는 사랑을 구하는 자요, 그것을 거듭 말하는 자는 친한 벗을 이간하는 자니라.”(잠17:9)고 했다. 또한 포용하고 용납하는 것이고, 그리고 살리는 것이다. 겨울 장물들을 덮지 않고 그대로 두면 동장군에 의해 얼어 죽게 된다. 씨를 뿌려놓고 흙으로 잘 덮어주어야 씨앗이 잘 자라게 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서로 잘 덮어줌 속에서 건강하고 아름답게 성장하는 것이다. 그러니 들춰내는 것은 곧 죽이는 것이고, 덮어주는 것은 살리는 것이다. 지금까지 우리가 산 것도 주님의 덮어주신 은혜와 사랑 때문이다. 은혜로 덮어 불의한 우리를 의롭다하시고, 진노의 자식인 우리를 하나님의 자녀라 하시고, 사랑으로 덮어 악한 자가 우리를 넘보지 못하도록 지키고 보호하신 것이다.

 

그런데 셈과 야벳의 행동에서 더욱 유의해야 할 것이 있다. 그것은 덮어주는 ‘모습’이다. 그들은 단순히 덮어주기만 한 것이 아니라 보지 않기 위해서 옷을 자기들의 어깨에 메고 뒷걸음쳐 들어가서 덮어주고 나왔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란 말이 있듯 아버지의 좋지 않는 모습, 아름답지 못한 행동을 보면 아버지에 대한 좋지 않은 부정적인 생각이 들까봐, 아버지에 대한 존경과 사랑하는 마음에 상처를 받을까봐 보지 않은 것이다. 함은 주의해서 보고 즐겼는데, 셈과 야벳은 일부러 보지 않은 것이다. 참으로 배려가 깊은 아름다운 행동이 아닐 수 없다(故 함석헌 선생의 일화). 여기서 ‘보지 않는 것’ 또한 덮어주는 행위다. 즉 보지 않는 것은 마음으로 그 실수와 허물을 덮어버리는 것이다. 그러므로 셈과 야벳은 아버지의 실수를 이중(二重)으로 덮어준 샘이다. 첫 번째는 ‘옷’으로 덮어주고, 그 다음은 ‘마음’으로 덮어준 것이다. 살맛나는 아름다운 세상은 구호만으로 되지 않는다. 건강하고 행복한 교회도 마찬가지다. 서로 덮어주는 배려가 깊은 아름다운 행동이 있어야 가능하다. 그러므로 교회와 신자는 암탉이 날개로 그 새끼를 감싸듯이 생명‘싸개’ 혹은 ‘덮개’가 되어야 한다. 이것이 교회와 신자의 사역이다.

 

덮어주는 아름다운 삶

세상에서 제일 아름다운 마음은 남의 실수를 덮어주고 넉넉하게 받아주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즐기고 오래 기억하고 들춰내려는 것은 불행한 마음이고, 남의 허물을 안 보려고 하고 금방 잊어버리고 덮어주려는 것은 행복한 마음이다. 허물을 보는 눈이 커지면 사물을 보는 눈이 작아진다. 사실 남의 허물을 찾으려는 것은 나의 허물을 감추려는 꼼수다. 남의 허물을 잡았다고 해서 그가 패배하는 것이 아니다. 오히려 그 허물을 잡는 과정에서 나의 삶이 무너지게 된다. 반면에 남의 허물을 덮어준다고 해서 내가 손해 보는 것도 아니다. 남의 허물을 덮어주면 그의 승리를 보면서 내가 승리하게 되는 것이다. 남의 허물을 보려고 현미경을 들이대고 확대할수록 그것은 지금 내가 패배자의 악몽에 시달리고 있다는 뜻이다.

 

허물이 없는 사람은 어디에도 없다. 이해 안 되는 일에도 항상 이해할만한 구석이 있는 법이다. 다른 사람의 입장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가 된다. 이것이 역지사지(易地思之)의 정신이다. ‘들춰내기’는 사람됨을 잃어버리는 길이고, ‘덮어주기’는 사람됨을 되찾는 길이다. 행복은 누가 미리 만들어놓은 기성품이 아니다. 행복은 요술이나 마술이 아니라 예술이다. 예술가가 각고의 노력으로 작품을 만들듯이 행복은 서로 함께 눈물과 피와 땀을 흘리며 만들어가는 것이다. 우리는 완벽한 ‘천사’와 사는 것이 아니고, 부족한 ‘사람’과 사는 것이다. 서로 부족하고 모자란 사람들이 사랑의 보자기로 덮어가며 사는 것이 인생이다. 여기에 주님의 은혜가 임하고, 주님의 복이 보장되는 것이다. 본문 26절과 27절을 다같이 읽겠다.

 

셈의 하나님 여호와를 찬송하리로다. 가나안은 셈의 종이 되고, 하나님이 야벳을 창대하게 하사 셈의 장막에 거하게 하시고 가나안은 그의 종이 되게 하시기를 원하노라.(26,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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