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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된 선택, ‘아브라함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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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0,086회 작성일 13-01-20 14: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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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이 된 선택, ‘아브라함Ⅱ’

창13:1~13

2013. 1/20. 08:00, 11:00

삶은 선택의 연속이고 선택은 기회로 이어진다.

어느 날 한 남자가 건축가를 찾아왔다. 자신의 집을 짓고 싶어 하는 그 사람은 건축가에게 자신이 스케치한 몇 장의 그림을 보여줬다. 건축가는 방문객에게 쾌히 집을 지어주기로 했다. 그런데 돈은 한 푼도 받지 않기로 했다. 신기한 것은 공짜로 집을 지어준 건축가는 나중에는 큰돈을 벌었다. 어찌된 것일까? 건축가를 찾아온 사람은 다름 아닌 파블로 피카소였다. 피카소는 자신이 원하는 집의 구조와 전체적인 모습을 스케치하였다. 그리고는 자신이 그린대로 집을 지어줄 사람을 찾았던 것이다. 건축가는 피카소의 그림이 공사비보다 훨씬 높은 가치가 있는 것을 알았고 집을 공짜로 지어준 후에 그림을 팔아서 수십 배의 이익을 챙겼다. 결국 피카소는 창의적인 아이디어로 집을 한 채 얻었고, 건축가는 창의적인 거래를 선택해서 수십 배의 이익을 챙긴 것이다.

 

삶은 ‘B와 D사이의 C’(Life is choice between birth and death)라고 한다. 태어나서(Birth) 죽음(Death)으로 가는 여정인데, 그 사이에 선택이라는 ‘C’(Choice)가 있고, 그 선택이 중요하다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태어나서 누구나 죽음을 맞이하지만 그 사이에 놓인 숱한 선택의 결과에 따라 어떤 사람은 성공하여 즐거워하고, 어떤 사람은 실패하여 후회 속에 살게 된다. 즉 어떤 인생을 사느냐는 어떤 선택을 하느냐에 달려 있다. 인생은 선택의 연속이자 선택의 결과이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아름다운 선택은 아름다운 인생, 올바른 선택은 올바른 인생, 경건한 선택은 경건한 인생을 살게 한다. 그리고 선택의 주체는 그 누구도 아닌 바로 ‘자신’이다. 오늘의 나는 어제 나의 선택의 결과이고, 내일의 나 역시 오늘 나의 선택의 결과이다. 아무튼 선택이 기회(chance)를 가져오고, 기회가 변화(change)를 일으킨다. 그래서 그것이 그 사람의 인생이 되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은 좋은 기회를 가져오고, 좋은 기회는 긍정적인 변화를 일으켜서 복된 인생이 되게 한다. 그 반대도 마찬가지다. 오늘 본문에 나온 아브라함과 그의 조카 롯의 일화를 통해 이를 확인할 수 있다.

 

선택의 기로에서

 지금 아브라함은 중요한 선택의 기로에 있다. 이 가나안 땅에서 유일한 혈육인 롯과의 관계 때문이다. 아브라함은 흉년으로 이집트에 내려갔다(12:10~20)가 많은 부를 얻어 벧엘로 돌아왔다(1,2). 그런데 그 땅이 비좁아서 두 사람을 감당할 수가 없었다. 그러다보니 아브라함의 목자와 롯의 목자 사이에 갈등이 발생했다(6,7). 이 사건을 통해 아브라함은 롯과의 결별을 제안한다. 사실 이것은 아브라함에게서 롯을 떠나게 하시는 하나님의 섭리였던 것이다. 아무튼 아브라함의 이 선택 사건은 우리에게 선택의 중요성과 함께 올바른 선택을 위한 소중한 지침이 되는 내용이다.

 

올바른 선택은 ‘화목한 관계’에 초점을 둔다.

아브라함에게 롯은 고향 갈대아 우르를 떠난 이후 지금까지 고락(苦樂)을 함께 했던 유일한 혈육이다. 그런데 그 소중한 관계가 깨질 위험에 처하게 되었다. 물론 그것은 아브라함과 롯의 사이가 불편했기 때문이 아니다. 둘 사이는 여전했지만 그들이 처한 환경이 문제였다. 협소한 초지(草地) 때문에 아브라함의 가축의 목자와 롯의 가축의 목자 사이에 다툼이 일어났다(7). 이와 같은 갈등상황을 해결하기 위한 방안을 아브라함이 롯에게 다음과 같이 제안했다.

 

아브람이 롯에게 이르되 우리는 한 친족이라. 나나 너나 내 목자나 네 목자나 서로 다투게 하지 말자.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8,9).

 

여기서 아브라함이 강조한 것은 ‘화목’이다. 그 이유는 “한 친족”이기 때문이다. 이것은 우리 또한 더불어 화목해야 할 이유다. 요지는 비좁은 곳에 함께 살면서 서로 다투기보다 ‘헤어져서’라도 화목하게 살자는 것이다. 갈등이 모두에게 도움이 되지 않음을 직시하고 갈등해소를 위해 헤어짐을 제안한 것이다. 물론 헤어지자는 아브라함의 제안은 최선은 아니다. ‘형제가 함께 모여 사는 것이 얼마나 행복한가?’(시133:1)라는 말씀처럼 비좁지만 서로 다투지 않고 화목하게 함께 사는 것이 최선이다. 그런데 그 땅이 그들의 동거를 용납하지 못하여 현실적으로 불가능하니까 함께 있으면서 삼촌과 조카 사이에 피가 터지도록 싸운 것보다 헤어져 화목하게 사는 차선의 길을 제시한 것이다. 이는 갈등을 줄이고 생산적인 관계를 회복하기 위한 현실적인 방안이다(이것이 R. 니버가 주장한 기독교 현실주의이다). 더욱 중요한 것은 ‘화목’이 하나님의 뜻이다(롬12:18). 하나님은 모두 함께 사는 것보다 화목하게 사는 것을 더 원하신다(). 화목이 하나님의 자녀됨의 표시이기 때문이다(마5:9).

 

땅으로 말미암은 갈등상황에서 아브라함이 보여준 롯(이웃)과의 ‘화목한 관계’를 위한 선택은 오늘날 우리에게 교훈하는 바가 크다. 우리 역시 갈등 많은 인생의 현장을 살고 있다. 그리고 끊임없이 선택을 요구받고 있다. 그러니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 아브라함처럼 현실적인 대안을 찾을 줄 아는 지혜가 요구된다. 그것은 선택할 때, 하나님의 뜻에 초점을 두는 것이다. 즉 무엇보다 ‘다른 사람과의 화목한 관계’에 초점을 둔 선택을 하는 것이다.

 

올바른 선택에는 ‘양보’와 ‘희생’이 따른다.

화목한 관계를 위해 아브라함이 보여준 중요한 태도가 있다. 그것은 기득권(우선권) 포기라는 ‘양보와 희생’이다.

 

네 앞에 온 땅이 있지 아니하냐. 나를 떠나가라.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9).

 

이것은 아브라함의 성숙한 신앙과 높은 인격을 반영하는 사건이다. 선택에 있어서 기득권(우선권)은 아브라함에게 있었다. 아브라함이 연장자이고, 그들을 이끄는 지도자였기 때문이다. 하지만 아브라함은 그런 기득권을 모두 내려놓고 롯에게 먼저 선택할 수 있는 권한을 양보했다. “.......네가 좌하면 나는 우하고 네가 우하면 나는 좌하리라.” 이는 모든 결정권을 롯에게 위임하겠다는 뜻이다. 그리고 여기에는 자신의 모든 것을 하나님께 맡기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즉 어디로 가든, 어디에 있든 하나님이 함께 하셔서 잘 될 것이라는 믿음, 설령 그렇게 되지 않더라도 좋다는 믿음이 전제되어 있다. 때문에 이런 양보와 희생이 가능한 것이다. 삼촌 아브라함의 이러한 기득권 양보에 대하여 ‘롯’은 흡족해하며 좋은 땅을 선택한 후, 그곳으로 떠났다. 그곳은 목축을 하는 사람에게 가장 소중한 물이 ‘넉넉한’ 지역이었다. 이렇게 두 사람은 서로 헤어져 아브라함은 산악지대, 황량하고 물이 부족한 땅에 살았고, 롯은 평지에 물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동산 같고 이집트 땅과 같은 곳에서 살았다. 그러다가 소돔 가까이에 이르러서는 그곳에 자리를 잡았다.

 

여기서 보여준 아브라함의 태도는 12장과는 전혀 다른 모습이다. 사실 12장에서의 아브라함은 찌질한 남자, 찌질한 남편의 대명사였다. 그는 기근 때문에 약속의 땅 가나안을 떠나 풍요의 땅 이집트로 내려갔다가 그곳에서 인간으로서는 차마 해서는 안될 일을 하게 된다. 자기 아내를 팔아 목숨을 건지고, 또 많은 재물을 얻는다. 그래서 그 재물을 가지고 비겁한 모습으로 가나안 땅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본문에서는 이러한 아브라함의 모습은 찾아볼 수가 없다. 여기에는 기꺼이 자신의 기득권을 포기하여 조카를 위해 양보하고 희생하는 멋진 삼촌, 그리고 모든 것을 하나님의 처분에 맡기는 믿음의 사람만 있다. 아무튼 아브라함은 이러한 기득권 포기라는 양보와 희생을 통해 친족 간에 화목을 선택하였다. 그러므로 올바른 선택을 위해 꼭 필요한 것이 ‘양보와 희생’이다. 이 양보와 희생은 선택에서 뿐만 아니라 모든 올바르고 값진, 의미있는 일에 반드시 요구되는 덕목이다. 또한 이 양보와 희생은 올바른 선택을 위한 조건이면서 선택 자체이기도하다.

 

올바른 선택의 결과

그런데 창세기 14장, 18장, 19장, 그리고 이어지는 그 후 장을 보면, 아브라함과 롯의 선택에 대한 상반된 결과가 이어진다. 롯이 선택한 물이 넉넉하여 하나님의 동산과 같고 이집트의 땅과 같은 풍요로운 지역은 하나님의 심판으로 불구덩이 되었고, 롯은 주변 사람들에게 인정을 받지 못했을 뿐만 아니라(19:9) 사위들에게까지 웃음거리가 되었고(19:14), 소돔과 고모라가 불탈 때에 그의 소유도 모두 불에 타게 되어 빈털터리가 되었고, 암몬과 모압이라는 부끄러운 족속의 조상이 되었다(19:37). 롯은 잘못된 선택, 화가 된 선택의 모범이다. 반면에 아브라함은 올바른 산택, 복이 된 선택의 모범이다. 아브라함이 선택한 산악지대이고 황량하며, 물이 풍족하지 않았던 땅이 풍요로운 땅이 되었고, 그 땅 헤브론은 장차 복된 성지가 되었다. 아브라함은 하나님의 은혜와 복을 받아서 주변 사람들에게 존경을 받는 영향력 있는 사람이 되고, 만인이 우러러보는 믿음의 조상, 복의 통로, 복의 원천이 되었다.

 

흔히 사람들은 결혼을 두고 ‘순간의 선택이 평생을 좌우한다.’고 말한다. 선택의 결과가 그만큼 중요하다는 것이고, 그러니 올바른 선택을 해야 한다는 뜻이다. 올바른 선택을 위해서는 아브라함과 같은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 롯처럼 내가 스스로 본 것에 따라 선택하는 것(10)이 아니라, 아브라함처럼 하나님께서 보여주신 것만 바라보고(14), 그것을 선택할 수 있는 믿음의 사람이 되어야 한다(18). 이것이 바로 복이 된 선택이다. 그러면 우리 역시 우리가 선택한 곳은 복지(福地)가 되고, 우리의 삶은 복된 삶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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