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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준 사람, ‘이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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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639회 작성일 13-02-10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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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준 사람, ‘이삭’

창26:26~33

2013. 2/10. 11:00

아버지를 보여주소서!

인간의 끝없는 욕구 중에 하나는 자기 확신에 대한 욕구이다. 나는 누구인가? 나는 존재하는가? 존재란 무엇인가? 내가 보고 듣고 알고 있는 것이 과연 옳은 것일까? 이런 물음에 대한 분명한 확신을 갖고 싶어 한다. 연인 간에도 자주 사랑을 확인하고, 사랑한다면 그 증표를 보여 달라고 요구한다. 이것은 결국 너를 못 믿겠으니 뭔가 믿을 수 있는 확실한 증거를 보여 달라는 외침이다. 이런 고민 끝에 나온 말이 바로 ‘나는 생각한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다. 이는 자기 확신에 목마른 현대인의 사고방식을 가장 잘 표현한 말이다. 물론 무엇이든 당연한 것으로 받아들이지 않는 이런 태도가 학문의 발전, 기술의 진보를 가져온 것도 사실이다. 특히 근대이후 과학이 비약적으로 발전한 것은 이런 사고 때문이다.

 

예수님의 제자 중에도 이런 사고방식을 가진 사람이 있다. 빌립이라는 사람이다. 그는 소위 실증주의자로 실물에 밝은 사람이다. 주님께서 5천 군중에게 먹을 것을 주라고 하셨을 때, 단번에 음식 값을 계산해냈다. 나다나엘에게 전도할 때도 “와서 보라!”는 말로 대신했다. 그는 매사를 손으로 만지고, 눈으로 보고, 직접 체험하여 확인해야만 직성이 풀리는 사람이었다. 그의 이런 태도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마찬가지였다. 요한복음을 보면 주님께서 예루살렘 어느 다락방에서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마치시고, 마지막 교훈의 말씀(요14:~17: 다락방 강화)을 주셨다. 바로 그 자리에서 그는 주님께 하나님을 보여 달라고 요청했다. “빌립이 이르되 주여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옵소서. 그리하면 족하겠나이다.”(요14:8). 사실 신앙은 인간에게 가장 확신에 목마른 영역이다. 사람들 눈에 가장 불확실하고, 증거가 불충분한 영역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사람들은 빌립처럼 신앙에 대한 확신을 요구하는 것이다. 그렇지만 신앙의 확신이 없는 근본 이유는 대상에 있지 않고, 인간 자신의 결함에 있다. 대상이 아무리 확실해도 믿지 못하는 한 증거는 아무 소용이 없다. 의처증을 가진 남편은 아내가 아무리 순결해도 믿지 않는다. 사상에 찌든 사람은 아무리 합리적인 생각을 얘기해도 듣지 않는다. 오히려 의혹만 더욱 증폭이 된다. 그래서 중요한 것이 ‘믿음’이다.

 

아버지를 보여주는 삶

 아무튼 ‘아버지를 보여 달라.’는 빌립의 요구는 3년 동안 주님을 따랐던 제자로서 매우 유감스러운 요구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빌립을 ‘아직 믿음을 갖지 못하고 있는 사람’으로 생각하면 그 의미는 크게 달라진다. 이것은 교회와 신자를 향한 엄청난 도전된다. 실제로 오늘날 신자와 교회에 대한 비판의 소리 이면에는 ‘하나님을 우리에게 보여 달라’는 간절한 열망이 감춰져 있다. 교회와 신자는 이 소리를 들을 수 있어야 하고, 나아가서 그들에게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줄 수’가 있어야 한다. 그러면 본문의 이삭처럼 우리 역시 ‘여호와께서 너와 함께 계심을 우리가 분명히 보았다’(28)고 하는 고백을 들을 수 있을 것이다. 주변 사람들에게 이런 고백을 듣는 신자, 교회라야 올바른 신자이고 교회인 것이다. 그렇다면 이삭은 어떻게 이방인의 왕에게 이런 고백을 들을 수가 있었을까?

 

1. 말씀에 대한 순종(2)

아버지 아브라함 때와 마찬가지로 이삭이 거하고 있는 땅에 큰 흉년이 들었다(1). 그래서 이삭은 그랄 지방을 거쳐 이집트로 가려고 했는데 하나님께서 막으셨다. “애굽으로 내려가지 말고 내가 네게 지시하는 땅에 거주하라.”(2). 이삭은 이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그랄 지방에 머물게 되었다. 순종의 결과는 엄청난 복으로 돌아왔다. 그 해에 농사를 지었는데, 백 배나 수확했고(12), 그 지역 사람들이 시기할 만큼 거부(巨富)가 되었다(13,14). 신자는 시기를 받을지언정 시기해서는 안된다. 시기하며 사는 것은 신자의 수치다. 신자는 시기를 받을 만큼 탁월하게 살아야 한다. 그 비결이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순종이다. 이것을 통하여 하나님의 살아계심과 살아계신 그 하나님이 이삭과 함께하신 것을 주변 사람들에게 보여주는 기회가 되었다. 그렇다.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할 때 하나님의 능력과 역사가 나타나게 되고, 이를 통해 하나님이 함께하신 것이 드러나게 된다.

 

신자는 세상이 주는 정보로 사는 인생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붙들고 순종하며 사는 인생이다. 우리는 보고 가는 사람이 아니라 믿고 가는 사람이다. 믿음으로 살아야한다. 그러기 위해선 극대화된 순종의 삶이 필요하다. 극대화된 순종은 세상의 판단이 아니라 하나님 말씀을 붙잡고 도전하는 것이다. 말씀을 붙들고 담대하게 나가는 것, 말씀과 내 인생을 함께 묶어서 말씀이 가라는 곳으로 가고, 말씀이 서라는 곳에 서는 것이다. 이런 순종의 사람에게 하나님의 함께하심이 드러나게 된다.

 

2. 양보하는 생활(16~22)

일상을 경건하게 사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수험자의 자세’로 사는 것이다. 누군가에 의해 내 삶이 평가를 받고 있다는 생각을 갖고 살면 일상을 경건하게 살 수가 있다. 그리고 이것이 사실이기도 하다. 우리는 계속 누군가에 의해서 평가를 받고 있는 것이다. 본문 앞부분을 보면 이삭은 그랄 지역 사람들에게 참으로 억울한 대접을 받았다. 잘된다는 이유로 시기를 받아 그 지역에서 쫓겨나다시피 했다(16). 이것이 안되는 사람의 특징이다. 잘되는 사람을 쫓아다니면서라도 배워야하는 판국에 시기하여 쫓아내고, 그것도 모자라서 따라다니며 행패를 부렸다(15,18,20). 그런데 이삭은 저들의 이런 태도에 참고 또 참으면서 양보를 거듭했다. 물론 자기 것을 지키기 위해 맞서 싸울 수도 있었다. 하지만 싸움보다는 손해를 보더라도 양보해서 평화를 선택했고, 그것도 한 두 번이 아니라 끝까지 그렇게 했다. 이러한 이삭의 인생은 부당한 인생의 고난을 받아들이는 좋은 본보기로 애매하게 고난을 당하신 우리 주님의 그림자가 되었다.

 

그런데 참으로 놀랍고 중요한 것은 이삭의 이런 태도를 그랄 왕 아비멜렉이 끝까지 지켜보고 있었다는 점이다(28, “보았으므로”). 그리고 이와 같은 이삭의 양보하는 모습에서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본 것이다. 개들이 작은 뼈다귀 하나를 놓고 으르렁대는 것처럼 세상의 갈등도 작은 이익 때문에 일어나고 있다. 그것을 서로 가지겠다고, 혹은 더 많이 가지겠다고 말이다. 이것이 아비멜렉 자신을 비롯한 대부분 사람들의 삶의 방식이다. 하지만 이삭은 달랐다. 자신의 이익을 기꺼이 포기하며 양보했다. 그래서 갈등을 평화로 바꿨다. 욕심은 갈등을 부르고 양보는 평화를 부른다! ‘화평하게 하는 자는 하나님의 아들이라 일컬음을 받는다.’(마5:9)는 말씀처럼 양보와 희생을 통해 평화를 만드는 것이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주는 최선의 길이다. 하나님은 이런 사람과 함께하시기 때문이다(24, 13:14참조).

 

3. 하나님 중심의 생활(25)

하나님 중심의 생활은 앞의 두 가지, 말씀에 대한 순종과 양보하는 생활을 좌우한다. 하나님 중심의 생활을 살 때 말씀에 순종하고, 양보하는 생활을 살 수 있기 때문이다. 여기서 하나님 중심의 생활이란 곧 ‘예배중심’의 생활을 뜻한다. 이것은 특히 족장들(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의 삶에서 일관되게 나타나는 특징이다. 25절에서, 이삭은 브엘세바에 이르러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예배), 다음으로 ‘장막’을 치고(가정), ‘우물’을 팠다(생업). 가장 먼저 제단을 쌓고 하나님의 이름을 불렀다는 것은 가정보다, 생업보다 예배를 가장 소중하게 여겼다는 뜻이다. 이는 또한 삶의 1번이 하나님이라는 뜻이다. 하나님 중심, 하나님이 1번이 아니고는 예배가 우선이 될 수가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예배가 중요한 것이다.

 

칼 바르트(K. Barth)는 예배에 대하여 세 가지로 말했다. 예배는 가장 중요한 일, 가장 긴급한 일, 그리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라고 했다. 그렇다. 예배는 신자의 삶에 있어서 가장 중요하고, 가장 긴급하고, 가장 영광스러운 일이다. 주님은 “두 세 사람이 내 이름으로 모인 곳에는 나도 그들 중에 있느니라.”(마18:20)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내 이름으로 모인 곳”은 예배의 자리를 의미한다. 수와 상관없이 주님의 이름을 부르며 예배하는 곳이면 주님이 함께하신다는 말씀이다. 우린 이 말씀을 통하여 예배가 얼마나 중요하고, 긴급하고, 영광스러운 일인지 확인할 수 있다. 그것은 주님을 만날 수 있는 일이기 때문이다. 주님은 더 적극적으로 예배에 대하여 말씀하셨다. “......아버지께서 자기에게 이렇게(영과 진리) 예배하는 자를 찾으시느니라.”(요4:23下). 하나님은 지금도 사람을 찾고 계신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돈 많은 부자도, 탁월한 지도자도, 충성스러운 일꾼도, 훌륭하고 고상한 인격의 성인군자도 아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오직 신실한 예배자이다. 그러니 예배하는 그곳에 하나님이 함께하심은 당연한 일이다. 하나님은 예배를 통해서 우리를 만나시고 용서해 주시고 은혜를 주시며 복을 주신다. 신자는 예배자이고, 교회는 예배하는 집이다. 예배공동체다. 예배부흥이 교회부흥이고, 예배성공이 인생성공이다. 이삭은 이 예배중심의 생활을 통해 형통한 삶을 살았다. 하나님이 함께하심을 보여주었다.

 

형통한 사람, 이삭

이삭은 소극적(부정적)으로 보면 네 명의 족장(아브라함, 이삭, 야곱, 요셉)들 중에서 가장 특징이 없는 사람이다. 성경에서 그에 대한 기록도 26장을 제외하고는 그의 아버지 아브라함과 그의 아들 야곱의 이야기에 포함되어 삽화처럼 기록되고 있다. 그렇지만 적극적(긍정적)으로 보면 굴곡이 없는 가장 평탄한 삶을 살았던 사람이다. 라헬을 얻기 위해 14년을 머슴살이했던 야곱에 비하면 아내 리브가 만나는 장면은 너무 순탄했다. 웃음이라는 뜻을 가진 그의 이름처럼 평탄한 삶을 살았다. 그는 다른 사람이 가지고 싶어했던 조건들을 모두 갖춘 사람이었다. 예를 들면 장자의 권한(cf. 야곱), 독자로서의 사랑 독차지(cf. 요셉), 아버지로부터 물려받은 많은 재산, 헌신적이고 예쁜 아내 등. 그는 사는데 있어서 필요한 조건 이상의 것들을 가진 사람이었다. 거기다가 그는 탁월한 믿음의 사람이었다. 그래서 이삭을 생각하면 가장 먼저 떠오르는 단어가 있다. 그것은 바로 ‘형통’이다. 사실 오늘 설교내용이 곧 이삭의 삶을 형통하게 만든 것들이다. 말씀에 순종, 이웃과의 화(목)평(화)을 위해 양보하는 생활, 하나님 중심 예배중심의 생활이 그것이다. 하나님이 함께하시면 형통하게 된다. 그리고 그것은 주변 사람들에게 반드시 드러나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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