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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자 명분을 가볍게 여긴 사람, ‘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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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8,647회 작성일 13-02-17 13:04

본문

장자 명분을 가볍게 여긴 사람, ‘에서’

창25:27~34

 

2013. 2/17. 08:00, 11:00

악취 나는 물웅덩이

어떤 농부가 자신의 농장 가운데 있는 물웅덩이를 보고 늘 투덜거렸다. 아무짝에도 쓸모도 없이 고약한 냄새만 풍기면서 농장을 망치고 있었기 때문이다. 결국 농부는 그 웅덩이가 딸린 농장을 사정하다시피 하여 헐값에 팔아버렸다. ‘웅덩이와의 결별’이 있던 날, 농부는 파티를 열어 기뻐했다. 그러나 그 결정은 농부에게 일생 최대의 실수가 되었다. 고약한 냄새만 풍기는 그 쓸모없는 물웅덩이는 다름 아닌 기름 웅덩이였다. 그곳에서 거대한 유전이 발견된 것이다. 노다지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무가치한 골칫덩어리에 불과한 것이다.

 

성서사본 역사에서도 이런 사례가 있다. 성서사본 중에 시내산 사본이라는 것이 있다(발견 장소에 따라 붙여진 이름). 이 사본은 콘스탄틴 티셴도르프(C. Tischendorf)에 의하여 시내산 중턱에 있는 캐서린 수도원에서 발견되었다. 그는 1844년 129장의 고대성서사본이 수도원 도서관의 쓰레기통에 버려져 있는 것을 발견했다. 그 가치를 모른 한 수도사가 불쏘시개로 쓰기 위하여 쓰레기통에 넣어놓은 것이다. 일부는 이미 불태워진 상태였다. 무지한 사람에 의해 그 소중한 성서의 보물이 한줌의 재로 변할 아찔한 순간이었다. 사람이든 사물이든 그것의 가치를 아는 것이 중요하다. 가치를 모르면 보물도 땔감으로 보이는 법이다. 아무리 소중한 것도 그 가치를 모르는 사람에겐 무용지물이다. 가치를 모르니 그 소중한 문화유산을 불을 지피는 불쏘시개로 여기고, 노다지를 골칫덩어리로 여기게 된 것이다. 그래서 주님은 “거룩한 것을 개에게 주지 말고 진주를 돼지 앞에 던지지 말라.”(마7:6)고 하신 것이다. 그리고 사람이든 사물이든 자신의 가치를 알아주는 사람을 만나는 것이 복이다. 그래야 가치와 역량을 발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오늘의 주인공 ‘에서’(Esau) 또한 소중한 것의 가치를 모르는 사람이다.

 

장자 명분의 중요성

 에서는 이삭의 장자로 야곱의 쌍둥이 형이다. 에서는 털이 많고 사냥을 잘하는 들사람으로 활동적인 인물이었다. 아버지 이삭은 ‘그가 사냥한 고기를 좋아하여’(원문/ ‘그 사냥한 고기가 자기 입에 있기 때문’) 사내답고 야성적인 그를 사랑했다(28). 반면에 그는 배고픔 때문에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한 끼 식사에 지나지 않는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리는 충동적이고 경솔한 사람이었다. 본문은 바로 이 점을 중요하게 생각하며 에서와 야곱을 비교하고 있다. 에서는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겼고, 야곱은 형의 약점을 이용해서라도 가지고 싶어 할 만큼 그것을 소중히 여겼다는 것이다. 사실 고대족장시대에는 자식이라고 다 같은 자식이 아니었다. 장자에게는 다른 자식들과 다른 특권이 주어졌다. 이것을 ‘장자의 명분’(특권)이라고 한다. 장자는 가정을 통솔할 수 있는 아버지의 권위를 공적으로 계승하고, 부모 재산을 물려받을 때 다른 형제의 두 몫을 물려받고(신21:15~17), 가정의 제사장 직분을 수행하는 영적 특권이 주어졌다. 장자는 단순히 가정을 대표하는 사람이 아니라 하나님의 택함을 받은 가정의 영적 수장(首長)이었다. 하나님이 주신 소중한 선물이다.

 

본문에서 장자의 명분을 갖고자 취한 야곱의 방법이나 행동은 동의할 수 없고, 또한 비난받아 마땅한 일이다. 하지만 그것을 갖고 싶어 하는 태도(마음과 열정)는 높이 사야 한다. 이는 그가 장자 명분의 가치를 알고, 그것을 사모했다는 뜻이다. 얼마나 간절했으면 비열한 방법으로 형을 속이면서까지 그것을 가지려고 했을까! 물론 소중한 것을 얻기 위해선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말라는 뜻은 아니다. 본문이 야곱의 태도에 대해선 침묵하고 에서의 태도에 대해서만 말하고 있다고 하여 야곱을 옹호한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라는 것을 그 뒤에 펼쳐진 야곱의 험난한 생애를 통해서 보여주고 있다. 아무튼 가지고 있다고 해서 다 지킬 수 있는 것이 아니다. 또한 지키고 있다고 하여 다 주인이 아니다. 그것의 가치를 알아야 한다. 그래야 지킬 수 있다. 간절히 사모해야 한다. 그래야 그것의 진정한 주인이 될 수가 있다. 이것이 소중한 것을 지키고, 또한 주인이 되는 비결이다. 장자의 명분에 대한 야곱의 태도는 우리에게 이와 같은 소중한 교훈을 준다.

 

한 그릇 식물 때문에 뒤바뀐 인생

그런데 안타까운 것은 에서는 하나님께서 선물로 주신 이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소중하게 여기지 않았다. 물론 긍정적으로 생각하면 이것이 가진 사람의 여유라고도 할 수 있을 것이다. 하지만 에서의 경우는 단순히 가진 사람으로서 여유가 아니다. 애초부터 장자의 명분에 대한 그의 자세가 문제였다.

 

야곱이 떡과 팥죽을 에서에게 주매 에서가 먹으며 마시고 일어나 갔으니 에서가 장자의 명분을 가볍게 여김이었더라.”(34).

 

야곱이 그토록 소중하게 여기며 갈망했던 장자의 명분을 에서는 가볍게 여겼다는 것이다. 이것이 장자의 명분에 대한 에서의 태도다. 여기서 ‘가볍게 여겼다.’는 말은 매우 부드러운 표현이다. 이 단어는 ‘업신여기다.’ ‘멸시하다.’ ‘경멸하다.’가 본래의 뜻이다. 이는 “에서가 이르되 내가 죽게 되었으니 이 장자의 명분이 내게 무엇이 유익하리요.”(32)라고 하는 그의 말에서 엿볼 수가 있다. 시쳇말로 ‘여기서 죽이 나와 밥이 나와, 이까짓 것이 무슨 소용이야!’와 같은 말이다. 이것은 에서가 어떤 사람인가를 잘 보여주고 있다. 말은 곧 그 사람을 나타내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이 떡으로만 사는 존재가 아니라고 하셨다(마4:4). 사람에게 물이 중요하고, 공기가 중요하다. 그렇지만 물과 공기를 위해 사는 사람은 없다. 떡도 마찬가지다. 그런데 에서는 떡에만 얽매인 사람이었다. 사람은 배가 고프다고 해서 당장에 죽지 않는다. 오히려 의로운 일, 뜻있는 일을 이루기 위해서 배고픔을 참고 견딘다. 배고픔을 참고 견디면서 그 일들을 추진한다. 이것이 먼저 성취를 남긴 사람들의 특징이다. 그런데 에서는 잠시 배고픈 것을 가지고 죽음을 운운하며 그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한 끼 식물과 바꾸고 말았다. 그에게 중요한 것은 장자의 명분이 아니라 실제적인 이익이었다. 당장 배고픔을 해결하는 것이 중요했다. 그래서 하나님의 선물인 장자의 명분을 눈앞에 놓인 한 그릇 팥죽보다 못하게 여긴 것이다.

 

이와 같은 에서의 사건을 염두에 두고 영어권에서는 ‘팥죽 한 그릇’(a mess of pottage)이 ‘값비싼 희생으로 얻은 사소한 물질적 이익이나 쾌락’을 뜻하는 관용어가 되었다. 이는 어리석은 판단, 어리석은 선택, 어리석은 행동을 뜻한 것이다. 본문에서 에서가 팥죽 한 그릇을 위해 장자의 명분을 포기한 것은 결코 단순한 문제가 아니다. 이것은 일시적인 것 때문에 영원한 것을 포기한 것, 긴급한 것 때문에게 중요한 것을 포기한 것, 세속적인 것 때문에 영적인 것을 포기한 것을 의미한다. 하나님이 주신 선물을 업신여기며 멸시하는 것이다. 영어권 사람들이 생각한 대로 사소한 이익이나 쾌락을 위해 값비싼 희생을 지불한 참으로 어리석은 태도이다. 히브리서 기자가 이러한 에서를 “망령된 자”(히12:18)라고 하며, 이런 사람은 ‘하나님의 은혜에 이르지 못한다.’(12:15)고 한 것은 참으로 적절한 표현이다. 아무튼 이 사건으로 에서와 야곱의 인생이 뒤바뀌게 된다. 그래서 에서는 하나님이 선택하신 이삭 가문의 장자로 태어났으나 그 소중한 장자의 명분을 지키지 못한 어리석고 명령된 자가 되고 말았다. 그의 불행은 이것으로 끝나지 않고,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과 그 백성 가운데서 쫓겨나게 되고 영원히 하나님과 원수가 되었다.

 

에서‘족’(族)

에서는 육체적인 욕구를 위해서 영적인 공급을 희생하고, 일시적인 쾌락을 위해 영원한 것들을 포기하고, 세속적이고 육체적인 만족을 위해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복을 잃어버린 사람의 상징이다. 주변에는 이와 같은 ‘에서’족(族)이 의외로 많다. 괴테의 「파우스트」에 나온 지식을 위해 악마와 거래한 파우스트나 사밋소의 「그림자를 판 사나이」에 나온 돈 때문에 악마에게 자신의 그림자를 판 피터와 같은 사람들이 여기에 속한다. 우리 안에도 이런 에서족이 여전히 내재해 있다. 재물 때문에, 명예 때문에, 육체적인 정욕과 쾌락 때문에, 세속적인 욕심 때문에, 자존심 때문에 영원한 생명을 가볍게 여기는 것이 그것이다. 신앙생활이란 이런 에서족과 결별하는 것이다. 사람은 자신이 좋아하는 것, 소중하게 여기는 것을 따르게 되고, 닮게 되고, 나아가서 그대로 된다. 그러므로 일시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것, 긴급한 것이 아니라 중요한 것, 세속적인 것이 아니라 영적인 것, 하나님이 주신 신령한 선물을 좋아하고 소중히 여기는 사람이 되자. “우리가 주목하는 것은 보이는 것이 아니요. 보이지 않는 것이니 보이는 것은 잠깐이요. 보이지 않는 것은 영원함이라.”(고후4:18).

 

영원한 것에

생각의 모든 눈길을 두고

영원한 것에

소망의 굵은 기둥을 세우며

영원한 것에

사모의 불 환히 밝혀놓고

영원한 것에

씨를 뿌리는 농부가 되며

영원한 것에

해바라기가 되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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