복에 목마른 사람, ‘야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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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636회 작성일 13-02-24 15:08본문
복에 목마른 사람, ‘야곱’
창32:24~32
2013. 2/24. 08:00, 11:00
Passion up
세상에서 가장 잘 팔리는 라면은 무엇일까? 그것은 ‘했더라면’이라고 한다. 많은 사람들이 이 말을 입에 달고 산다. 이는 최선을 다하지 못한 것을 스스로 인정하는 아쉬움과 후회의 표현이다. 물론 살면서 아쉬움이나 후회가 없는 삶을 산 사람이 몇이나 될까! 십자가 위에서 “다 이루었다.”는 말씀을 남기고 숨을 거두신 예수님을 제외하면 아마 아무도 없을 것이다. 그렇지만 모든 기회, 모든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열심히 한다면 비록 실패하더라도 적어도 ‘했더라면’이라는 말을 많이 줄일 수 있을 것이다.
아무튼 아쉬움도 많고 후회도 많은 것이 인생이다. 어떤 분이 자기 인생에서 아쉬움과 후회를 줄이고, 자신을 ‘가장 가치 있는 사람’(MVP=most valuable people)으로 만드는 비결을 소개했다. 그것은 ‘3up습관’을 기르는 것이라고 했다. ‘3up습관’이란 ①Mind up, ②Vision up, ③Passion up이다. 그는 이 ‘Passion up’을 위해 ‘365+24법칙’을 추천하였다. 쉽게 말하면 자기에게 주어진 삶에 최선을 다하며 날마다 열정적으로 살라는 뜻이다. 그렇다. 열정적인 사람에게 빛나는 인생, 가치 있는 인생이 선물처럼 주어진다. 열정은 꿈을 키우는 밭이다. 열정은 꿈을 꾸게 하고, 계획을 세우게 하고, 그것을 성취하게 한다. 열정은 창의력이 솟아나는 샘이고, 열정은 헌신을 끌어올리는 두레박이다. 삶의 역동성은 열정에서 온다. 늙는다는 것은 나이가 든다는 것이 아니다. 열정이 식는다는 것이다. 열정이 식은 것은 정신적으로 늙은 것이고, 열정을 잃은 것은 정신적으로 죽은 것이다. 사무엘 울만은 「청춘」이란 그의 시에서 이렇게 말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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때로는 20세 청년보다
60세 노인이 더 청춘일 수 있다.
나이를 더해 가는 것만으로 사람은 늙지 않는다.
이상을 버릴 때 비로소 늙는다.
세월은 피부에 주름살을 늘리지만
열정을 잃으면 영혼이 주름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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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정은 갈망에서 온다.
그런데 이 열정은 갈망에서 온다. 갈망은 열정에 선행하고, 열정은 다시 갈망을 뜨겁게 만든다. 그리고 이 열정이 입(말)으로 표현된 것이 기도이고, 찬양이고, 고백이다. 삶으로 표현된 것이 사랑이고, 섬김이고, 헌신이고, 예배이다. 갈망이 크고 깊을수록 열정이 더 강해지고, 기도도 찬양도 사랑도 헌신도 커지고 강해진다. 또한 열심히 기도하고 뜨겁게 찬양하고 부지런히 사랑하고 성실하게 섬기고 헌신할수록 갈망이 커지고 열정도 강해진다. 그래서 신앙생활은 이 갈망의 폭을 넓히고, 깊은 갈망을 품게 만드는 것이다. 거룩한 목마름을 갖게 하는 것이다. 성경에 나온 사람들을 보면 한결같이 ‘열정적인’ 사람들이다. 그 중에서도 대표적인 인물이 ‘야곱’이다. 그는 사랑도(29:20,30), 일도(31:36~42), 기도도(본문) 열정적이었다. 이 모두가 그의 깊은 ‘갈망’(목마름) 때문이다. 사실 무엇인가를 갈망하거나 사모하면 가만히 있을 수가 없다. 이것은 히브리어로 ‘사모하다’는 단어의 뜻을 보면 알 수 있다. 이는 ‘뛰어다니다.’ ‘탐식하다.’는 뜻이다. 주리고 목마른데 어떻게 가만히 있겠는가? 마실 것, 먹을 것을 찾아 이리저리 다닐 수밖에 없다. 어느 방송국 프로그램에서, 초식동물들이 건기에 먹이와 물을 찾아서 목숨을 건 대이동을 하는 장면을 보았다. 그 이동과정에 1/4이 죽는다고 한다. 그런데도 이동을 멈추지 않는 것이다. 이 엄숙한 생명의 행렬을 보면서 목마름, 갈망, 사모함이 얼마나 중요한 것인지를 다시 한 번 생각하게 되었다. 결국 우리의 삶, 특히 영적인 생활에 열정이 부족한 것은 갈망, 사모함, 목마름이 없기 때문이다.
갈망의 사람, 야곱
모든 일은 간절한 만큼 이루어진다고 했다. 이 평범한 진리를 삶으로 잘 실천한 사람이 야곱이다. 야곱은 갈망이 깊은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그는 하나님의 ‘복’에 대한 커다란 목마름을 가지고 있었다. 그가 장자명분을 가지기 위하여 형(에서)의 약점을 이용하는 비열한 방법을 사용하고(25:27~34), 심지어는 눈이 어두운 아버지를 속여서까지 아버지에게서 형의 축복을 가로챈 것(27:1~29)도, 모두 복에 대한 갈망(사모함) 때문이었다. ※하지만 이런 이유로 사람들은 야곱을 ‘간사한 사기꾼’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인격에 큰 결함이 있는 사람처럼 해석하곤 한다. 그런데 성경은 그를 ‘조용한 사람’(25:27)이라고 하였다. 이를 원어(히브리어)로 ‘이쉬 탐’(איש תם)이라고 하는데, ‘경건한 사람’, ‘믿음의 사람’이란 뜻이다. 사람들의 평가와 전혀 다르게 그를 평가하고 있는 것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 부모와 같은 형을 속이고, 하나님을 대신한 아버지를 속일 수 있단 말인가? 그런데 이것을 신앙적인 관점에서 보면 충분히 이해할 수 있다. 아직 미숙하지만 그가 경건한 믿음의 사람이었기에 장자명분의 중요성, 장자축복의 중요성을 알고 사모한 것이다. 그리고 미숙하다보니 정당하지 못한 방법을 저지른 것이다. 그의 행동은 신앙적 미숙이 낳은 결과이지 인격적인 결함 때문이 아니다. 미숙한 신앙은 미숙한 생활로 이어진다.
본문에서도 마찬가지다. 아버지까지 속이고 형의 축복을 가로채 형의 분노를 산 야곱은 서둘러 외삼촌 집으로 도망을 갔다. 그는 그곳에서 아내를 얻기 위해 14년, 그리고 가족부양을 위해 6년, 모두 20년 동안 머슴살이를 했다. 그는 새경(私耕)을 열 번이나 번복한 외삼촌의 횡포(31:41)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은혜로 10명의 자녀를 얻고 재산도 많이 모았다. 그런 그가 하나님께서 그의 조상 아브라함과 이삭에게 약속하신 땅으로 다시 돌아오게 된다. 그런데 문제는 그 땅으로 돌아오기 위해선 형 에서를 넘어야 했다. 형과 화해를 해야 했다. 그래서 그는 화해를 위해 많은 예물(짐승 약580마리)과 철저한 준비를 했다(3~23). 그리고 자신은 얍복강 나루에 머물며 밤을 지새우면서 기도를 했다. 그런데 그곳에서 그는 20년 전과 비슷한 경험을 하였다. 하나님의 천사를 본 것이다(cf.28:10~17). 여기서는 그 천사와 밤을 새우며 씨름까지 하였다. 이때 그는 천사가 그의 허벅지 관절을 처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 천사를 붙잡고 놓지 않았다. 그 이유는 축복에 대한 ‘목마름’ 때문이다.
“그가 이르되 날이 새려하니 나로 가게 하라 야곱이 이르되 당신이 내게 축복하지 아니하면 가게 하지 아니하겠나이다.”(26).
‘붙잡다’는 그의 이름의 뜻처럼 무엇이든 한 번 붙잡으면 놓지 않는 것, 해결할 때까지 끝장을 보는 것, 이것이 야곱의 주특기다. 그는 형의 장자명분을 취할 때도 그랬고, 아버지에게서 형의 축복을 가로챌 때도 그랬고, 사랑하는 아내 라헬을 얻을 때도 그랬다. 여기서도 마찬가지다. 축복하지 않으면 보낼 수 없다며 천사를 붙잡고 놓아주지 않았다. 심지어는 천사가 그의 허벅지 관절을 처서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 놓지 않았다. “자기가 야곱을 이기지 못함을 보고 그가 야곱의 허벅지 관절을 치매 야곱의 허벅지 관절이 그 사람과 씨름할 때에 어긋났더라.”(25). 이 모두는 야곱의 간절한 마음, 절실한 태도, 뜨거운 열정의 반영이다. 인간이 어떻게 하나님의 천사와 겨루어 이길 수 있겠는가? 그런데 본문은 천사가 야곱을 이기지 못했다고 한다. 그것은 복에 대한 야곱의 간절함, 그것을 추구하는 강한 열정에 감동했다는 뜻이다. 그는 하나님의 축복을 위해 평생 절름발이가 되는 것도 감수했다(31). 큰 대가를 지불했다는 뜻이다. 그가 얼마나 복에 목마른 사람인지, 얼마나 주님의 복을 사모하고 갈망한 사람인지를 잘 보여준다. 평생 불구자로 살지라도 복을 받은 자로 살겠다는 것이다. 왜냐하면 복을 받아야 형통하기 때문이다. 그는 형과의 문제도 하나님의 복을 받으면 해결된다고 믿었다. 그래서 형과의 화해를 위해 기도하기보다 하나님의 복을 간절히 구한 것이다. 이것이 에서와 야곱의 차이다. 에서는 한 끼 배고픔을 참지 못해 복의 상징인 장자의 명분을 팥죽 한 그릇에 팔아버렸지만 야곱은 그것을 얻기 위해 평생 절름발이로 살아가는 것을 감수했다. 하나님께서 ‘야곱을 사랑하고 에서를 미워하신’(롬9:13)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가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8:17).
간절히 사모하라!
야곱은 복을 사모한 사람이다. 허벅지 관절이 어긋나도록 복을 사모했다. 그 결과 그에게 ‘이스라엘’이라는 새로운 이름이 주어졌다. 이름은 단순히 명칭이 아니라 그 사람의 존재자체다. 이는 그의 존재가 바뀌었다는 뜻이다. 이제 그는 남의 발뒤꿈치나 붙잡고 허우적대는 야곱이 아니라 하나님과 겨루어 이긴 승리자 이스라엘이 된 것이다. 하나님과 겨루어 이겼으니 이제 누구도 그의 적수가 될 수 없게 되었다. 그의 형 에서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에서와 야곱의 ‘뜨거운 눈물의 상봉’(33:4)이 이뤄졌다. 하나님의 복을 받으니 사람과도 복된 일이 이루어지게 된 것이다.
하나님의 복은 사모한 사람에게 주어진다. 사모하는 사람이 주님의 복을 받을 수 있다. 기회는 사모하는 사람에게 오고, 사모하는 사람이 기회를 붙잡을 수 있다. 감사나 감격도 사모하는 사람에게 있다. 그러니 사모하는 것이 곧 복이다. 그래서 다윗은 “하나님이여 주는 나의 하나님이시라 내가 간절히 주를 찾되 물이 없어 마르고 황폐한 땅에서 내 영혼이 주를 갈망하며 내 육체가 주를 앙모하나이다.”(시63:1). “여호와여 내가 매일 주를 부르며 주를 향하여 나의 두 손을 들었나이다.”(시88:9). “주를 향하여 손을 펴고 내 영혼이 마른 땅 같이 주를 사모하나이다.”(시143:6)고 고백했다. 이것이 주님의 복을 받을 수 있는, 그리고 주님을 섬기는 올바른 자세다. 주님은 이런 사람에게 찾아오시고, 이런 사람을 만나주시고, 이런 사람에게 주님의 복을 주시어 형통하게 하신다. 야곱이 그 증인이다. “그가 사모하는 영혼에게 만족을 주시며 주린 영혼에게 좋은 것으로 채워주심이로다.”(시107: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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