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로 용서하는 생활(06-10-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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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296회 작성일 06-10-08 18:13본문
서로 용서하는 생활
엡4:25-32
절영(絶纓)지회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전투에 이겨 궁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초대했습니다. 술자리가 베풀어져 한창 즐겁게 노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지더니 왕의 애첩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둠을 틈타 장수 중 한 사람이 그녀를 희롱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그 사내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왕에게 외쳤습니다.
"폐하, 등불을 켜게 하시고 갓끈이 없는 자를 잡아 주세요."
불만 켜면 갓끈이 끊긴 자가 바로 왕의 첩을 희롱한 자라는 게 드러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도리어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 큰소리로 모두에게 자신의 갓끈을 떼어 던지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불을 켜고 잔치를 계속했습니다. 아마도 용서하여 장수 한 명을 살리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초나라와 진(秦)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초나라 왕이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왕을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수가 있었습니다. 장웅(蔣雄)이란 장수였습니다. 왕은 너무 고마워 이 장수를 불러 물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그대를 특별히 우대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토록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는가?"
그러자 그 장수가 엎드려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3년 전에 폐하의 여자를 희롱한 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 폐하의 온정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목숨을 바쳐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 뿐입니다."
용서가 자신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는 고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장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연회에 참석했던 다른 장수들에게도 왕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두터워졌겠습니까? 이렇게 용서의 마음이 넉넉하고 장수를 아끼는 군주라면 이 한 몸숨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용서는 그 사람의 인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이유
어느 기관에서 ‘사람이 자라면서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곳이 어디며, 누구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사람이 자라면서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곳은 가정이고,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가정 무용론을 주장할 수는 없고, 가족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정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과 용서를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정은 상처가 없는 가정이 아니라 용서가 넉넉한 가정입니다. 어떤 상처도 다 회복이 되고, 용서가 되는 가정이 좋은 가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상처를 가장 많이 받은 곳도 교회요, 신자들입니다. 좋은 교회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이런 교회, 이런 신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좋은 교회는 용서가 넉넉한 교회이고, 경건한 신자는 용서가 넉넉한 신자입니다.
본문은 신자들의 실제적인 생활에 대한 권면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거짓을 버려라, 분을 내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이는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신 교훈이 아니라 믿는 신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에베소 교회와 신자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오늘날 우리교회 안에도 거짓말하는 신자,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붙들고 화내는 신자, 심지어 도적질하는 신자, 더러운 말을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상처를 주는 곳이 되고, 신자들 사이에 상처가 심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고슴도치처럼 만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래서 상처투성이인 교회! 이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존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이들의 궁극적인 변화를 위해 교회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마음에 영접한 순간 변했지만 우리의 변화는 아직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수하고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옛사람을 계속 벗어버리며 동시에 새사람을 계속 입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되지 못한 서로의 모습에 대하여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서로를 향한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이 용서가 제일 요청될 곳이 저는 교회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고 살 때에는 사랑할 필요도, 용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삶을 열고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제일 상처를 많이 받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삶이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지고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 원만하게 되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빌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용서의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교회나 가정 안에서 서로를 향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문 32절이 그 대답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용서를 실천하기 위한 단계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서로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대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우선 그를 인자하게, 친절히 대하는 것으로 시작하란 말입니다. 인자란 그리스어로 "크레스토스"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일에 상관없이 그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는 뜻인데, 우리말로 친절, 온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유는 내적인 성품을 말하고(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마음), 친절은 외적인 태도를 의미한 것입니다. "크레스토스" 비슷한 말 가운데 "크리스토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에서 신자를 가르키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했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크레스토스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핍박을 받아도 팝박자들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욕을 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대신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축복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복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은총을 깨닫게 하소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소서.’ 바로 이런 신자들의 온유하고 친절한 모습 앞에 핍박자들이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스탠튼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늘 링컨에 대해 악의에 찬 평가를 하고, 심지어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스탠튼을 장관의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런 자리에 임명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을 때 링컨은 웃으면서 단 한마디 "그 자리에는 그가 적임자이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친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2.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어떤 번역은 이 단어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 번역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번역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번역은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가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그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가 내게 행한 분통터지는 말이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의 어린 시절이나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고, 그를 둘러싼 삶의 역정에서 그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그가 나에게 그렇게 대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불쌍히 여겨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요 피아니스트인 리스트에 대한 일화입니다. 리스트가 어느 작은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도시에서 젊은 여성 피아니스트가 자신이 리스트의 제자라며 피아노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광고가 붙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리스트가 그 도시에 방문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도시는 온통 축제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리스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제자들 중에 그런 제자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찾아와선 리스트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신이 바로 연주회를 개최한 사람이라며 자기 같은 사람은 아무리 연주회를 열어도 사람들이 모이질 않아 선생님의 제자라고 속였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연주회를 취소하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겠다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리스트가 그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자신이 연주할 곡들을 한 번 연주해 보라고 했습니다. 영문을 모른 이 젊은 피아니스트는 연주곡들을 연주했고, 연주가 끝나자 리스트는 자상하게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연주회를 하라. 방금 당신이 내게 배웠으니 당신은 내 제자다.’라고 말하며 그 젊은 피아니스트를 용서하고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훗날 리스트의 이 일화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높은 인격 앞에 또 한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젊은 피아니스트의 사정을 듣고 이해하게 되자 그녀를 용서하게 된 것입니다.
용서의 이유
상대에게 친절히 대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모범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5:1에서는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용서의 방법이기에 앞서 용서의 이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용서하며 살아야 할까요?
1.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엡2:1~5절은 믿기 전 우리의 존재와 운명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용서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의 존재와 운명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용서의 사랑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섭섭하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화나게 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 왜 형제를 이웃을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이 먼저를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범을 따르는 것이 우리 신자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형제를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윌리암 아더 워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과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같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나타나고, 우리의 삶이 주님 닮은 삶을 사는 비결은 용서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아시고 보시면서도 주님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입니다.
용서란 상대를 위해 면죄부를 주는 것도,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신의 아픈 과거를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용서란 그리스어로 “놓아 버리다”는 뜻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롭게 출발하여 미래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을 용서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과거에 받은 그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 내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에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다른 말로 ‘고통 끊기’입니다. 미움의 끈, 증오의 끈, 원망의 끈을 놓는 것. 더 이상 증오나 분노,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용서 받은 자와 용서하는 자의 고통을 함께 씻어내는 비결입니다. 때문에 우린 피차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네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기 힘든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잠시 마음을 가다듬어 상대를 이해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도록 합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고 용서하고 용납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우리 기뻐하는 교회가 참으로 용서를 배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우리의 비전과 사명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엡4:25-32
절영(絶纓)지회
초(楚)나라 장왕(莊王)이 전투에 이겨 궁중에서 성대한 연회를 베풀고 전쟁에 참여했던 장수들을 초대했습니다. 술자리가 베풀어져 한창 즐겁게 노는데 갑자기 바람이 불어 등불이 꺼지더니 왕의 애첩이 비명을 질렀습니다. 어둠을 틈타 장수 중 한 사람이 그녀를 희롱했던 것입니다. 그녀는 놀라면서도 그 사내의 갓끈을 잡아 뜯고는 왕에게 외쳤습니다.
"폐하, 등불을 켜게 하시고 갓끈이 없는 자를 잡아 주세요."
불만 켜면 갓끈이 끊긴 자가 바로 왕의 첩을 희롱한 자라는 게 드러날 판이었습니다. 그러나 왕은 도리어 불을 켜지 못하게 하고, 큰소리로 모두에게 자신의 갓끈을 떼어 던지도록 했습니다. 그런 다음에 다시 불을 켜고 잔치를 계속했습니다. 아마도 용서하여 장수 한 명을 살리고자 했던 것 같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났습니다. 초나라와 진(秦)나라 사이에 전쟁이 일어났는데, 초나라 왕이 죽을 위기에 빠지게 되었습니다. 이 때 자신의 목숨을 내던져 왕을 구하고 전쟁을 승리로 이끈 장수가 있었습니다. 장웅(蔣雄)이란 장수였습니다. 왕은 너무 고마워 이 장수를 불러 물었습니다.
"나는 평소에 그대를 특별히 우대한 것도 아닌데 어째서 그토록 죽기를 무릅쓰고 싸웠는가?"
그러자 그 장수가 엎드려 말했습니다.
"저는 이미 죽은 목숨이었습니다. 3년 전에 폐하의 여자를 희롱한 것이 바로 저였습니다. 그때 폐하의 온정으로 살아날 수 있었습니다. 그 뒤로는 목숨을 바쳐 폐하의 은혜에 보답하려 했을 뿐입니다."
용서가 자신을 구하고, 나라를 구하게 되었다는 고사입니다. 뿐만 아니라 자기를 위해 목숨을 내놓은 장수를 얻게 된 것입니다. 게다가 그 연회에 참석했던 다른 장수들에게도 왕에 대한 신뢰가 얼마나 두터워졌겠습니까? 이렇게 용서의 마음이 넉넉하고 장수를 아끼는 군주라면 이 한 몸숨 바쳐도 아깝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을 것입니다. 사실 용서는 그 사람의 인격과 깊은 관련이 있습니다.
교회의 존재이유
어느 기관에서 ‘사람이 자라면서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곳이 어디며, 누구에게 가장 많은 상처를 받는가?’를 조사했습니다. 조사에 의하면 놀랍게도 사람이 자라면서 상처를 가장 많이 받는 곳은 가정이고, 가장 많은 상처를 주는 사람은 가족이라고 합니다. 그렇다고 가정 무용론을 주장할 수는 없고, 가족을 포기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가정이란 상처를 주고, 받으면서 사랑과 용서를 배우는 곳이기 때문입니다. 좋은 가정은 상처가 없는 가정이 아니라 용서가 넉넉한 가정입니다. 어떤 상처도 다 회복이 되고, 용서가 되는 가정이 좋은 가정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지입니다. 신자가 상처를 가장 많이 받은 곳도 교회요, 신자들입니다. 좋은 교회는 서로 상처를 주고받지 않는 교회가 아닙니다. 사실 이 세상에는 이런 교회, 이런 신자는 존재할 수가 없습니다. 대신 좋은 교회는 용서가 넉넉한 교회이고, 경건한 신자는 용서가 넉넉한 신자입니다.
본문은 신자들의 실제적인 생활에 대한 권면입니다. 그런데 그 내용을 보면 이렇습니다. 거짓을 버려라, 분을 내지 말라, 도적질하지 말라, 더러운 말을 하지 말라고 충고합니다. 이는 믿지 않는 세상을 향해 하신 말씀이 아니라 에베소 교회에게 주신 말씀이고, 믿지 않는 사람들에게 하신 교훈이 아니라 믿는 신자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이 말씀은 당시 에베소 교회와 신자라고 하는 특수한 상황에만 한정된 것이 아닙니다. 오늘날 우리 교회들에게 주신 교훈입니다. 오늘날 우리교회 안에도 거짓말하는 신자, 시도 때도 없이 아무나 붙들고 화내는 신자, 심지어 도적질하는 신자, 더러운 말을 하는 신자들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들 때문에 교회가 상처를 주는 곳이 되고, 신자들 사이에 상처가 심한 것입니다.
여기서 중요한 문제는 교회의 존재이유입니다. 고슴도치처럼 만나면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 그래서 상처투성이인 교회! 이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존재해야 하느냐는 것입니다. 성경은 그렇다고 대답합니다. 이런 이들의 궁극적인 변화를 위해 교회는 존재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우리가 예수님은 마음에 영접한 순간 변했지만 우리의 변화는 아직 충분한 것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신자가 되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도 실수하고 아직도 죄를 짓고 있는 것입니다. 사도바울은 우리가 옛사람을 계속 벗어버리며 동시에 새사람을 계속 입어가야 한다고 말합니다. 그렇기 때문에 변화의 과정에서 일어나는 변화되지 못한 서로의 모습에 대하여 제일 필요한 것이 있다면, 그것은 바로 서로를 향한 용서인 것입니다. 이것이 본문의 결론입니다. 이 용서가 제일 요청될 곳이 저는 교회요, 가정이라고 생각합니다. 우리가 서로 거리를 두고 살 때에는 사랑할 필요도, 용서할 필요도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가 서로의 삶을 열고 접근해 가는 과정에서 상처는 피할 수 없는 것입니다. 가정이나 교회에서 제일 상처를 많이 받는 이유가 이 때문입니다. 삶이란 서로에게 상처를 주고받으면서 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각지고 모난 부분들이 다듬어져 원만하게 되게 것입니다. 그러므로 서로를 용서하고 서로에게 용서를 빌면서 살아야 하는 것이 우리의 삶입니다.
용서의 방법
그렇다면 어떻게 우리는 교회나 가정 안에서 서로를 향해 용서를 실천하는 삶을 살아갈 수 있을까요? 본문 32절이 그 대답입니다. “서로 인자하게 하며 불쌍히 여기며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 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 같이 하라.” 이 말씀은 용서를 실천하기 위한 단계적인 삶의 태도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1. 서로 친절히 대해야 합니다.
용서하기 어려운 대상의 어떤 사람이라도 우선 그를 인자하게, 친절히 대하는 것으로 시작하란 말입니다. 인자란 그리스어로 "크레스토스"입니다. 이 단어의 본래의 의미는 상대방이 나에게 행한 일에 상관없이 그에 대해 올바른 말을 하고 올바른 태도를 취한다는 뜻인데, 우리말로 친절, 온유로 번역하고 있습니다. 여기서 온유는 내적인 성품을 말하고(주님과 주님의 말씀에 길들여진 마음), 친절은 외적인 태도를 의미한 것입니다. "크레스토스" 비슷한 말 가운데 "크리스토스"라는 말이 있습니다. 그리스도라는 말입니다. 그리스도란 말에서 신자를 가르키는 그리스도인이란 말이 나오게 된 것입니다. 그런데 초대교회에서는 그리스도인이라는 말이 ‘친절한 사람’이라는 말로 통했다고 합니다. 즉 그리스도인은 크레스토스였다는 것입니다. 사실 초대교회 신자들은 핍박을 받아도 팝박자들에게 대항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에게 욕을 하거나 저주하지 않고 대신 기뻐하면서 그들에게 축복하며 기도를 드렸습니다. ‘저들이 알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그들에게 영적인 복을 부어주셔서 주님의 은총을 깨닫게 하소서. 저들의 죄를 용서하시고 영혼을 구원하소서.’ 바로 이런 신자들의 온유하고 친절한 모습 앞에 핍박자들이 무릎을 꿇게 된 것입니다.
아브라함 링컨은 친절한 사람으로 알려진 사람이었습니다. 그에게는 스탠튼이라는 정적이 있었습니다. 늘 링컨에 대해 악의에 찬 평가를 하고, 심지어 링컨을 오리지널 고릴라라고 놀려대기도 했습니다. 그런데 링컨이 대통령이 되었을 때, 그는 스탠튼을 장관의 자리에 임명했습니다. 참모들이 어떻게 그런 사람을 그런 자리에 임명할 수 있느냐고 항의했을 때 링컨은 웃으면서 단 한마디 "그 자리에는 그가 적임자이기 때문이요"라고 대답했다고 합니다. 이것이 진정한 친절입니다. 이것이 바로 용서의 시작인 것입니다.
2. 서로 불쌍히 여겨야 합니다.
어떤 번역은 이 단어를 '부드러운 마음'을 가지라고 번역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나 어떤 학자는 이 번역을 지나치게 감상적인 번역이라고 비판하기도 했습니다. 또 다른 번역은 '이해하는 마음'이라고 번역했습니다. 이 단어가 원문에 제일 가까운 번역이 아닌가 생각합니다. 우리가 누군가를 용서하려면 그를 이해하려고 애써야 합니다. 그가 내게 행한 분통터지는 말이나 행위에도 불구하고, 그의 입장에 서서 이해하려고 애를 써야 합니다. 예를 들면, 그의 어린 시절이나 그의 성장과정을 살펴보고, 그를 둘러싼 삶의 역정에서 그가 받은 상처를 이해하는 것입니다. 분하고 억울하지만 그가 나에게 그렇게 대한 이유를 조금은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그러면 그를 불쌍히 여겨 용서하게 되는 것입니다.
독일의 유명한 작곡가요 피아니스트인 리스트에 대한 일화입니다. 리스트가 어느 작은 도시를 방문하게 되었는데, 그 도시에서 젊은 여성 피아니스트가 자신이 리스트의 제자라며 피아노 연주회를 개최한다는 광고가 붙어 있었습니다. 게다가 리스트가 그 도시에 방문했다는 소문이 들리자 도시는 온통 축제분위기였습니다. 그런데 리스트가 아무리 생각해 보아도 자신의 제자들 중에 그런 제자가 없었습니다. 어느 날 저녁입니다. 한 젊은 여성이 찾아와선 리스트 앞에 무릎을 꿇고 울면서 용서를 빌었습니다. 자신이 바로 연주회를 개최한 사람이라며 자기 같은 사람은 아무리 연주회를 열어도 사람들이 모이질 않아 선생님의 제자라고 속였다는 것입니다. 당장에 연주회를 취소하고 사람들에게 용서를 빌겠다며 한 번만 용서해 달라고 했습니다. 그러자 리스트가 그 젊은 피아니스트에게 자신이 연주할 곡들을 한 번 연주해 보라고 했습니다. 영문을 모른 이 젊은 피아니스트는 연주곡들을 연주했고, 연주가 끝나자 리스트는 자상하게 잘못된 부분들을 바로잡아 주었습니다. 그리고는 ‘연주회를 하라. 방금 당신이 내게 배웠으니 당신은 내 제자다.’라고 말하며 그 젊은 피아니스트를 용서하고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훗날 리스트의 이 일화를 알게 된 사람들은 그의 높은 인격 앞에 또 한번 놀라게 되었습니다. 젊은 피아니스트의 사정을 듣고 이해하게 되자 그녀를 용서하게 된 것입니다.
용서의 이유
상대에게 친절히 대하고 이해하는 마음을 가진 것도 중요하지만 더욱 중요한 것은 주께서 나를 어떻게 용서하셨는가를 묵상하는 것입니다. 즉 주님의 모범을 생각해 보는 것입니다. 서로 용서하기를 "하나님이 그리스도안에서 너희를 용서하심과 같이 하라"는 것입니다. 이어지는 5:1에서는 "그러므로 사랑을 입은 자녀 같이 너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용서의 방법이기에 앞서 용서의 이유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왜 용서하며 살아야 할까요?
1. 용서받은 죄인이기 때문입니다.
엡2:1~5절은 믿기 전 우리의 존재와 운명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허물과 죄로 죽은 자요, 본질상 진노의 자녀, 마귀의 자식이었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용서의 은혜로 하나님의 자녀 천국의 백성이 되었습니다. 주님의 용서로 우리의 존재와 운명이 바뀌게 된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정말 말로 표현할 수 없는 큰 용서의 사랑을 우리 주님으로부터 받은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우리는 서로를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나를 섭섭하게 하고, 나에게 상처를 주고, 화나게 했던 모든 사람들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우리는 이렇게 외쳐야 합니다. ‘주님이 나를 용서하셨으니 나도 너를 용서한다!’ 왜 형제를 이웃을 나에게 상처와 아픔을 준 사람들을 용서해야 합니까? 주님이 먼저를 나를 용서하셨기 때문입니다. 이 모범을 따르는 것이 우리 신자의 의무입니다.
우리가 진정으로 형제를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을 본받는 자가 됩니다. 윌리암 아더 워드라는 사람이 이런 말을 남겼습니다. "우리가 복수할 때 우리는 짐승과 같다. 우리가 누군가를 판단할 때 우리는 인간과 같다. 그러나 우리가 용서할 때 우리는 하나님과 같다." 그렇습니다. 우리의 삶에서 주님이 나타나고, 우리의 삶이 주님 닮은 삶을 사는 비결은 용서할 때입니다. 하나님은 우리의 허물과 죄를 아시고 보시면서도 주님으로 우리의 죄를 대신 담당하게 하시고 우리를 용납하시고 용서 하셨습니다. 그러므로 나 역시 다른 사람을 용서해야 하는 것입니다.
2. 새로운 출발을 위해서 입니다.
용서란 상대를 위해 면죄부를 주는 것도,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 것도 아닙니다. 내 자신의 아픈 과거를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기 위해서 입니다. 용서란 그리스어로 “놓아 버리다”는 뜻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그래야 새롭게 출발하여 미래로 나아갈 수가 있는 것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을 용서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과거에 받은 그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에 매여 있는 것입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 내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에 묶이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이 모든 것들로부터 자유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용서란 다른 말로 ‘고통 끊기’입니다. 미움의 끈, 증오의 끈, 원망의 끈을 놓는 것. 더 이상 증오나 분노,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는 것입니다. 그래서 용서는 용서 받은 자와 용서하는 자의 고통을 함께 씻어내는 비결입니다. 때문에 우린 피차 용서하는 삶을 살아야 하는 것입니다.
"누가 네게 혐의가 있거든 서로 용납하며 피차 용서하되 주께서 너희를 용서하신 것과 같이 너희도 그리하고"(골3:13)라고 성경은 말씀합니다. 성도 여러분, 우리가 참기 힘든 일을 당한다 할지라도 잠시 마음을 가다듬어 상대를 이해하고 너그러운 마음으로 용서하도록 합시다. 만일 우리가 주님의 모범을 따라 하나님의 시각으로 우리의 이웃을 바라보고 용서하고 용납한다면 우리의 공동체는 얼마나 변할 수 있을까요? 그리하여 우리 기뻐하는 교회가 참으로 용서를 배우는 공동체가 될 수 있다면 그때 비로소 우리는 하나님께 영광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이 되는 우리의 비전과 사명을 성취하게 될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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