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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恩寵)의 여인, ‘레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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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877회 작성일 13-07-21 13:5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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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총(恩寵)의 여인, ‘레아’

창29:30~35

2013. 7/21. 08:00, 11:00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인생

그는 미국의 어느 평범한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는 그가 태어나기 며칠 전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고, 그의 어머니는 걸핏하면 그에게 폭력을 일삼았다. 어머니는 그 후 세 번 결혼했으나 한 번도 화목한 가정을 꾸리지 못했다. 그는 부모의 사랑을 받아 볼 기회조차 없었다. 그의 학교생활기록부에는 ‘이 소년은 사랑이라는 말조차 모르는 것 같다.’고 적혀있으며, 결국 고등학교를 마치지 못하고 중퇴하였다. 그 후 해병대에 입대했지만 그곳에서도 동료병사들로부터 비웃음과 조롱의 대상이 되었고, 상사에 대한 폭행사건이 문제가 되어 불명예제대를 하였다. 외국을 떠돌다 한 여성을 만나 결혼해서 두 아들을 두었지만 그들로부터도 버림받았다. 이 사람이 바로 케네디 대통령의 암살범으로 지목된 24세의 청년 리 하비 오스왈드(Lee H. Oswald)이다.

 

복음찬양 가사처럼 사람은 사랑받기 위해 태어난 존재다. 사람은 누구나 사랑을 받을 만한 가치가 있고, 사랑을 받고 살아야한다는 뜻이다. 그래서 사람은 늘 사랑에 목말라 하고, 그 사랑의 필요가 채워지지 않을 때 비참하게 무너지게 된다. 흉악한 범죄사건이 있을 때마다 언급되는 ‘반사회적 인격 장애’(psychopathy, sociopathy)의 원인이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이런 흉악한 일들이 일어날 때마다 사랑해야 할 책임을 다하지 못한, 사랑이 메마른 세상에 대한 주님의 경고이고 심판이라 생각한다. 만약 이 청년 오스왈드도 단 한 번만이라도 누군가에게 인정을 받고 사랑을 받았다면 그의 인생은 전혀 다른 모습이 되었을지도 모른다. 본문에도 사랑받지 못한 사람, 그래서 늘 사랑에 굶주린 한 사람이 나온다. 야곱의 외삼촌 라반의 장녀이자, 야곱의 첫 번째 아내 ‘레아’다.

 

사랑받지 못한 여인

 야곱은 결혼을 위해 7년을 머슴살이를 했는데, 첫날밤을 치르고 보니 신부가 바뀌어 있었다. 그가 사랑하고 결혼을 위해 7년 동안 수고했던 사람은 라헬이었다. 그런데 라헬의 언니 레아가 곁에 누워있었다(21~26). 신부가 바뀌다니! ‘세상에 이런 일이’란 프로그램에나 나올 법한 사건이다. 고대 이집트를 비롯한 중동지역에선 결혼식 당일까지도 신랑이 볼 수 없는 곳에 신부를 숨겨놓았다고 한다. 따라서 결혼식을 시작하고 신부가 입장할 때에도 얼굴을 가릴 무언가가 필요했는데, 그때 사용한 것이 면사포라고 한다. 특히 이스라엘과 같은 중동지역은 더위 때문에 결혼식을 주로 저녁에 거행했고, 조명도 없던 시절이라 야곱이 면사포 속의 주인공이 누구인지 알 수 없었던 것은 당연하리라 생각된다(속설이지만 이때부터 결혼식에서 신랑이 신부의 면사포를 벗겨주는 것이 유래됐다고 함). 아무튼 속아서 원치 않는 레아와 결혼한 야곱은 다시 7년을 수고하여 사랑하는 라헬을 얻게 된다.

 

이렇게 라반과 레아가 공모해서 야곱을 속인 이 사건은 7년 전 리브가와 야곱이 공모해서 이삭을 속인 사건을 생각나게 한다. 심는 대로 거두게 하시는 하나님의 법칙이 그대로 적용되고 있는 것이다. 그런데 이런 사건이 있을 때 자신을 돌아보며 회개하면 좋은데, 그러면 죄의 고리가 거기서 끊어지게 되는데, 대부분의 사람들은 자신이 한 일은 잊어버리고 현재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만 생각한다. 야곱도 그랬다. 그는 자신의 잘못을 돌아보고, 이것이 지난 날 아버지를 속인 죄의 결과라 생각하기보다, 자신이 속았다는 사실만 생각하며 외삼촌이자 장인인 라반에게 거세게 항의했다. 그리고 이 사건은 야곱이 레아를 싫어하는 결정적인 구실이 되고 말았다. 대부분의 남성이 그렇지만 야곱 역시 외모를 중요하게 여겼다. 그래서 ‘곱고 아리따운’ 라헬을 보고 한눈에 반하여 ‘시력이 약한’ 레아는 거들떠보지도 않았다(17,18). 이런 레아와 속아서 결혼까지 하게 되었으니 얼마나 화가 나겠는가? 그래서 이 사건으로 야곱은 레아를 더 싫어하게 되었다. 31절에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라고 기록되어 있는데, 여기서 ‘사랑 받지 못함’이란 히브리어 ‘샤네’(שנא)라는 단어는 ‘증오하다’, ‘가증히 여기고, 원수처럼 대하다.’는 뜻이다. 아무도 친교나 관계를 맺지 않으려는 감정적인 태도로 사랑의 반대 개념이다. 이는 레아의 결혼생활이 어떠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마치 벌레처럼 원수처럼 대접을 받고 살았다는 뜻이다.

 

은총을 입은 여인

그렇지만 레아는 남편의 사랑을 받지는 못했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은총의 여인이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도 중요하지만 하나님의 은혜를 입은 것이 더 중요하다. 레아는 이 복을 받았다. “여호와께서 레아가 사랑받지 못함을 보시고 그의 태를 여셨으나......”(31). 여인의 가장 큰 복은 결혼해서 자녀를 낳는 것이다. 그런데 그 자녀는 하나님의 선물로 하나님의 은총을 받아야 낳을 수 있다. 모든 이스라엘 사람들은 그렇게 생각을 하고 있었다(30:2). 그러니 결혼해서 자녀를 낳은 것은 하나님의 큰 은총을 입은 증거다. 레아는 바로 그 은총을 입어 자녀를 줄줄이 6남 1녀나 낳았다. 이렇게 레아가 하나님의 은총을 입게 된 것은 두 가지 이유이다.

 

하나는, 그녀의 아름다운 성품 때문이다.

17절에서 라헬과 비교하여 레아를 ‘시력이 약하다.’고 말하고 있다. 이를 외모에 대한 평가로 해석하는 경우와 서로 다른 아름다움에 대한 평가로 해석하는 경우가 있다. 즉 라헬은 뛰어나게 아름다운 외모를 가졌지만 레아는 착하고 선한 마음을 가졌다는 것이다. 그래서 어떤 번역에서는 이를 ‘눈매가 부드럽다.’로 번역하고 있다. 전체 맥락을 보면 후자가 더 설득력이 있다. 레아는 남편에게 벌레처럼 원수처럼 대접을 받으면서도 일편단심 망부가(望夫歌)를 부르며 남편을 사랑하고, 그 사랑을 기다렸다. 그녀가 직접 지어준 자녀의 이름 하나하나에서 이런 마음이 잘 드러난다(르우벤, 시므온, 레위). 일반적으로 이런 대접을 받으면 사랑도 미움으로, 나아가서 적개심으로 변하는 법이데, 끝까지 이런 태도를 갖는 것은 마음이 착하고 너그러운 정말 성품이 아름다운 사람이기에 가능한 것이다. 그렇다. 레아처럼 상대방이 나에게 어떤 대하든 상관하지 않고 늘 착하고 선한 마음을 유지하는 것이 주님의 복을 부르는 비결이다.

 

다른 하나는, 약한 사람을 돌아보시는 하나님의 성품 때문이다.

31절에서 하나님은 레아를 보셨다. 특히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하고 있는 안타까운 처지를 보셨다. 남편에게 벌레처럼 원수처럼 취급받고 사는 것을 다보셨다. 그래서 그의 태를 여셨다. 사람은 가진 사람, 힘 있는 사람 주변으로 모이고, 그런 사람과 함께 하려 하고, 그 무리에 들어가려고 노심초사한다. 사실 모든 부정과 부패가 여기서 비롯된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을 고아와 과부의 하나님이라고 하였다. 탈무드는 고아와 과부를 웃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웃으시게 하는 일이라고 했다. 하나님은 약한 자와 함께 하시고, 그들의 형편을 돌아보시고, 그들의 부르짖음을 들으시고, 그들의 처지를 신원하시는 분이시다. 미련한 것들을 택하여 지혜로운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약한 것들을 택하여 강한 자들을 부끄럽게 하시고, 천한 것들과 멸시 받는 것들과 없는 것들을 택하여 있는 것들 폐하시는 분이시다(고전1:27,28). 주님께서도 이 땅에 오셔서 하신 대부분의 사역이 육체적, 정신적, 사회적, 경제적으로 연약한 사람들과 함께 하셨고, 그들의 친구가 되어 주셨고, 또한 그들의 필요를 채워주셨다. 그러므로 우리가 주님의 은혜를 입기 위해선 겸손하게 자신을 낮춰야 한다. 바울이 그토록 주님의 은혜 안에 거할 수 있었던 것은 자신을 죄인의 괴수의 자리까지 겸손하게 낮췄기 때문이다(딤전1:15). 아울러 주변의 ‘레아’들에게 관심을 갖는 것이다. 어려운 이웃들을 먼저 챙기는 것이 주님의 복을 부르는 비결이다.

 

은혜를 깨달을 때 현실을 넘어설 수 있다.

그런데 문제는 레아가 자신이 하나님의 특별한 은총을 입고 있으면서도 한동안 그 사실을 깨닫지 못했다. 셋째 아들 시므온을 낳을 때까지도 그의 관심은 오로지 남편의 사랑에만 집중되어 있었다. 내가 아들을 낳았으니 이제 남편이 나를 사랑해 주겠지(르우벤)? 내가 그에게 세 아들을 낳았으니 남편이 이제부터 나와 연합하겠지(레위)? 이렇게 하나님의 은혜로 줄줄이 아들을 낳고도 여전히 하나님보다 남편에게 집중하였다. 그렇다. 아무리 은혜를 입고 있어도 깨닫기 전에는 그것을 은혜로 여기지 않는다. 깨달을 때 은혜를 보게 되고, 듣게 되고, 알게 된다. 깨닫는다는 것은 눈이 열리고, 귀가 열리고, 마음이 열린다는 뜻이다. 그러므로 깨닫는 것이 은혜다.

 

레아는 넷째 유다가 태어났을 때 비로소 깨달았다. 물론 여전히 남편의 사랑을 기다리고 있지만 이때부터는 이것이 관심의 첫째가 아니었다. 하나님이 첫째였다. 유다는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뜻이다. 이는 남편 사랑을 받지 못한 불행한 자신을 돌아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찬양한다는 고백적인 뜻이 담긴 이름이다. 비로소 그녀는 자신에게 베풀어주신 하나님의 은혜를 보게 되고, 알게 된 것이다. 사람에게 인정받고 사랑받는 것보다 하나님의 사랑을 받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게 된 것이다. 은혜를 깨닫고 나니까 남편 사랑에만 목마른 여인에서 하나님을 찬양하는 여인으로 바뀌었다. 물론 상황이 변한 것이 아니다. 남편은 여전히 라헬만 사랑하고 자기에겐 따뜻한 눈길, 따뜻한 말 한마디도 붙이지 않았다. 깨닫지 못했을 땐 이런 남편의 태도가 야속하기만 했는데, 은혜를 깨닫고 나니 그럼에도 불구하고 찬양할 수 있게 되었다. 현실을 넘어서게 된 것이다. 사실 은혜를 받았다고 상대방이 변하고 세상이 변한 것이 아니다. 내가 변한 것이다. 내 자신이 변하면 똑같은 세상, 똑같은 환경, 똑같은 사건, 똑같은 사람인데 모두가 달리 보이게 된다. 찬송가에도 ‘세상과 나는 간 곳 없고 구속한 주만 보이도다!’라고 노래하고 있다. 이것이 주님의 은혜를 깨달은 사람의 모습이다. 주님의 은혜를 깨닫고 나니 나를 둘러싸고 있는 세상과 그 세상 속에서 나를 아등바등하게 만드는 모든 문제들이 문제가 되지 않는다는 고백이다. 우리 모두는 다 주님의 은혜 안에 살고 있다. 단지 그것을 깨닫고 있느냐, 깨닫지 못하고 있느냐만 차이가 있고, 깨닫되 얼마만큼 깨달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자신을 레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자신을 레아로 생각하는 사람들에게 도전하고 싶다. 하나님은 우리 모두에게 라헬의 외모에 견줄 수 있는 탁월함을 주셨다. 그것을 잘 선용하는 것이 주님의 복을 부르는 비결이다. 또한 부족이나 결핍, 약점은 인생의 무덤이 아니라 하나님의 은혜를 채울 수 있는 공간이다. 오히려 부족이나 결핍, 약점이 많을수록 주님의 은혜를 더 많이, 더 크게 받을 수 있다. 더욱 중요한 것은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깨달아야 은혜를 보게 되고, 알 수가 있다. 그래야 우리를 붙들어 매고 있는 현실의 문제를 넘어 설 수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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