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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을 두려워한 산파들, ‘십브라와 부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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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0,069회 작성일 13-08-18 12:40

본문

하나님을 두려워한 산파들, ‘십브라와 부아’

출1:15~22

2013. 8/18. 08:00, 11:00

어느 개의 죽음

 어떤 왕이 모든 벽을 수백 개의 거울로 장식한 참으로 멋지고 아름다운 궁전을 지었다. 어느 날 밤, 우연히 개 한 마리가 길을 잘못 들어 궁전으로 들어갔다. 개는 사방을 둘러보다 깜짝 놀랐다. 수백 마리의 개들이 자신을 노려보고 있었기 때문이다. 놀란 그 개는 그 수 백 마리의 개들을 보고 짖었더니 그들이 따라서 짖었고, 공격할 자세를 취하니 그들 또한 공격할 자세를 취했다. 당황한 개는 맹렬하게 벽을 향해 덤벼들었다. 다음 날 아침에 그 개는 죽어있었다. 물론 그곳에는 그 개밖에 없었다.

 

두려움이 이와 같다. 두려움이란 실체가 없지만 치명적인 결과를 부른다는 이야기다. 전쟁에서 죽은 사람의 수보다 전쟁에 대한 두려움으로 죽은 사람의 수가 훨씬 많고, 질병으로 죽은 사람보다 질병에 대한 두려움 때문에 죽은 사람이 더 많다고 한다. 나폴레옹 힐은 ‘두려움은 모든 논리를 무력하게 하고, 모든 상상력을 파괴하고, 모든 자신감을 꺾어버리고, 모든 열정을 지워버리고, 모든 의욕을 없애버리고, 그리고 사람들을 나태와 비참과 불행에 빠뜨리고 만다.’고 했다. 성경은 역시 “마음의 즐거움은 양약이라도 심령의 근심은 뼈를 마르게 하느니라.”(잠17:22)고 했다. 두려움이 우리 삶에 미치는 영향이 크다는 뜻이다. 실제로 질병의 70%이상이 마음에서 생기는데, 그 주요 원인이 두려움이라고 한다. 마음이 상하면 몸도 상한 법이다. 그러므로 두려움에 대한 극복이 건강한 인생의 중요한 관건이다. 본문에는 절대 권력자의 명령에 두려움 없이 대처한 용기있는 사람들이 소개되고 있다.

 

고통당하는 하나님의 백성

지금까지는 창세기에 나온 복의 통로가 되었던 주요인물에 대하여 생각해 보았다. 오늘부터는 출애굽에 나온 주요인물을 생각해 보려고 한다. 출애굽기는 요셉의 초청으로 이집트로 이주한 야곱의 아들들의 이름과 이들이 이집트 사람들이 위협을 느낄 만큼 강성한 민족이 되었다는 말씀으로 시작하고 있다. “이스라엘 자손은 생육하고 불어나 번성하고 매우 강하여 온 땅에 가득하게 되었다.”(7). 게다가 “요셉을 알지 못하는 새 왕”(8), 즉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새로운 왕조가 이집트를 다스리게 되었다. 이것은 이스라엘에겐 고난의 시작을 의미한다. 하지만 이 고난은 이집트가 그들이 머물 영원한 처소가 아니라는 것, 하나님의 구원과 하나님께서 그들의 조상에게 약속하신 땅에 대한 소망을 갖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그러니 무슨 일이든 그 현상만 볼 것이 아니라 그 이면(그 일을 통하여 말씀하시고자 하시는 하나님의 뜻)을 볼 수 있는 영적 안목이 필요하다. 아무튼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호의적이지 않은,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 입장에서 이스라엘은 심각한 우환(憂患)거리였다(10). 이 땅에서 가장 비옥한 고센지역을 차지하여 큰 민족을 이루고 있는 이들이 만약 외적과 손이라도 잡는 날이면 이집트로선 치명적이 될 수밖에 없었다. 이것이 이집트 새로운 왕조의 고민이었다.

 

그래서 이집트의 새로운 왕조는 후환을 없앤다는 명목으로 이스라엘 백성을 모두 제국의 노예로 만들고, 그들의 출산을 억제하기 위해 강제노역을 시켰다(11). 하지만 강제노역을 통한 출산억제정책은 실패로 돌아갔다(12). 그러자 두 번째 정책을 내놓았는데, 그것이 곧 본문이다. 그것은 산파들을 통한 남아(男兒)살해정책이다. 이스라엘 백성의 출산을 돕는 산파들에게 “아들이거든 죽이고 딸이거든 살려두라.”(16)라고 명령했다. 인간의 생명을 돌보는 산파에게 오히려 생명을 헤치는 죽임의 하수인이 되라는 참으로 잔인한 명령이었다. 그렇지만 이 정책 역시 실패하였다. 그것은 히브리인 산파 ‘십브라와 부아’가 왕의 명령을 따르지 않았기 때문이다. 사실 이들은 모든 산파를 대표한 사람들이다. 본문은 이와 같은 산파들의 용기와 지혜를 보여주고 있다.

 

산파들의 용기와 지혜

본문은 지엄(至嚴)한 왕명에 대한 산파들의 행위를 “산파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여 애굽 왕의 명령을 어기고 남자 아이를 살린지라.”(17)고 묘사하고 있다. 여기서 주목해야 할 점은 산파들이 왕의 명령을 어긴 이유다. 그것은 그들이 하나님을 두려워하였다는 점이다. 그들이 두려워한 것은 눈에 보이는 권력 이집트 왕 바로가 아니라 눈에 보이지 않는 하나님이었다. 하나님을 더 두려워한 것이다. 이것이 바로 믿음이다. 믿음은 보이지 않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 즉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으로부터 시작된다. 그리고 이것이 악한 자에게 이용당하지 않는 비결이고, 또한 자기 자신을 지키는 비결이다. 여기에는 두 가지 신학적 주제가 내포되어 있다.

 

하나는, 영적 용기다.

이 영적 용기는 세상의 두려움을 이기는 힘이다. 그런데 이 용기는 하나님을 두려워함에서 온다. 용기의 사전적 의미는 ‘사물을 두려워하지 않는 기개’라는 뜻이지만 영적 의미는 ‘하나님을 그 무엇보다도 두려워하는 마음’이다. 이 때 사용되는 히브리 단어가 ‘야레’(ירא)인데, 이 단어의 본뜻이 ‘두려움’이지만 ‘경외’라는 말로도 번역된다. 영적 용기는 하나님을 경외함(하나님을 우러러보고 존중하는 마음에서 비롯된 거룩한 두려움)에서 온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면 그 무엇도 두려움의 대상이 될 수가 없다. 그래서 시편 기자는 “여호와는 내 편이시라 내가 두려워하지 아니하리니 사람이 내게 어찌할까.”(시118:6)라고 외쳤다. 사람뿐만이 아니다. 환경도 질병도 사단도 그 무엇도 어떻게 할 수가 없다(롬8:31).

 

두려움은 사라지게 해서 이기는 것이 아니다. 두려움은 더 큰 두려움으로 이기는 것이다. 빛을 비추면 어두움이 사라지는 것과 같은 이치이다. 하나님을 두려워하고, 하나님을 경외하면, 세상의 두려움은 내가 감수할 수 있는 작은 것이 된다. 사단은 더 이상 위협의 대상이 되지 못한다. 세상이나 사단은 우리를 만들지도, 죽이지도 못한다. 다만 우리를 방해할 뿐이다. 우리를 살리기도 하고 죽이기도 하실 수 있는 분은 오직 하나님뿐이시다. 그래서 바울은 “내가 사나 죽으나 주의 것이라.”(롬14:8)고 고백한 것이다. 모두가 주님께 있고, 주님 손에 달려있다는 뜻이다. 이 믿음이 우리 앞에 닥친 현실의 두려움을 넘어서게 한다. 소년 다윗이 골리앗의 창과 칼을 두려워하지 않고 용기있게 맞설 수 있었던 것은 전능하신 하나님을 경외했기 때문이다.

 

다른 하나는, 신령한 지혜다.

하나님을 두려워하는 것이 이스라엘 지혜신학의 기본적인 주제다(잠1:7). 여기서 지혜란 세속의 왕권과 하나님의 왕권 중에서 어느 것을 더 두려워해야 하는가를 식별할 수 있는 능력이다. 경외(경건한 두려움)라는 단어 속에서 이 두 주제(용기와 지혜)가 이렇게 통합된다. 본문은 비천한 산파들의 지혜가 지혜의 나라 이집트 왕이 가진 지혜를 능가하고 있다는 것을 증언한다. 왕의 심문에 대한 산파들의 대답에서 이를 보여주고 있다. 왜 남자 아이들을 살렸느냐는 왕의 심문에 산파들이 대답했다.

 

히브리 여인은 애굽 여인과 같지 아니하고 건장하여 산파가 그들에게 이르기 전에 해산하였더이다.”(19).

 

다소 해학적이고 비꼬는 듯한 대답이지만 이에 대해 왕이 더 이상 아무 말도 못했다. 어떤 사람들은 산파들의 이 대답을 윤리적으로 문제를 삼기도 한다. 표면상으론 산파들이 자신들의 행동을 합리화하기 위해 왕에게 거짓말을 둘러대고 있는 것으로 보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생명이 걸린 문제를 논쟁의 대상으로 삼아서는 안된다(마12:1~13). 더욱 중요한 것은 이 대답 속에 담긴 저자의 의도를 아는 것이다. 그것은 이집트 왕 바로보다 뛰어난 산파들이 지닌 ‘지혜’의 탁월성에 있다. 하나님을 두려워한 산파들의 지혜에 이집트 지혜의 대변인인 바로도 유구무언(有口無言)이 될 수밖에 없었다는 점을 강조하고 있다. 바로의 지혜를 무너뜨린 비천한 히브리인 산파의 입을 통해서 나타나는 어리석은 듯한(?) 하나님의 지혜의 통쾌한 승리를 보여주고 있다. 누구도 하나님의 지혜를 당할 수 없다. 누구든지 하나님이 주신 지혜로 살 때 탁월한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런데 이 지혜는 하나님을 두려워하는(경외하는) 사람에게 주시는 하나님의 선물이다.

 

두려움이 없는 생활

어떤 사람이 공동묘지를 지나 마을로 가는 중이었다. 그는 그곳에서 묘지들 사이를 뛰어다니며 놀고 있는 한 아이를 발견했다. 그는 그 아이에게 ‘여기는 공동묘지인데 무섭지 않니?’하고 물었다. 그러자 ‘아니오!’하고 아이가 대답했다. ‘왜 무섭지 않지?’하고 또 묻자. ‘우리 아빠가 여기 관리인이거든요.’라고 대답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공동묘지를 무서운 곳이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이 아이에겐 그곳이 즐거운 놀이터였다. 자기 아버지가 그곳 관리인으로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인생도 마찬가지다. 사람들은 세상이 살벌하고, 무섭고, 두려운 곳이라고 말한다. 실재로 그렇다. 이 세상에서 날마다 일어나는 사건사고나 온갖 질병들만 보아도 그렇다. 안전하게 집에 돌아올 확률이 75%라니 얼마나 가슴 떨리는 일인가? 하지만 하나님을 두려워(경외)하는 사람은 세속적인 두려움을 넉넉히 이긴다. 하나님이 이 세상과 우리의 생사화복을 관장하시는 유일한 관리인이시기 때문이다. 히브리어로 ‘보다’(라아ראה)는 동사와 ‘두려워하다’(야레ירא)는 동사는 어원이 같다. 보는 것과 두려움이 깊은 관련이 있다는 뜻이다. 보는 것에 따라 두려움이 생기고, 보는 것에 따라 믿음의 용기와 지혜가 생긴다.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께서 행하신 위대한 구원을 바라보고, 주님의 말씀과 주님께 행하신 일들을 바라볼 때 히브리 산파 십브라와 부아처럼 왕의 명령을 두려워하지 않는 믿음의 용기, 왕의 지혜를 넘어서는 신령한 지혜를 갖게 된다.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이 사람의 본분’(전12:13)이라고 했다. 항상 거룩하신 주님 앞에 두렵고 떨린 마음으로 주님을 섬기는 저와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두렵고 떨림으로 주님을 섬기는 사람만이 세상과 환경과 사단 앞에서 당당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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