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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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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606회 작성일 13-09-08 13: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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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망자, ‘모세’

출2:11~15

2013. 9/8. 08:00, 11:00

무너지는 것은 순간이다.

쌓고 세우는 것, 가꾸고 이루는 것은 어렵다. 하지만 무너뜨리는 것은 쉽다. 세우는 데는 많은 시간과 기술, 많은 열정과 정성, 많은 재물이 필요하지만 그것을 무너뜨리는 데는 많은 시간이 걸리지 않는다. 수개월 혹은 수년, 수십 년에 걸쳐 만들어 놓은 건축물을 무너뜨리는 데는 단 몇 초면 충분하다. 지난주에 핀란드의 국민기업 노키아가 마이크로소프트사에 합병이 되어 큰 화제가 되었다. 노키아는 그동안 핀란드 국민을 먹여 살리다시피 한 150년 된 기업으로 불과 몇 년 전만해도 모바일업계 부동의 1위였다. 그런데 이렇게 무너진 것이다. 우리의 습관이나 계획, 결심, 성공, 관계, 건강, 나아가서 우리의 인생도 단 한방에 무너질 수 있고, 한 순간에 무너질 수 있다. 모세의 생애가 이를 잘 보여주고 있다.

 

본문은 모세가 태어나서 강물에 버려진 것만큼 그의 생애에 충격적인 사건이다. 그의 일생을 한순간에 송두리째 바꿔놓은 사건이다. 비록 노예출신이긴 하지만 그는 나이 40이 될 때까지 만인의 부러움을 한 몸에 받고 살았다. 공주의 양아들로서 차기 이집트를 통치할 유력한 후계자였다. 이집트의 모든 학문에 통달하여 언변과 하는 일들(리더십)이 탁월했다(행7:22). 누가 보더라도 출세와 명예가 보장된 인생이었다. 그런데 나이 40세 때, 다른 사람의 시비에 휘말려 그만 사람을 죽이고 말았다. 이 일로 인해 그는 왕자의 신분에서 살인자로, 유력한 왕위 계승자에서 쫓기는 도망자로 바뀌게 된 것이다. 더 이상 왕궁에서 살지 못하고 광야를 떠돌아다니며 기약없는 도피생활을 하게 되었다. 한순간에 지난 40년 동안 이집트 왕자로서의 화려한 생활이 무너지고 만 것이다. 이 모두가 ‘한순간’에 일어났다. 이렇게 모세의 40년 세월이 한순간에 무너진 이유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1. 조급한 행동이다(11).

 모세의 나이 40이 되던 어느 날, 자신의 동족 이스라엘 백성이 고생하는 노역현장을 방문하였다(11). 이 방문에 대하여 스데반은 이렇게 말하고 있다. “나이가 사십이 되매 그 형제 이스라엘 자손을 돌아볼 생각이 나더니”(행7:23). 자기 동족을 위해 자신이 해야 할 일이 무엇인가를 알아보기 위해 방문했다는 뜻이다. 나이 40은 뭔가를 시도하기에 가정 좋은 인생의 절정기다. 이 때 모세는 노역현장에서 고생하는 자신의 동족을 생각하고, 그들을 도울 수 있는 방안을 찾기 위해 현장을 방문하였다. 여기서 모세가 고역을 당하고 있는 사람들이 자신의 동족이고 형제라고 말한 것은 아주 중요하다. 아기 때 이집트 왕실로 입양되어 그곳에서 줄곧 배우며 잘랐는데도 어떻게 그것을 알게 되었을까? 그것은 어머니 요게벳의 영향이다. 요게벳이 유모로 있으면서(5세까지) 그에게 가르쳐 준 것이다. ‘너는 이집트 사람이 아니라 히브리 사람이다. 고생하고 있는 저 사람들은 너의 동족이고 형제다. 장차 네가 돌봐줘야 할 사람들이다.’ 어머니가 젖을 먹이면서 가르쳤던 내용이 그 동안(약35년) 왕궁에서 배운 이집트의 학문에 지워지지 않았고 생생히 그의 마음에 새겨져 있었던 것이다. 그러니 조기교육, 특히 어려서 신앙교육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새삼을 느낄 수 있다. 그래서 성경은 “마땅히 행할 길을 아이에게 가르치라. 그리하면 늙어도 그것을 떠나지 아니하리라.”(잠22:6)고 말씀하신 것이다.

 

그런데 이 때, 모세는 뜻하지 않는 사건을 목격하고 분노하게 된다. 어떤 이집트 사람이 한 히브리 사람, 곧 자기 형제를 치는 것을 본 것이다. 즉 이집트의 감독관이 이스라엘 사람을 가혹하게 다루는 모습을 본 것이다. 그것을 본 순간 민족적 의분심이 솟구쳐 그만 그 감독관을 죽이고 말았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지금도 마찬가지지만 당시 사회에서 공무를 집행하는 공직자를 해치는 것은 곧 왕을 해치는 것으로 간주되어 지위고하를 막론하고 엄벌에 처해졌다.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모세는 ‘조급한’ 이 행동 때문에 한순간에 모든 것을 잃고, 동족을 돌보기는커녕 자기 한 몸 건사하기도 힘든 쫓기는 도망자로 전락하게 되었다. ‘조즉실군’(躁則失君)이란 말이 있다. ‘조급하면 지배자로서의 지위를 잃는다.’는 말이다. 조급한 사람은 자기 자신에 대한 자제력이 없는 사람이다. 자기 자신도 다스리지 못한 사람이 다른 사람을 다스릴 수 없는 것은 당연한 일이다. 이것이 청년 모세가 무너지게 된 첫 번째 이유이다.

 

2. 좌우만 살피는 태도다(12).

두 사람이 감옥에 갇혔다. 한 사람은 감방 창살 밖으로 펼쳐진 푸른 하늘을 바라보며 시를 지었고, 나중에 시인이 되었다. 다른 한 사람은 같은 창살을 통하여 감옥 담벼락 밑의 진흙땅만 바라보며 원망하고 불평했다. 그러다가 그는 정신병자가 되었다. 이 이야기는 ‘어디에 있느냐’보다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하다는 것을 보여준다. 두 사람이 같은 감옥, 같은 감방에 있었지만 한 사람은 시인이 되고, 한 사람은 정신병자가 되었다. 그것은 서로 바라보는 방향이 달랐기 때문이다. 사람의 미래는 바라보는 방향에 따라 결정된다. 그런데 더 중요한 것은 ‘무엇을 보느냐, 누구를 보느냐’이다. 즉 바라보는 대상이다. 바울은 어떤 상황이나 환경에도 자족한다고 하였다. “......어떠한 형편에든지 나는 자족하기를 배웠노니 나는 비천에 처할 줄도 알고 풍부에 처할 줄도 알아 모든 일 곧 배부름과 배고픔과 풍부와 궁핍에도 처할 줄 아는 일체의 비결을 배웠노라. 내게 능력 주시는 자 안에서 내가 모든 것을 할 수 있느니라.”(빌4:11~13). 그 까닭은 그의 시선을 자신이 처한 환경이나 상황에 두지 않고 예수님께 두었기 때문이다. 바라봄의 대상이신 주님께서 그에게 모든 일에 자족할 수 있는 능력을 주신 것이다.

 

12절에 “좌우를 살펴 사람이 없음을 보고”라는 말씀이 나온다. 이는 모세가 무너지게 된 또 하나의 이유다. 이는 당시 그가 ‘어떤 사람인가’(그의 가치관)를 잘 보여준다. 즉 모세는 좌우만 살필 줄 아는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여기서 ‘좌우를 살피는 것’은 사람이 보나 안보나 사람의 눈치를 살폈다는 뜻이다. 세상에서 가장 믿을 수 없는 사람, 믿어서는 안 될 사람 중에 하나가 사람의 눈치만 살피는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사람의 마음을 사기 위해 사람이 보는 데서만 잘한다. 그러나 사람이 보지 않으면 못할 짓이 없다. 모세가 그랬다. 이런 모세의 모습은 당시 이집트 교육, 이집트 교육으로 대변되는 세속적인 교육의 한계와 특징을 보여준다. 이집트(세속) 교육은 한마디로 ‘좌우를 살피는’ 것이다. 즉 사람과의 관계에 초점을 두고 좌우로 사람의 눈치만 살피면서 살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모세는 이와 같은 이집트 교육의 엘리트 코스를 밟은 사람이기에 ‘좌우만 살피는 사람’이 된 것은 당연한 일이다. 오늘날 교육도 마찬가지다. 반면 신앙교육은 한마디로 ‘코람데오’(Coram Deo)다. 삶의 초점을 하나님과의 관계에 두고 하나님을 의식하며 하나님의 뜻을 따라 살도록 훈련하는 것이다. 하나님의 눈치를 살피면서 ‘하나님 앞에서’ 살게 하는 훈련이다. 이것이 신앙교육의 목표이고 신앙생활의 목표이다. 경건한 신앙인이란 바로 이런 사람을 가리킨다.

 

격언에 ‘새의 눈을 가진 사람은 흥하고 벌레의 눈을 가진 사람은 망한다.’는 말이 있다. 낮고 어두운 곳을 보지 말고, 높고 밝은 곳을 바라보라는 교훈이다. 무엇을 보느냐, 누구를 보느냐, 어디를 보느냐가 중요하다. 이것이 그 사람, 곧 그 사람의 가치관을 결정하기 때문이다. 재물을 바라보는 사람은 재물에 속한 사람이고, 명예를 바라보는 사람은 명예에 속한 사람이다. 사람을 바라보는 사람은 사람에게 속한 사람이다. 반면에 하늘을 바라보는 사람은 하늘에 속한 사람이다. 죽음의 순간에도 하늘을 바라보고, 주님의 보좌를 바라보았던 스데반처럼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보좌를 바라보는 복된 눈이 되기를 바란다.

 

무너짐은 끝이 아니다.

실패보다 더 무서운 것이 좌절이고 절망이다. 실패를 끝이라고 생각하는 것이다. 실패는 끝이 아니고 새로운 시작을 위한 ‘전환점’(turning point)이다. 무너뜨림도 마찬가지다. 대개의 경우 낡고 위험하고 잘못되고 불편하고 보기 흉한 것을 새롭게 쌓고 만들고 세우기 위해서 무너뜨린다. 흔히 이를 ‘창조적인 파괴’라고 부른다.

 

모세는 이 무너짐을 통하여 하나님께서 쓰시기에 합당한 새로운 존재로 세워지게 되었다. 즉 창조적인 파괴를 경험한 것이다. 그는 살인을 저지르고 광야에서 도피생활을 하는 동안 분노의 감정을 다스리지 못한 조급함을 극복하였다. 광야에서는 조급하게 서두른다고 하여 이룰 수 있는 것이 아무 것도 없다. 광야는 이런 조급함을 극복하기에 최적의 장소다. 훗날 자기 민족을 이끌고 가나안 땅으로 향할 때, 백성들의 무수한 비난과 공격, 원망과 불평에 대하여 평정심을 잃고 감정으로 맞서지 않았다. 항상 잠잠히 참고 기다리며 기도했다. 그래서 성경은 “이 사람 모세는 온유함이 지면의 모든 사람보다 더하더라.”(민12:3)고 말씀하고 있다. 그의 시선도 마찬가지다. 광야는 사람의 눈치를 살필 필요가 없는 곳이다. 좌우로 보이는 것이라곤 모래, 자갈, 돌, 바위가 전부다. 위기에 처한다 해도 도움을 구할 수 있는 사람이 없는 곳이 광야다. 그러니 자연히 위를 바라볼 수밖에 없다. 그래서 이집트 생활 40년 동안 좌우만 살피며 살았던 그의 시선이 여기서 바뀌게 된 것이다. 하나님을 바라보게 된 것이다.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살아가는 법을 배우게 된 것이다. 그래서 그가 백성을 인도하는 동안 숱한 어려움에 직면할 때마다 좌우를 살피지 않고, 그저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고 기도하면서 하나님의 도우심을 바라보았다. 그러므로 모세에게 무너짐은 성숙한 인격, 성숙한 신앙을 위한 창조적인 파괴였다. 이를 통하여 하나님께 잘 길들여진 온유한 사람으로, 항상 초점을 하나님께 둔 경건한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이다.

 

무너짐은 그 자체가 고통이다. 하지만 무너짐은 다시 세우기 위한 과정이다. 하나님은 모세의 살인사건을 그렇게 사용하셨다. 우리도 살면서 비슷한 경험을 할 수 있다. 그럴 때 나를 더 좋은 모습, 더 아름다운 모습으로 세우기 위한 하나님의 손길로 여길 수 있기를 바란다. 나아가서 지금 내 모습 중에 주님이 쓰시기에 불편한 부분이 있는지 살펴보고 주님이 쓰시기에 편리하도록 다시 세울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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