분노의 덫에 걸린,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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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920회 작성일 13-11-10 16:58본문
분노의 덫에 걸린, ‘모세’
민20:10~13
2013. 11/10. 08:00, 11:00
마음의 쿠션
조신영 씨의 「쿠션」이란 책에 나온 이야기다. 헤라클레스가 어느 날 좁을 길을 가고 있었다. 한참을 걷고 있는데 사과 크기의 이상한 물건이 길바닥에 있었다. 그는 별 생각 없이 그것을 발로 툭 찼다. 그러자 그것이 수박처럼 커졌다. ‘어, 이게 뭐야?’ 하고 그것을 다시 힘껏 찼다. 그러자 이번에는 바위만큼 커졌다. 그는 들고 있던 커다란 쇠뭉치로 박살내려고 그것을 내리쳤다. 그러자 그것은 아까보다 두 배나 더 커졌고, 그가 걸어가는 좁은 길을 막아버렸다. 화가 난 그는 웃옷을 벗고 그것을 들어서 집어던지려고 했다. 하지만 힘을 쓸수록 그것은 점점 커져서 마침내 산더미처럼 되었다. 그때 어디선가 한 여인이 나타났다. 그리고는 산더미 같은 이상한 물건을 향해 아름다운 노래를 들려주었다. 그러자 그 물건은 순식간에 본래의 크기로 되돌아가서 길 한 모퉁이에 툭 떨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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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기에 등장하는 이상한 물건은 ‘분노’라는 감정이다. 분노는 건드리지 않고 그냥두면 작아지지만 건드릴수록 더 커진다는 뜻이다. 어떤 사람이 분노를 ‘한 손에는 숯불을, 다른 한 손에는 오물을 들고서 다른 사람에게 던지려는 사람’에 비유했다. 그러면 다른 사람을 공격하기에 앞서 먼저 자신의 손을 태우고, 자신의 손을 더럽히게 된다. 결국 분노는 분노하는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고, 수치를 당하게 한다는 이야기다. 분노의 직접적인 피해자는 분노하는 사람 자신이다. 그러므로 분노는 다스려야할 감정이다. 이를 위해 필요한 것이 ‘마음의 쿠션’이라고 한다(조신영). 쿠션은 자극과 반응에 대한 공간이다. 자극에 즉각 반응하는 사람은 마음의 쿠션이 얇은 사람이다. 이런 사람은 쉽게 분노에 사로잡히게 된다. 반면 마음의 쿠션이 두껍고 넓은 사람은 불쾌한 상황이나 자극에도 즉각 반응하지 않고, 오히려 상황을 주도하여 긍정적인 결과를 만들어낸다.
그 부모에 그 자식
헤라클레스처럼 분노를 다스리지 못하여 큰 해를 당한 사람들이 많다. 여러분 또한 살아오면서 분노를 적절하게 다스리지 못해 어려움을 겪은 경험이 몇 번은 있을 것이다. 본문은 ‘온유의 사람’(민12:3) 모세가 한순간의 분노 때문에 가나안 입국이 좌절된 사건이다. 이 사건은 이스라엘 백성이 이집트를 나온 지 약 38년 정도 되었을 때 일어났다. 그들이 가데스에 도착했을 때 그곳에 마실 물이 없었다. 그러자 백성들이 모세에게 달려가서 불평과 원망을 쏟아내면서 거칠게 항의를 했다.
“우리 형제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을 때에 우리도 죽었더라면 좋을 뻔 하였도다. 너희가 어찌하여 여호와의 회중을 이 광야로 인도하여 우리와 우리 짐승이 다 여기서 죽게 하느냐. 너희가 어찌하여 우리를 애굽에서 나오게 하여 이 나쁜 곳으로 인도하였느냐......”(3~5).
사람이 곤경에 처하여 화가 나면 무슨 말인들 못하겠는가? 그렇지만 아무리 힘든 상황이라도 해야 할 말과 해서는 안될 말을 가릴 줄 알아야 한다. 이것이 성숙함이다. 성숙한 사람은 아무리 궁(窮)해도 상처가 되고, 후회할 말을 하지 않는다. 그런데 이스라엘 백성들은 출애굽이라는 하나님의 역사를 부정하는 비 신앙적이고, 지금까지 여기까지 도우시고 돌보신 하나님의 은혜를 부정하는 배은망덕한 말을 쏟아냈다. 그리고 모든 책임을 모세에게 전가했다. 사실 일이 이렇게 된 것은 모세 때문이 아니다. 그들과 그들의 부모 때문이다. 38년 전, 바로 이곳에서 그들의 부모들이 하나님께 불순종하여 그들의 말대로 ‘파종할 곳도, 무화과도, 포도도, 석류도, 마실 물도 없는’(5) 이 광야를 방황하게 된 것이다(민14:33). 그 부모에 그 자식이란 말이 있듯, 놀라운 것은 그들 역시 그들의 부모들과 똑같은 장소에서 똑같이 하나님과 모세를 대적하고 있다는 사실이다. 자식은 부모의 뒷모습을 보고 자란다고 했다. 그러니 부모에게 보고 들은 대로 그렇게 행동할 수밖에 없는 것이다. 결국 자식의 운명은 부모의 말과 행동에 달린 것이다.
한 번의 실수 때문에
항상 그랬던 것처럼 이때도 모세는 백성들과 맞서지 않고, 그들을 ‘떠나’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곳 회막으로 가서 그 문 앞에 ‘엎드렸다.’ 그랬더니 ‘하나님의 영광이 그에게 나타났다’(6). 이는 문제 해결을 위한 중요한 신앙적 원리다. 문제에 직면했을 때, 먼저 할 일은 그 문제로부터 떠나야 한다. 문제를 바라보지 않고 하나님을 바라보라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의 전으로 달려가서 그 앞에 엎드려야 한다. 문제에 대한 해답을 가지고 계신 하나님께 기도하라는 것이다. 기도를 통하여 하나님께 맡기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문제에 대한 하나님의 응답을 발견하게 된다. 무슨 문제든지 문제가 발생했을 때 그 문제로부터 ①‘떠나서’ 하나님 앞에 ②‘엎드리면’ ③‘하나님의 영광을 보게 된다’. 모세는 이 원리를 잘 알고 있었고, 또한 잘 실천했다. 이것이 모세의 강점이다. 본문에서도 모세는 이 원리에 따라 해결책을 얻었다. 하나님께서 모세에게 말씀하셨다. “지팡이를 가지고 네 형 아론과 함께 회중을 모으고 그들의 목전에서 너희는 반석을 향하여 물을 내라 하라. 네가 그 반석이 물을 내게 하여 회중과 그들의 짐승에게 마시게 할지니라.”(8).
아무튼 여기까지는 아무런 문제가 없었다. 그런데 문제는 이제부터다. 모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아론과 함께 백성을 반석 앞에 모이도록 하였다. 그리고는 백성들을 강하게 질책한(10) 다음 자신이 물을 내겠다며 반석을 지팡이로 두 번 내리쳤다(11). 바로 여기서 하나님의 말씀에 대한 불순종이 일어났다. 하나님은 반석을 향하여 말하라고 했는데 ①백성을 향해 분노가 섞인 질책을 하였고, 반석에게 물을 내라고 명령하라했는데 ②지팡이로 두 번을 내리쳤다. 죄란 ⓐ하라고 한 것을 하지 않는 것, ⓑ하지 말라고 한 것을 한 것, 그리고 ⓒ하되 제대로 하지 않는 것이다. 모세의 경우는 하긴 했는데 제대로 하지 않았다. 이렇게 죄는 불순종을 낳고 불순종은 하나님의 거룩하심을 드러내지 못하게 한다. 바로 이 단 한 번의 실수가 그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왔다. 그토록 소망하였던 가나안 땅을 들어갈 수 없게 된 것이다(12). 죄는 심각하고 중요한 것보다 사소한 것에서 시작된다. 사소한 실수를 통로로 삼아 우리 안에 들어와서 심각하고 치명적인 결과를 초래한다. 이것이 죄의 특징이고, 사단의 전략이다.
그렇다면 백성의 죄에 대해선 그토록 관대하신 하나님께서 모세에겐 이토록 엄격하신 이유가 무엇일까? 두 가지로 생각해 볼 수 있다. 하나는, 끝까지 순종하는 것의 중요성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한 두 번은 누구나 잘할 수 있다. 그렇지만 끝까지 잘하기는 어렵다. 그래서 성경은 끝까지 충성할 것을 요구한다(계2:10). 그리고 끝까지 견디는 사람이 구원을 얻는다 말씀한다(막13:13). 이것이 모세의 실패가 준 교훈이다. 다른 하나는, 구원은 오직 하나님의 은혜의 사건이라는 것이다. 하나님과 대면하여 친구처럼 말한 모세도 실수를 하고, 그 실수 때문에 가나안에 들어갈 수 없다면 도대체 누가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 누구도 자격이 없다. 하물며 실수를 밥 먹듯 하고 있는 이스라엘 백성이 어떻게 그곳에 들어갈 수 있겠는가? 그런데 이 모세에게 입국허락이 거절된 그곳을 이스라엘 백성이 들어가게 되었다. 그러므로 가나안은 자격으로 들어가는 것이 아니라 은혜로 들어가는 것이다. 이것이 모세의 실패가 주는 또 하나의 교훈이다.
분노의 악마성
이와 같이 모세를 불순종으로 이끈 단 한 번의 실수의 배경에는 ‘분노’가 있다. 이스라엘 백성들의 분노와 그 분노에 전염된 모세의 분노다. 시편기자는 거친 환경에 분노하여 불신과 거역의 말을 쏟아내는 배은망덕한 백성들의 태도에 모세 역시 분노하여 ‘망령되이’ 말하였다(시106:32,33)고 했다. 여기서 망령되다는 말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다.’ ‘분별없이 말하다.’는 뜻이다. 모세가 화가 나서 고함을 지르고(“반역한 너희여 들으라.”), 분별없이 말하고(“우리가 너희를 위하여 이 반석에서 물을 내랴!”), 분별없이 행동한 것(“그의 지팡이로 반석을 두 번 치니”)은 모두 분노 때문이다. 그리고 그 분노는 모세의 가나안 꿈을 좌절시키고 말았다.
분노는 이성을 마비시켜 평상시에 하지 않던 행동을 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들이 화를 내면 이성을 잃고 쓸데없는 말과 행동을 하여 위험을 초래하는 것이다. 여기에는 예외가 없다. 모세도 그랬다. 위험을 영어로 ‘danger’라고 한다. 이 단어에서 앞의 ‘d’자를 떼면 분노(anger)가 된다. 그래서 영어권 속담에 ‘위험(danger)에서 한 치 모자란 것이 분노(anger)다.’는 말이 있다. 분노는 우리를 온갖 위험에 빠뜨린다. 우선 분노는 우리 육체를 병들게 한다(두통, 신경통, 고혈압, 우울증, 불면증, 과식증 등). 그리고 사람들과의 관계를 무너지게 한다. 방울뱀은 극도로 화가 나면 제 몸부터 물어뜯는다고 한다. 사람도 마찬가지다. 이렇게 자신을 학대하는 사람은 건강한 관계를 유지할 수 없다. 나아가서 하나님과의 관계에도 치명적인 영향을 미친다. 그래서 어떤 분은 분노를 ‘마귀의 아궁이’(H. 훼얼리), ‘악마의 용광로’(Maxie D. 더남)라고 하였다. 분노의 악마성을 잘 표현해 주는 말들이다. 온유의 사람 모세가 바로 이 분노의 덫에 걸린 것이다. 그것은 반복되는 백성들의 불평과 원망, 불신과 거역, 거기다가 어머니와 같았던 누나 미리암의 죽음(1)이 겹치면서 순간적으로 마음의 쿠션이 얇아져 이렇게 반응을 하게 된 것 같다. 그러므로 마음의 쿠션을 키우는 것이 관건이다.
분노를 다스리는 법
어떤 조사에 보니, 남자는 1주에 6회, 여자는 3회 화를 낸다고 했다. 남자가 여자보다 배나 화를 내고 있는데, 주로 가정에서 낸다고 한다. 그만큼 남자들이 밖에서 스트레스를 많이 받고 있다는 뜻이다. 하지만 심각한 것은 그 분노의 피해자가 자신에게 가장 소중한 사람들이라는 점이다. 나의 분노로 인하여 아내(혹은 남편), 자녀들이 상처를 받는 것이다. 그러니 분노는 반드시 다스려야할 감정이다. 어떻게 다스릴까?
첫째, 분노는 무조건 참는 것보다 적절하게 표현하는 것이 그것을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다. 인제대 서울백병원 우종민 교수는 분노가 치밀어 오를 때 3가지 질문을 한 다음 모두 ‘예’라고 할 수 있으면 분노를 표현하라고 한다. ①‘이 상황이 내 건강과 바꿀 만큼 중요한가?’ ②‘정당하고 옳은가?’ ③‘문제 해결에 효과적인가? 다른 대안은 없는가?’ 이는 분노를 표현하는 방법이지만 결과적으로는 분노를 효과적으로 다스리는 방법이다.
둘째, 분노 후에 일어날 부정적인 결과를 미리 생각해 보는 것이다. 성경은 분노를 다스리지 못할 때 오는 손실을 분명하게 경고하고 있다. “노하는 자는 다툼을 일으키고 성내는 자는 범죄함이 많으니라.”(잠29:22). 화를 내면 다투게 되고(trouble maker), 화를 내면 실수를 하게 된다는 것이다(mistaker). 더욱 심각한 것은 사단에게 통로를 제공하는 것이다(엡4:27). 이런 부정적인 결과를 미리 생각해 보는 것도 분노를 다스리는 좋은 방법이다.
셋째, 초점을 문제가 아니라 하나님께 두는 것이다. 이것은 본문에서 모세가 실패한 원인이다. 그가 하나님께 초점을 두고 있을 때 분노한 백성들을 떠나 하나님 앞에 엎드릴 수 있었고, 문제에 대한 해결책도 얻었다. 그런데 백성들에게 초점을 두게 되자 분노에 사로잡혀서 불순종의 죄를 범하게 되었다. 그렇다. 누구든지 환경을 보고, 사람을 보고, 끝없는 문제를 보면 분노의 포로가 될 수밖에 없다. 그렇지만 주님을 바라보면 나를 분노하게 하는 환경도, 분노하게 하는 사람도, 분노하게 하는 문제도 모두 해결을 받게 된다. 인간은 감정의 동물이기 때문에 분노의 감정을 사로잡힐 수 있다. 성경도 이를 인정한다. 그래서 ‘분을 내어도 죄를 짓지 말며 해가 지도록 분을 품지 말라’(엡4:26)고 했다. 그것이 범죄로 이어지지 않도록 속히 다스리라는 말씀이다. 모쪼록 분노를 잘 다스려서 경건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서도 큰 유익을 얻을 수 있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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