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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모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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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995회 작성일 13-12-01 16: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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뒷모습이 아름다운 사람, ‘모세’

신34:5~12

2013. 12/1. 08:00, 11:00

끝이 좋아야 모두가 좋다.

인간의 뇌가 지각하는 방법을 알아보기 위해 심리실험을 했다. 첫 번째 실험에서는 실험 참가자들에게 4분간 손을 차가운 물속에 담그고 있도록 했다. 두 번째 실험에서는 우선 8분 동안 차가운 물에 손을 담그게 한 다음, 얼어붙은 손을 2분간 미지근한 물에 담그도록 했다. 두 실험을 끝낸 다음 참가자들에게 물었다. ‘다시 실험에 참가한다면 둘 중 어떤 실험에 참가하고 싶은가?’ 그랬더니 대부분의 사람들이 두 번째 실험을 원했다. 차가운 물속에서 경험한 고통의 시간이 두 배나 길었지만 말이다. 기분 좋은 마지막 경험이 고통의 시간을 덮어버린 것이다. 이것을 역으로도 실험해보았다. 결과는 마찬가지였다. 불쾌한 마지막의 경험이 기분 좋은 시간을 압도한 것이다. 결론적으로 인간의 뇌는 그것이 부정적이든 긍정적이든 마지막 경험을 더 강하게 지각한다는 것이다. 그러니 마지막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다. 그래서 끝이 좋으면 다 좋다는 말이 나온 것이다(반대로 끝이 나쁘면 다 나쁘다!).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하여

그러므로 무슨 일이든 마무리가 중요하다. 마무리가 좋아야 한다. 마무리가 잘 된 것이 명품이다. 일류와 이류의 차이는 마지막 마감에 있다. 사람과의 관계도 마무리가 중요하다. 마무리를 잘해야 명품이 된 것처럼 인생도 명품인생이 된다. 신앙생활에서도 명품신앙, 명품신자가 되는 것이다. 마무리를 잘해야 한다. 그래서 요즈음 웰빙(well-being)과 함께 웰다잉(well-dying)이 강조되고 있다. 잘 사는 것도 중요하지만 잘 죽는 것도 중요하다는 것이다. 좋은 마무리를 위해서 늘 기도해야 한다. 제가 아는 어떤 목사님은 기도할 때마다 늘 이렇게 찬양을 드리고 기도를 시작한다.

 

내 일생 소원은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꿈에도 소원이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숨질 때 되도록 늘 찬송하면서

주께로 나가기 원합니다.

 

혹시라도 죽는 순간 정신이 혼미해서 주님을 모른다고 부인하거나 아니면 덕스럽지 못한 말이나 행동으로 주변을 당황스럽게 할까봐 죽는 순간까지 주님을 찬양하게 해달라는 것이다. 찬송하며 주님께 갈 수 있도록 해달라는 것이다. 얼마나 지혜롭고 얼마나 멋진가! 아마도 믿음의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이런 소망이 있을 줄 안다. 이런 아름다운 마무리를 위해 기도하며 준비해야한다. 오늘로 모세에 대한 설교를 마치려고 하는데, 모세는 마무리를 아름답게 잘 한 사람이다. 정말 뒷모습이 아름다운 영적 거인이다.

 

충성스러운 하나님의 종, 모세

 본문은 모세의 생애에 대한 평가다. 이미 민12:3,7~8절에서 하나님께서 말씀하신대로 모세는 하나님과 대면할 만큼 탁월한 영성의 사람이고(10), 하나님께 길이 잘 들여진 하나님께 물 든 충성스러운 일군이었다(11,12). 한 마디로 모세가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일군으로서 아름다운 마무리를 했다는 것이다. 이는 모든 신자가 소망하고 본받아야 할 모습이다. 이것이 신자로서 가장 영광스럽고 아름다운 마무리이기 때문이다(마25:14~30).

 

말씀대로! 끝까지!

우리 인생을 모세처럼 ‘충성스럽게’ 마무리하기 위해선 두 가지가 충족이 되어야 한다. 이것은 충성의 조건이기도 하다. 하나는 말씀대로’다. 하나님이 ‘가라!’ 하면 가고, ‘서라!’ 하면 서는 것이 충성이다. ‘하라!’ 하면 하고, ‘하지 마라!’ 하면 하지 않는 것이 충성이다. ‘가라’고 하셨는데 망설이면서 가지 않거나 다른 곳으로 가는 것. ‘하라’고 하셨는데 하지 않거나 자기 마음대로 하는 것은 충성이 아니다. 이스라엘 첫 번째 왕 사울이 그랬다. 하나님께서 사무엘을 통하여 아말렉과의 전투에서 아말렉의 모든 사람과 그들의 가축까지 진멸하도록 명령하셨다(삼상15:3). 광야생활을 할 때 이스라엘을 공격하여 어려움을 주었던 것에 대한 하나님의 심판이다(출17:8, 삼상15:2). 그런데 사울은 아말렉 왕 아각과 그의 소유 중에서 좋은 것들을 남겨두었다(:9). 명령하신 말씀대로 하지 않은 것이다. 이 때문에 사울은 버림을 받게 되고, 먼 훗날 페르시아 시대 때 이 아말렉 민족의 후손 하만에 의해 유대인(이스라엘 사람)들이 큰 곤경에 빠지게 된다(에스더서 참조).

 

하지만 모세는 가데스에서 예기치 않는 실수(민20:10~13) 때문에 가나안 입국이 좌절되었다. 이 유감스럽고 안타까운 사실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했다. 어찌 모센들 미련이 없었겠는가? 미드라쉬(Midrash/ 랍비들의 성경에 대한 주석과 해석서)에는 모세가 가나안 땅에 들어가게 해달고 515번 기도했다고 나와 있다. 그만큼 가나안을 소망했고, 들어가고 싶었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성경에는 단 한 번 기도한 것으로 나와 있는데, 하나님께서 다시는 이를 위해 기도하지 말라며 거절하셨다(신3:26). 기도는 내 소원(뜻)에서 출발하지만 하나님의 뜻에 내 뜻을 맞추는 것으로 끝을 맺어야 한다. 기도는 하나님의 마음을 자신의 뜻대로 움직이려고 하는 것이 아니라 하나님의 마음을 붙잡는 것이다. 그토록 간절하게 소망한 것이지만 하나님께서 ‘그만’ 하시니까 즉시 그쳤다.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여 충성한 것이다. 이것이 모세가 그의 인생을 하나님의 충성스러운 종으로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던 비결이다.

 

다른 하나는 끝까지’다. 사실 가나안 입국 거절은 모세에게 엄청난 충격이었다. 단 한 번도 자신을 위해서 기도하지 않던 사람이 이 문제로 기도한 것만 보아도 알 수가 있다. 그런데 그토록 그에게 친밀하신 하나님께서 자신을 위해 드린 단 한 번의 요청을 단호하게 거절하셨다. 하나님에 대한, 그리고 자신을 이 지경에 이르게 한 백성들에 대한 모든 정이 다 사라질 법도 한데, 그는 여전히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여 백성들을 섬겼다. 성경이 모세를 ‘충성되다’ ‘온유하다’(하나님께 길이 잘 들여졌다)고 한 것이 바로 이 때문이다. 어떤 경우에도 이렇게 여전한 것이 믿음이고, 또한 충성스러움이고, 온유함이다.

 

본문에 모세의 최후 사역이 나오고 있는데, 그것은 여호수아를 자신의 후계자로 세운 것이다(9). 자신은 사라지지만 하나님의 사역은 계속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이것은 모든 하나님의 사람들이 가져야 할 아름다운 태도다. 어떤 사람은 자신이 없으면 사역도 없다고 생각한다. 그래서 자신이 없는데 일이 잘되는 것을 보고 상처를 받는다. 이런 사람은 다른 사람과 사역을 나눌 수가 없고, 사역을 이어갈 수 있는 후계자를 세울 수도 없다. 그런데 본문에서 모세는 이 부분을 아주 멋지게 실천했다. 하나님께서 ‘이제 여호수아에게 모두 맡기고 너는 내게 와서 쉬어라!’고 하시자 모세는 그렇게 했다. 이는 우리 한국교회에서 평생 아름답게 목회를 했지만 후계문제로 마무리를 잘못해서 비난받는 목회자들과 좋은 대조가 되는 부분이다. 여호수아는 모세의 아들도 친척도 같은 지파의 사람도 아니다. 그저 하나님께서 여호수아를 너의 후계자로 세우라고 하시니까 순종한 것이다. 이렇게 모세는 마지막까지(끝까지) 순종하여 충성한 것이다. 그러니까 하나님이 그의 끝을 아름답게 책임지신 것이다.

 

매일 가나안을 누리고 사는가?

「가나안을 거절당한 모세」라는 동화다. 모세는 터벅터벅 비스가산 꼭대기로 올라갔다. 늘 꿈꾸었던 가나안 땅을 한참 바라보다 힘없이 무릎을 꿇었다. 그 때 하나님께서 그를 찾아오셔서 그의 어깨에 손을 얹고 가만히 물었다.

 

“슬프냐?”

‘아닙니다.’

“섭섭하냐?”

‘아닙니다.’

“괴롭냐?”

‘아닙니다.’

“분하냐?”

‘아닙니다.’

“그러면 왜 그렇게 엎드려 있느냐?”

‘너무 행복해서입니다.’

“행복하다고? 무엇이 행복한데?”

광야에서 하나님과 함께했던 순간순간이 제게는 가나안이었습니다.

 

바로 여기에 모세가 가나안 입국 거절에도 불구하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끝까지 순종하는 충성스러운 사람이 된 비결이 있다. 아름다운 뒷모습을 남기게 된 비결이 있다. 또한 이것이 행복한 신앙생활의 비결이다. 이스라엘 백성들은 가나안을 바라보며 살았지만 모세는 이미 가나안을 누리고 살았다. 때문에 백성들은 광야를 불평과 원망으로 살았고 모세는 은혜와 감사로 살았던 것이다. 여기서 바라보며 사는 사람과 누리며 사는 사람의 차이를 볼 수 있다. 모세 또한 바라보며 살았더라면 가나안 입국거절은 큰 상처가 되고 아픔이 되었을 것이다. 그런데 이미 누리고 있었기 때문에 그는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고, 끝까지 순종하는 충성의 삶을 살 수 있었다. 그래서 자신의 삶을 아름답게 마무리할 수 있었다. 중요한 것은 어디에 있느냐보다 누구와 함께 있느냐다. 어디든지 주님과 함께 하는 곳이 가나안이다. 모세처럼 이것을 누리는 것이 삶의 행복이고, 아름다운 마무리의 비결이다. 무엇보다도 교회에서, 가정에서, 일터에서 가나안을 경험할 수 있기를 바란다. 그래서 행복한 교회생활, 행복한 가정생활, 행복한 직장생활을 누리기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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