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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죽은 사람, ‘바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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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305회 작성일 13-12-08 13:2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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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이 죽은 사람, ‘바로’

출14:1~9

2013. 12/8. 08:00, 11:00

십앙훈(十殃訓)

주(周)나라 무왕(武王)이 강태공(姜太公)에게 사람들 사이에 빈부귀천의 차별이 생기는 것이 하늘의 뜻이냐고 물었다. 그러자 태공이 그 모든 것은 사람이 잘못해서 스스로 부른 것이지 하늘의 뜻이 아니라고 대답했다. 그러면서 열 가지 잘못을 소개하였는데, ‘一錯(일착) 二誤(이오) 三痴(삼치) 四失(사실) 五逆(오역) 六不祥(육불상) 七奴(칠노) 八賤(팔천) 九愚(구우) 十强(십강)’이 그것이다(「明心寶鑑」에서). 이를 어느 분이 운(韻)만 취해서 현대적 의미로 재구성하여 이렇게 설명하였다.

 

자식이 어렸을 때부터 바르게 가르치지 않음이 착(錯)이고, 옳고 그름이 분명함에도 말하지 않음이 오(誤)이고, 심지도 않는 데서 거두려 함이 치(痴)이고, 오락에 빠져 생계를 돌보지 않음이 실(失)이고, 마땅히 존중해야 할 이를 존중하지 않음이 역(逆)이고, 잠간 멈춰 서서 하늘의 뜻을 헤아리지 않음이 불상(不祥)이고, 다 누릴 수도 없는 재물을 쌓기 위해 광분하는 것이 노(奴)이고, 사실을 따져보지도 않고 남의 말을 따르는 것이 천(賤)이고, 자신의 것을 소홀히 하면서 남의 것을 탐내는 것이 우(愚)이고, 잘못을 알면서 뉘우치지 않음이 강(强)이다.

 

이 열 가지를 ‘십앙훈’(十殃訓, ‘삶에 재앙을 부르는 열 가지 교훈’)이라고 한다. 여기서 열 번째 ‘강’(强)을 주목하기 바란다. 강은 ‘잘못을 알면서도 뉘우치지 않는 것’이다. 성경은 이를 ‘강퍅함’(완악함=완고함=목이 곧음)이라고 한다. 본문에 나온 이집트 왕 바로가 그런 사람이다. 하나님은 모세를 통하여 ‘하나님을 섬기도록 이스라엘을 보내라’고 수차례 그를 설득하셨다. 하지만 마음이 강퍅한 그는 하나님의 요구를 계속 거절했다. 그래서 하나님은 유래를 찾을 수 없는 재앙으로 이집트를 심판하셨고, 결국 그는 이 재앙을 다 겪은 후에야 하나님께 항복하고 이스라엘을 내보냈다. 그래서 그와 그의 나라는 만신창이가 되었다. 강태공의 말처럼 그의 강퍅함이 이와 같은 하나님의 심판(재앙)을 부른 것이다. 하나님의 설득에 빨리 항복하면 복이지만 끝까지 거부하면 심판을 피할 수가 없다. 결국 항복하면서도 큰 화를 당하게 된다. 바로는 하나님께 속히 항복하는 것이 얼마나 큰 복인가를 잘 보여주는 반면교사다.

 

기회를 선용하라.

본문 4절(“내가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한즉”)과 8절(“여호와께서 애굽 왕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으므로”) 말씀만 보면 마치 바로의 완악함이 하나님 때문인 것처럼 보인다(운명론적이고 결정론적인 모습). 그런데 하나님이 처음부터 그의 마음을 주관하셔서 완악하게 된 것이 아니다. 출애굽기에는 바로의 ‘완악(강퍅)함’을 나타내는 표현이 19회 나온다. 이 단어의 주어가 ‘누구(무엇)인가?’에 따라 분류해 보면, ①하나님(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만드심/4:41, 7:3, 9:12, 10:1,20,27, 11:10, 14:4,8), ②바로(바로 자신이 자기 마음을 완악하게 함/8:15,32, 9:34, 13:15), ③바로의 마음(기본적인 그의 마음상태를 보여줌/7:13,14,22, 8:19, 9:7,35)이 주어인 경우로 나눌 수 있다. 이 단어가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7:13,14, 그리고 22절에서 주어는 바로의 마음이다. 이는 바로가 어떤 마음을 가진 사람이었는지 보여준다. 그는 하나님이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기 전에 이미 기본적으로 마음이 완악한 사람이었다는 뜻이다.

 

그리고 하나님은 그에게 자신의 완악함을 돌이킬 기회를 여러 번 주셨다. 그것이 곧 10가지 재앙이다. 재앙은 그의 완악한 마음을 돌이키라는 신호이자 기회였다. 만약 이것이 심판이었다면 단 한 번으로 끝내지 10번까지 끌지 않는다. 물론 하나님은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시겠다는 뜻을 처음부터 밝히셨다(4:21, 7:3). 하지만 그의 마음을 그렇게 하기 시작하신 것은 여섯 번째 재앙 이후부터다. 최소한 여섯 번째 재앙까지는 그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지 않으셨다. 그만큼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준 것이다. 그러나 그는 그 모든 기회들을 다 흘려보냈다. 하나님은 아무리 악한 사람도 돌이킬 수 있는 충분한 기회를 주신다. 그래서 그 기회를 잘 선용하여 돌이키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은혜를 베푸시고 회복시키신다. 내가 어떤 사람이고, 지금까지 어떻게 살아왔는지는 중요하지 않다. 단지 주님께서 지금 내게 주신 기회를 어떻게 선용하느냐가 중요하다. 그것이 미래의 나를 결정한다. 그런데 더욱 중요한 것은 그 기회가 항상 있는 것은 아니라는 점이다. 우리가 제한된 공간, 제한된 시간 속에서 살고 있듯 기회 역시 제한적이다.

 

굳은 것은 죽은 것이다.

 무엇이든 굳은 것은 죽은 것이다. 식물도 죽은 것은 딱딱하다. 아무리 따뜻하고 부드러운 사람도 죽으면 차갑게 돌처럼 굳어진다. 바로가 하나님께서 돌이킬 수 있는 기회를 열 번이나 주셨는데도 그것을 선용하지 못한 이유가 여기에 있다. 이미 그의 마음이 죽었기 때문이다. 마음이 죽었기에 책망도, 거듭되는 경고도 무시하고 묵살한 것이다. 오늘 본문 역시 그러한 바로의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내용설명 생략). 그래서 그는 결국 스스로 죽음의 바다로 뛰어든 것이다(15:23). 생각해 보라. 어떤 바보가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을 구원하시기 위해 행하신 기적의 현장으로 그들을 붙잡겠다고 뛰어들겠는가? 오히려 놀랍고 두려워서 혼비백산하여 도망치는 것이 정상 아닐까? 그런데 바로는 그 불구덩이로 뛰어들었다. 이것이 그의 마음이 죽었다는 결정적인 증거다.

 

영어로 완악(강퍅)한 마음을 ‘Hardened heart’라고 한다. 굳어진 마음(心硬化)이라는 뜻이다. 그러니 완악(강퍅)한 마음은 마음이 죽은 것이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기능을 상실하여 아무런 생산성을 기대할 수 없다는 뜻이다. 죽은 나무 가지에서 새싹이 나오고 꽃이 피고 열매를 맺는 것 봤는가? 돌처럼 굳은 땅에서 곡식이나 채소가 자라는 것을 봤는가? 예수님은 씨뿌리는 비유에서(마13:1~9), 복음에 대한 사람들의 반응을 네 종류의 밭으로 설명하셨다. 첫째 길가, 둘째 돌짝, 셋째 가시덤불, 넷째 좋은 땅이다. 그런데 이것은 결국 두 종류다. ‘열매를 맺지 못한 밭’(길가, 돌짝, 가시덤불)과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 밭’(좋은 땅)이다. 그리고 이것을 결정하는 것이 ‘마음’이다. ‘마음이 완악하여 눈으로 보고 귀로 듣고 마음으로 깨닫지 못하기 때문에’ 열매를 맺지 못한 밭이 된 것이다(:15). 그래서 어떤 분은 ‘살인, 간음, 강도, 도적질, 사기 등 여러 가지 죄가 있지만 마지막 날 주님 앞에서 우리의 죄명은 하나다. 그것은 완악함이다.’고 했다. 완악함이란 강태공의 말대로 잘못을 알면서도 뉘우치지 않는 것이다. 죄란 아무리 사소한 것이라도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온다. 반면 어떤 심각한 죄도 회개하면 용서받는다. 그런데 완악함은 그 회개를 차단해 버리기 때문에 이를 마지막 죄명이라고 한 것이다. 완악함은 우리를 치료가 불가능한 구제불능상태에 빠뜨리는 죄악이다. “자주 책망을 받으면서도 목이 곧은 사람은 갑자기 패망을 당하고 피하지 못하리라.”(잠29:1).

 

앞에서 기회에 대해서 말씀을 드렸지만, 사실 바로의 이야기는 마음이 죽은 사람의 특징을 보여주고 있는 것이다. 그리고 마음이 죽은 사람은 아무리 기회가 주어져도 그것을 선용할 수 없다는 것, 즉 하나님의 심판이 필연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 그러므로 중요한 것은 바로처럼 마음이 굳어지지 않도록 관리하고 가꾸는 것이다. 이것이 곧 신앙생활이다. 마음의 밭에 자라나는 잡초를 제거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굳은 덩어리를 부드럽게 깨뜨려서 복음에 수용적인 마음의 밭, 주님의 뜻에 민감한 밭, 책망과 경고에 민감한 밭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 좋은 마음의 밭을 만드는 것이다.

 

마음의 온도를 높여라!

무슨 일이든 갑자기 일어나지 않는다. 반드시 징후가 있다(「하인리히 법칙」1:29:300/ 300번의 징후, 29번의 경고, 1번의 실패). 마음이 굳어지는 것도 마찬가지다. 여기에도 뚜렷한 징후가 있다. 그 중 하나가 마음의 온도다. 건강에 이상이 생기면 손발을 비롯하여 온몸이 차가워지는 것처럼 완악함이 자리를 잡으면 마음의 온도가 뚝 떨어진다. 즉 열정이 식기 시작한다. 기도의 열정, 찬양의 열정, 말씀의 열정, 예배의 열정이 식고, 섬김의 열정이 식는다. 입술에서는 긍정의 말보다 부정의 말들이 더 많이 더 자주 뛰어나오고, 얼굴에는 환한 미소대신 어두운 그림자가 장막처럼 드리우고, 눈에는 눈물이 마르기 시작한다. 이 모두는 마음의 온도와 깊은 관련이 있다. 마음의 온도가 떨어지니까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이것은 곧 마음이 굳어지고(죽어가고) 있다는 증거다.

 

그러므로 마음의 온도를 높여야 하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 마음을 우리 마음대로 할 수 없다. 본문 4절과 8절 말씀처럼 하나님만이 하실 수 있다. 하나님은 바로의 마음까지 다스리시는 분이다(하나님께서 바로의 마음을 완악하게 하셨다는 말씀을 종교사적으로 아주 중요한 의미가 있다. 당시 이집트인의 신앙사상에서는 바로의 마음이 역사와 사회, 문화 등 모든 분야를 통제한다고 생각했다. 그런데 성경은 하나님이 그러한 바로의 마음을 다스리시는 분이시라는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만이 우주를 다스리시는 진정한 신이시라는 증거이자 선언이다). 그래서 선지자 에스겔은 하나님께서 성령을 통하여 굳어진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치료하고 회복하신다고 하였다. “또 새 영을 너희 속에 두고 새 마음을 너희에게 주되 너희 육신에서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줄 것이며.”(겔36:26). 성령을 통하여 굳은 마음을 제거하고 부드러운 마음을 주신다는 것이다. 바로 여기에 굳어가는 마음을 부드러운 마음으로 회복하는 방법, 완악함을 극복하기 위해 마음의 온도를 높이는 비결이 있다. 성령의 도우심이다. 바로 이 성령 하나님이 마음의 밭에 자라나는 잡초를 제거하고, 돌멩이를 골라내고, 굳은 덩어리를 부드럽게 깨뜨려서 복음에 수용적인 마음, 주님의 뜻에 민감한 마음, 책망과 경고에 민감한 마음을 만들어가는 것이다. 그래서 100배 60배 30배의 ‘열매를 맺는’ 삶이 되게 하신다. 우리 마음의 온도를 높여 주님을 위한 열정적인 삶을 살게 하신다. 이 성령 하나님께서 이 시간 우리 마음을 고치고 회복시켜 달라고 결단찬양과 기도를 드리겠습니다. 간절한 마음으로「성령 하나님 나를 만지소서.」라는 찬양을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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