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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입, ‘아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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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381회 작성일 13-12-22 13: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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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세의 입, ‘아론’

출7:1~2

2013. 12/22. 08:00, 11:00

리더를 세운 리더

요즈음 북한정권의 2인자 장성택의 실각과 처형이 세계적으로 화제가 되고 있다. 이 소식을 접하며 2인자의 비애를 느꼈다. 처칠의 말이다. ‘정상에 있을 때는 국가정책에 대해서만 생각하면 된다. 하지만 2인자의 자리에 있을 때는 정책에 대해서 생각하기 전에 먼저 상관이 무슨 생각을 하는지, 그리고 경쟁자가 무슨 생각을 하는지 생각해야 한다.’ 2인자가 얼마나 힘들고 피곤한 위치에 있는지를 잘 보여주는 말이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그 2인자가 있기에 1인자도 있는 것이다.

 

세계에서 가장 높은 에베레스트는 수많은 산악인에게 실패를 안겨준 산이다. 전문가들에 의하면 지금까지 약 120여 산악인의 시신이 이 산 어딘가에 묻혀있다고 한다. 여기를 최초로 오른 사람은 에드문드 힐라리(E. Hillary)라는 뉴질랜드사람이다. 1953.5.29.11:30. 지구상에서 가장 높은 이곳이 인간에 의하여 정복되었다. 그 때까지 세계 최고수준의 산악인이 모두 일곱 차례나 실패한 뒤에 이룬 쾌거였기에 세상이 더욱 주목했다. 그런데 이 날 정상에 첫발을 내딛은 사람은 힐라리 한 사람만이 아니었다. 또 한 사람이 있었다. 그런데 세상은 힐라리만 기억할 뿐 그에 대해서는 거의 알지 못한다. 그는 셀파(Sherpa), 즉 산악인의 물건을 나르는 짐꾼, 네팔사람 텐징 노르게이(T. Norgay)다. 산을 아는 사람은 노르게이 없이 힐라리 혼자 에베레스트를 오를 수 없다는 것을 잘 안다. 에베레스트의 지리나 기후를 잘 알고 있는 그가 있었기에 성공할 수 있었다. 그런데도 세상은 힐라리만 기억했다. 이것이 2인자의 자리다. 사실 2인자는 ‘리더를 세운 리더’다. 오늘 함께 생각해보려고 하는 아론이 바로 이런 사람이다. 그는 2인자로서 모세의 입이 되어 그를 돕고, 세운 사람이다.

 

말을 잘한 사람 아론

 로마의 수도 콘스탄티노플의 대주교이고, 그곳에서 가장 큰 성 소피아교회를 담임하였던 요한 크리소스톰이란 교부가 있다. 탁월한 설교자였던 그를 사람들은 ‘금구’(金口)라고 불렀다. 황금의 입을 가진 사람이란 뜻이다. 모세의 형 아론은 구약 성경에 나온 금구이다. 모세는 이스라엘을 이집트에서 구하라는 하나님의 말씀에 여러 핑계를 말하면서 거절하였다(출4:). 마지막에는 자신은 “입이 뻣뻣하고 혀가 둔한 자”(:10)라 말을 잘하지 못하니 감당할 수 없다고 핑계를 댔다. 그러자 하나님께서 노하시며, “레위 사람 네 형 아론이 있지 아니하냐. 그가 말 잘하는 것을 내가 아노라.”(:14)고 하셨다. 그러면서, “그가 너를 대신하여 백성들에게 말할 것이니 그는 네 입을 대신할 것이요.”(:16)라고 말씀하셨다. 여기서 아론의 이름이 처음 등장한다. 그런데 그는 하나님께서도 인정하실 만큼 말을 잘하는 사람이다. 그래서 그는 말에 능(能)하지 못한 모세를 위해서 그의 대언자(代言者)로 세움을 받았고(1), 이렇게 모세를 도우므로 하나님의 구원의 역사에 참여하여 이스라엘 역사의 태동기에 걸출한 역할을 감당하였다.

 

저는 개인적으로 모세의 심정이 충분히 이해가 되고, 말 잘하는 아론이 정말 부럽다. 말의 힘은 막강하다. 그러니 말을 잘하는 사람은 막강한 힘을 갖고 있는 셈이다. 고려 성종(成宗) 12년(993년), 거란의 소손녕이 8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입했다. 고려로서는 거란의 대군을 막을 힘이 없었다. 그래서 조정에서는 북방의 국경지대를 양보하고 거란과 화친을 맺자고 했다. 이 때 서희(徐熙)가 적진으로 가서 소손녕과 담판을 하여 거란의 대군을 물러가게 했다. 이는 우리 역사에서 말의 힘을 보여주는 좋은 사례다. 또한 말은 사람을 평가하는 중요한 기준이다. 말을 조리 있게 잘하면 ‘괜찮다. 똑똑하다’는 평가를 받고, 호감을 사기도 한다. 반면 말을 잘못하면 무시를 당하고, 호감을 잃게 된다. 본래 그런 사람이 아닌데 말 때문에 피해를 보는 경우가 종종 있다. 그런데 아론은 이 말에 있어서 특별한 재능을 가지고 있었다. 그래서 하나님은 이런 특별한 재능을 가진 그를 모세의 입이 되게 하셨다. 모세의 대언자로 삼으신 것이다. 말로서 사람을 낙심하게 하고, 무너지게 하고, 상처를 주는 사람이 많은데, 아론은 말로 사람을 섬기고, 말로 리더를 세우는 사람이었다.

 

대언자의 대언하는 사람의 얼굴이고 분신이다.

누군가의 대언자가 된다는 것은 중요하지만 아주 힘든 일이다. 대통령 방미순방(訪美巡訪) 중에 성추문으로 대통령은 물론 국가에까지 국제적 망신을 주고 낙마한 전 청와대 대변인이 청와대 대변인에 대하여 이렇게 말했다. ‘대통령과 정권의 수준을 압축적으로 보여주는 얼굴이고, 분신이다.’ 대언자는 대언하는 사람이나 단체의 수준을 보여준다는 것이다. 그의 얼굴이고, 분신이기 때문이다. 그 대변인은 자신의 말을 스스로 멋지게(?) 증명해 보이고 물러났다. 아무튼 대언자의 막중한 사명과 함께 무거운 책임감을 보여주는 말이다.

 

누군가 혹은 어떤 단체의 대언자가 된다는 것은 그의 말이 곧 그가 대언하고 있는 사람이나 단체의 말이다. 그는 그 사람이나 그 단체를 대신해서 말하는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그는 자신의 생각이나 말, 판단을 보태지 않고 대언하고 있는 사람의 말을 정확하게, 객관적으로 전해야 한다. 이것이 대언자의 사명이다. 그리고 그의 실수는 그가 대언하고 있는 사람과 단체에게 치명적인 결과를 가져다준다. 그가 대언하는 사람의 수준을 보여주는 얼굴이자 분신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언자의 책임이다. 그러므로 대언자는 막중한 사명의식과 무거운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야 한다. 그렇지 않으면 자신의 본분을 망각하여 대언하는 사람이나 단체에 치명적인 영향을 주게 된다. 아론은 대언자의 사명과 책임을 훌륭하게 실천한 좋은 대언자였다. 그래서 모세로 하여금 하나님께서 주신 사명을 잘 감당하도록 도왔다. 이렇게 다른 사람을 잘되게 하는 사람은 자신도 잘되게 된다.

 

그림자 인생

흔히 대언자를 대언하는 사람이나 단체의 ‘입’이라고 말한다. 즉 대통령 대변인은 대통령의 입이고, 기업총수 대변인은 기업총수의 입이고, 정당 대변인은 정당의 입이다. 그래서 모세의 대언자 아론을 ‘모세의 입’이라고 한 것이다. 입이 몸의 일부분인 것처럼 대언자는 대언하는 사람의 분신과 같은 사람이다. 그래서 모세가 가는 곳엔 아론도 가고, 모세가 있는 곳엔 아론도 있었다. 모세가 백성의 대표를 만났을 때 그곳에 아론도 함께 있었고, 모세가 이집트 왕 바로를 만나러 이집트 왕궁에 갔을 때 아론도 그곳에 함께 갔다. 그리고 모세의 말을 아론이 대신해서 백성들에게, 바로에게 전했다. 그가 모세의 대언자였기 때문이다. 대언자는 대언하는 사람과 항상 동행해야 한다. 이것이 대언자의 삶이고, 좋은 대언자가 되는 조건이다. 한마디로 대언자의 삶은 ‘그림자 인생’이다. 여기서 그림자 인생이란 그림자처럼 자신이 대언하는 사람과 항상 함께 해야 한다는 것과 함께, 그림자처럼 철저하게 자기를 부정하고 자기를 비워야한다는 의미다. 나는 없고 ‘그’로 사는 것이 그림자 인생이다. 때문에 자기 생각이나 뜻, 주장을 꺾고 대언하는 사람에게 올인(all-in)이 가능해 지는 것이다.

 

우리는 대언자로 부름 받았다.

모세가 하나님의 대언자이고, 아론이 모세의 대언자였던 것처럼 우리 역시 대언자이다. 이 시대와 이 시대를 살고 있는 사람들을 위해 주님의 대언자, 복음의 대언자로 부름 받은 사람들이 우리다. 이는 우리의 사명이 얼마나 막중하고, 또한 책임이 무거운지를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이는 우리의 말이 곧 주님의 말씀이 되고, 복음의 말씀이 되어야 한다는 뜻이다. 동시에 우리가 주님의 얼굴이고 분신, 곧 작은 예수라는 것이다. 우리의 말을 통하여 주님의 말씀이 들려지고, 우리의 삶을 통하여 주님이 드러나고, 주님을 보여줘야 한다는 것이다. 우리는 주님의 대언자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대언자의 삶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삶이 가능할까? 그러기 위해선 주님의 그림자가 되어야 한다. 철저한 그림자 인생이 되어야 한다. 그림자처럼 항상 주님과 함께 하고, 그림자처럼 철저하게 자신을 부정하고 자기를 비워야 한다. 나는 없고 ‘주님’으로만 살아야 한다. 이런 삶을 바울은 이렇게 고백했다.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 십자가에 못 박혔나니 그런즉 이제는 내가 사는 것이 아니요 오직 내 안에 그리스도께서 사시는 것이라. 이제 내가 육체 가운데 사는 것은 나를 사랑하사 나를 위하여 자기 자신을 버리신 하나님의 아들을 믿는 믿음 안에서 사는 것이라.”(갈2:20).

 

다같이 결단찬양 ‘내가 그리스도와 함께’를 드리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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