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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함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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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837회 작성일 14-01-19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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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랬으면 좋겠습니다. ‘더불어 함께’

막2:1~12

2014. 1/19. 08:00, 11:00

우분투(Ubuntu) 정신

 아프리카 부족을 연구 중이던 어느 인류학자가 한 부족 아이들을 모아놓고 게임을 제안했다. 나무 옆에 달콤한 과일들로 가득 찬 바구니를 놓아두고 가장 먼저 바구니까지 뛰어간 사람에게 과일을 모두 주겠다고 했다. 그런데 아이들은 마치 미리 약속이라도 한 듯 서로 손을 잡고 함께 달리기 시작했고, 과일바구니에 다다르자 모두 함께 둘러앉아 즐겁게 과일을 나눠먹었다. 이런 의외의 반응에 놀란 인류학자가 그들에게 물었다. ‘일등에게 몽땅 주려했는데, 왜 손을 잡고 함께 달렸지?’ 그러자 아이들이 입을 모아 ‘우분투’(Ubuntu)라고 했다. 그리고 한 아이가 이렇게 덧붙였다. ‘나머지 다른 친구들이 다 슬픈데 어떻게 나만 기분 좋을 수 있나요!

 

우분투는 남아프리카의 반투어(Bantu language)에 속하는 말이다. 코사족과 줄루족 등 여러 부족들이 사용하는 인사말이라고 한다. ‘당신이 있기에 내가 있습니다!’ 라는 뜻이다. 이들 부족은 만날 때마다 우분투하고 인사를 한다. 이는 타인중심의 태도로, 한 마디로 ‘더불어 함께 하는 정신’이다. 잘 아는 대로 남아프리카는 인종차별이 가장 심한 지역이었다. 그래서 많은 흑인들이 이 때문에 고통을 당했다. 그런데 그토록 견고하던 이 차별정책이 1994년에 무너졌다. 사람들은 그 일을 가능하게 했던 밑바탕에 ‘우분투 정신’이 있었기 때문이라고 한다. 이 정신으로 흑인들은 자신들을 차별한 백인들의 마음을 움직였다고 한다.

 

함께 한다는 것

도종환 시인의 시 「그랬으면 좋겠습니다.」 셋째 연은 ‘더불어 함께’ 하는 삶을 잘 보여주고 있다.

 

물이 많아서 산 그림자를 길게 안고 있고

산이 높아서 물을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듯이

그렇게 함께 있으면 좋겠습니다.

 

물과 산이 함께 하면서, 물은 산 그림자를 길게 안아주고, 산은 물을 깊고 푸르게 만들어 주는 것처럼 우리도 서로에게 좋은 영향을 주는 사이로 함께 있으면 좋겠다는 뜻이다. 어느 TV에 나온 모금융기관의 광고에서 ‘세상을 따뜻하게 만드는 두 글자, 같이의 힘을 믿습니다.’ 라는 문구가 기억난다. ‘같이’를 헬라어로 ‘쉰’(σιν)이라고 하는데, 쉰의 의미는 ‘함께’로, ‘어깨를 나란히 하다.’는 뜻이다. 어깨를 나란히 한다는 것은 서로가 서로에게 맞춘다는 것이다. 마음을 맞추고, 뜻을 맞추고, 입장을 맞추고, 상황(환경)을 맞추고, 습관이나 생활태도를 맞추는 것이다. 어떤 사람은 ‘함께 한다는 것은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이 아니라 같이 비를 맞는 것이다.’고 말했다. 비를 맞고 있는 사람에게 우산을 씌워주는 것은 그 사람에게 우산이 없다는 것을 확인시켜주거나 우산도 챙기지 못한 것에 대한 자책을 갖게 하는 행위가 될 수 있다. 때문에 자기에게 있는 우산을 버리고 비를 맞는 사람과 함께 비를 맞는 것이다. 단순히 같이 있다고 해서 함께 하는 것이 아니다. 철저하게 그 사람의 입장, 상황이 되는 것이다. 이렇게 서로 함께 할 때 유익한 일들이 일어난다. 헬라어로 유익을 ‘쉼페로’(συμφερω)라고 한다. ‘함께 가져오다.’ ‘함께 기여하다.’는 뜻이다. 유익이란 혼자가 아니라 누군가와 함께 할 때 생긴다는 뜻이다. 함께 할 때 너로 인해 내가 빛나고, 서로가 거울이 되어 같이 성장하게 된다. 산은 물이 있어 더욱 푸르고, 물은 산이 있어 맑고 깊다. 또한 당사자를 넘어서 ‘널리 이롭게 하는’ 일이 일어나게 된다.

 

함께 함의 기적

본문에 나온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함께 한다는 의미를 제대로 실천한 사람들이다. 본문은 함께 함의 기적을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 사건은 예수님의 도시라 불리는, 주님의 갈릴리선교본부로서 공생애 활동의 중심도시였던 가버나움에서 있었다. 주님이 어느 집에서 계실 때, 사람들이 중풍병자를 침상에 싣고 주님께 왔다. 그런데 빈틈이 없을 만큼 모여든 사람들 때문에 그들은 주님께 갈 수가 없었다. 그러자 지붕 위로 올라가 주님이 계신 자리 위의 지붕을 벗기고 구멍을 내어 병자를 뉘인 침상을 달아 내렸다. 당시 갈릴리 지역의 집들은 그 지역이 현무암지대여서 그 돌로 집을 짓고 갈대나 종려나무 가지로 지붕을 덮는 형태였다. 때문에 본문의 사건이 가능했다. 이렇게 병든 친구를 위해 헌신하는 친구들의 놀랍고도 감동적인 모습에 주님께서도 즉각 반응을 보여주셨다. 그래서 그의 육체적인 병은 물론 영혼의 병까지 고쳐주셨다. 본문은 다음과 같은 교훈을 우리에게 준다.

 

1. 함께 하면 장애도 넘어설 수 있다.

본문에 나온 이 병자에겐 모든 것이 장애였다. 삶 자체가 장애였다. 병이 심해서 스스로 할 수 있는 일이 아무 것도 없었다. 침상에 누운 채로 사람들에게 들려왔다(3)는 것은 그의 상태가 얼마나 심각한지를 잘 보여준다. 그런데 그 장애를 거뜬히 넘어섰다. 여기서 “그가 일어나 곧 상을 가지고 모든 사람 앞에서 나가거늘”(12) 하고 말씀하신 것은 그가 자신의 장애를 완전히 극복했다는 뜻이다. 어떻게 이런 놀라운 일이 그에게 일어날 수 있었을까? 그것은 함께 해준 친구들이 있어 가능했다. 그들이 있어 주님에 대한 소식을 들을 수 있었고, 그들이 있어 주님 계신 곳까지 갈 수 있었고, 그들이 있어 지붕 위로 올라갈 수 있었고, 그들이 있어 지붕을 뚫고 주님 앞에 이를 수가 있었다. 또한 그들이 있어 주님으로부터 이런 놀라운 치유를 경험하게 되었다. 모두가 함께 해준 친구들 때문이다. 함께 하는 것이 이렇게 놀라운 결과를 가져온 것이다.

 

맹자(孟子)에 ‘이인동심 기리단금’(二人同心 其利斷金)이란 말이 있다. ‘두 사람이 힘을 합치면 쇠도 끊는다.’는 뜻이다. 함께 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말이다. 아무리 힘들고 어려운 일도 함께 하면 넉넉히 이길 수 있다. 서울 천호역에서 20명의 사람이 33톤의 열차를 밀어서 열차와 승강장 사이에 끼인 사람을 구했다. 불가능해 보이는 일도 함께 하면 가능하게 만든다. 이것이 곧 함께 함의 기적이다. 우리 역시 금년 한해 함께 마음을 모으고, 정성을 모으고, 재능을 모으고, 기도를 모아서 기적을 낳는 공동체를 만들자.

 

2. 함께 하면 주님을 감동시킨다.

어떤 목사님이 나체족으로부터 설교 부탁을 받았다. 목사님은 불편했지만 그들도 복음을 들어야한다고 생각했기에 말씀을 전하러갔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설교하러간 사이 목사님이 시험이 들지 않도록 간절히 기도했다. 드디어 목사님이 설교를 하고 집에 돌아왔다. 목사님이 오자마자 사모님이 물었다. ‘여보, 말씀을 전하면서 무슨 생각을 했어요?’ 그러자 목사님은 무덤덤한 표정으로 대답했다. ‘글쎄, 옷도 입지 않고 주머니도 없어서 과연 이들은 헌금을 어떻게 할까 생각했지.’라고 대답했다. 사람마다 보는 관점이 다르다. 사모님은 목사님이 벗은 사람들을 보고 시험에 들까 생각했고, 목사님은 벗은 그들을 보고 헌금은 어떻게 할까 생각한 것이다. 각자 자신의 입장에서 보고 생각하는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우리를 보실 때 우리의 무엇을 보실까? 주님은 우리의 ‘믿음’을 보신다. 주님은 우리가 어떤 믿음을 가졌는지를 보시고 실망하기도 하시고, 놀라기도 하시고, 감동을 받기도 하신다. 본문에 나온 중풍병자의 친구들은 주님께 큰 감동을 주었다.

 

본문에 주님께서 이 중풍병자를 치유하신 이유가 나온다. “그들의 믿음을 보시고”(5). 병자의 믿음이 아니라 친구들의 믿음을 보시고 병자를 고쳐주셨다. 친구의 어려움에 함께 하는 믿음, 친구의 고통과 슬픔에 함께 하는 믿음, 친구의 문제를 해결해 주기 위해 함께 헌신하고 희생하는 믿음, 장애물 앞에서도 친구를 위해 포기하지 않고 함께 극복하는 믿음을 보셨다. 주님은 그들의 이런 아름다운 믿음에 감동하셨다. 그래서 당장 중풍병자의 영혼과 육체를 모두 고쳐주셨다. 주님은 우리의 믿음에 감동하신다. 특히 지체들과 함께 하는 믿음에 크게 감동하신다. 주님을 감동시키는 여러분이 되기 바란다. 사소한 일에서라도 더불어 함께 하는 믿음을 보일 때, 그것이 주님께 큰 기쁨이 된다.

 

당신이 있어 내가 있다!

어린 왕자의 작가 생텍쥐페리의 말이다. ‘외로운 것은 사람이 없어서가 아니라 만남이 없어서이고, 만남이 없는 모든 장소가 곧 사막이다. 사막은 도시에도 있다.’고 했다. 어떤 것이 아름답다는 것은 그것을 아름답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고, 어떤 것이 소중한 것은 그것을 소중하게 생각하는 상대가 있기 때문이다. 결국 내가 있는 것은 당신 때문이다. 당신이 함께 있으면 외로운 사막도 낙원이 되고, 소소한 것에서도 아름답고 소중함을 느끼게 된다. 그 당신이 곧 주님이시고, 그 주님께서 피로 사신 지체들이다.

 

주님께서 열두 제자를 부르신 이유는 ‘함께 함’이다. “이에 열둘을 세우셨으니 이는 자기와 함께 있게 하시고”(막3:14). 그래서 주님의 공동체는 항상 주님과 함께 하는 공동체였다. 주님의 몸인 교회 역시 ‘함께 하는 공동체’다. 주님과 함께 하고, 지체들과 함께 하는 공동체다. 인간은 혼자 태어나지만 중풍병자의 친구들이나 지하철을 밀어서 승객을 구한 사람들처럼 함께 살아야 하는 존재다. 나를 필요로 하는 이웃에 대한 무관심은 주님을 외면하는 것이나 마찬가지다. 우리는 예수라는 한 그루 생명나무에서 피어난 잎들이다. 각자는 조금씩 다르지만 전체로는 같은 모양이다. 우리의 삶의 이상과 목표는 주님이시다. 우리 마음의 첫째 자리에 모셔야 할 분도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이 주님을 첫째 자리에 모시고 생활하는 신앙 공동체 안에서 서로 사랑하고, 이해하고, 격려하고, 위로하며 ‘더불어 함께’ 살아갈 때 이 땅에서 천국을 미리 맛볼 수 있다. 바로 여기 우리 교회가 천국이 될 것이고, 우리는 그 천국을 누리는 사람들이 될 것이다. 올해 우리 함께 이런 교회를 기대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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