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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 여인, ‘마리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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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664회 작성일 14-02-09 13: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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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아래 여인, ‘마리아’

요12:1~8

2014. 2/9. 08:00, 11:00

영광스러운 이름의 주인공이 되다!

 우리나라나 중국과 같은 유교 문화권에서는 본명(本名)을 부르는 것을 피하는 풍습이 있었다. 그래서 본명 이외에 사람들이 편하게 부를 수 있도록 지은 이름이 있는데, 이를 호(號)라 한다. 우리나라에서는 호를 삼국시대부터 사용하였고, 조선시대에 이르러 일반, 사대부, 학자들에 이르기까지 보편화되었다. 호는 대부분이 살고 있는 곳이나 자신이 지향하는 뜻, 좋아하는 물건을 대상으로 한 경우가 많았고, 자신이 직접 만들기도 하지만 남이 지어주기도 하였다. 호중에 시호(諡號)라는 것이 있는데, 관직에 있던 사람이 죽은 뒤에 그의 행적에 따라 왕(王)으로부터 받은 이름이다(이순신 장군을 충무공이라고 한 것이 그 예다). 그래서 이 시호는 그 사람의 살아온 내력을 잘 보여주는 이름이다.

 

오늘 본문에 마리아라는 한 여인이 나온다. 그녀는 예수님께서 죽은 지 나흘이나 되었는데 다시 살려준 나사로와 예수님의 일행을 극진히 섬긴 마르다의 동생이다. 이들은 예수님께서 세상에 계실 때 큰 위로가 되었던 사람들이다. 그래서 주님께서 베다니에 있는 이들의 가정을 자주 방문하셨다. 성경학자들은 이 마리아에게 아름답고 영광스러운 이름(號)을 붙여주었다. 그것은 ‘발아래’ 여인이라는 명칭이다. 이렇게 부른 이유는 그녀가 주님의 발아래 앉아서 말씀을 듣고(눅10:39), 주님 발아래 엎드려 오빠 나사로의 죽음을 호소하고(요11:32), 값비싼 향유를 주님의 발에 붓고 주님 발아래 엎드려 머리카락을 풀어서 그 발을 닦았기 때문이다. 세 번째 사건이 본문이다.

 

주향한 사랑의 마음

베다니에 있는 나사로의 집에서 예수님을 위한 잔치가 열렸다(2). 나사로를 죽음에서 다시 살려주신 주님의 은혜에 대한 보은의 잔치이자, 나사로가 다시 살아난 것을 축하하는 감사의 잔치였다(1). 그런데 이 잔치석상에서 갑자기 마리아가 값비싼 향유를 담은 옥합을 들고 나오더니 그 옥합을 깨고 그 속에 있던 향유를 주님께 붓기 시작했다(3). 그리고 울면서 주님의 발을 자신의 머리카락으로 닦았다. 그녀의 의외의 행동으로 잔치 분위기가 완전히 바뀌고 말았다. 이 때 그곳에 있던 사람들 중에서, 특히 주님의 제자 가룟 유다가 그녀의 행동을 꾸짖고 나섰다. “이 향유를 어찌하여 삼백 데나리온에 팔아 가난한 자들에게 주지 아니하였느냐.”(5). 이는 가룟 유다뿐만 아니라 주님을 제외한 다른 사람들의 생각도 비슷했던 것 같다. 이 사건을 보면서 사람이 참으로 악하고 못됐다는 것을 실감한다. 저들은 마리아의 아름답고 감동적인 섬김에 힘껏 박수를 쳐주지는 못할망정 비난하고 나섰다. 그렇다. 아무리 선의(善意)로 하고, 또한 믿음으로 해도 거기엔 반드시 비난하는 사람이 있다. 그러니 무슨 일을 하든지 사람들의 지지나 박수를 기대하지 않는 것이 실망하지 않는 비결이다. 그저 주님만 바라보고 주님의 인정과 지지, 평가만 기대해야 한다.

 

그렇지만 마리아는 사람들의 반응에 아랑곳하지 않고 섬기는 일을 계속했다. 그랬더니 ‘향유 냄새가 온 집에 가득했다’(3). 다른 사람의 섬김을 비난해서도 안 되지만 비난한다고 해서 섬김을 포기해서도 안 된다. 이것은 비난한 사람들, 특히 사단이 노리는 점이다. 이들의 목적은 선한 일을 무너뜨리는데 있기 때문이다. 마리아처럼 개의치 않고 묵묵히 하다보면 비난의 악취는 사라지고 향유 냄새로 가득 채워지게 된다. 무엇보다도 자기 영광을 위한 일이 아니라 주님을 사랑해서 하는 일이고, 주님을 위한 일이기 때문이다. 마리아가 주변 사람들의 비난에도 이 일을 멈출 수 없었던 이유도 바로 이 때문이다. 자신의 영혼을 살리신 주님, 자신의 오라비의 생명을 되돌려주신 주님의 사랑에 이렇게라도 보답하고 싶었다. 주님을 향한 그 마음을 누가 막을 수 있겠는가? 무엇으로 멈추게 할 수 있겠는가? 지난주일 유영민 선교사 가족이 드렸던 「그 사랑 얼마나」 찬양이 곧 이와 같은 마리아의 마음이다.

 

다 표현 못해도 나 표현하리라

다 고백 못해도 나 고백하리라

다 알 수 없어도 나 알아 가리라

다 닮지 못해도 나 닮아 가리라

그 사랑 얼마나 아름다운지

그 사랑 얼마나 날 부요케 하는지

그 사랑 얼마나 크고 놀라운지를

그 사랑 얼마나 나를 감격하게 하는지

 

사랑하는 이에게는 낭비가 없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돈을 써본 경험이 있을 것이다. 서로 만난 날수만큼 장미를 선물하는 사람들이 있다. 백일 되었다고 백송이 장미 바구니를 보내고, 천일 되었다고 천송이 장미더미를 선물하는 사람이 있다. 당사자가 아닌 입장에선 미친 짓처럼 보일 수 있다. 그러나 당사자는 그것도 부족하다고 생각한다. 주고도 늘 허기를 느끼는 것이 사랑의 특징이기 때문이다. 사랑에는 낭비본능이 있다 사랑하는 사람을 위해 시간을 낭비하고, 생각을 낭비하고, 물질을 낭비한다. 아니, 존재 자체를 낭비한다. 낭비할 수 없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사랑은 사랑 외에는 아무것도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마리아의 심정이 그랬다. 누가 뭐라 해도 상관이 없었다. 낭비라 해도, 제정신이 아니라 해도 상관이 없었다. 내 영혼을 살리신 주님, 내 오라비의 생명을 되돌려주신 주님, 이 주님을 향한 일편단심 그것은 사랑이었다.

 

물론 가룟 유다의 관점에서 마리아의 행동은 엄청난 낭비였다. 삼백 데나리온은 당시 노동자 1년 품삯에 해당되는 큰 돈이다. 올해 우리나라 국민소득 2만 4천 달러(약 2천 600만원)니까 마리아가 부은 향유는 우리나라 돈으로 약 2천 600만원에 맞먹는 것이다. 이 정도 향수면 백화점에서도 쉽게 구입할 수 없을 것이다. 그런데 그 값비싼 것을 주님의 발에 부었으니 엄청난 낭비인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주님을 향한 마리아의 마음과 사랑을 표현한 것이다. 아니, 그녀가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크기를 보여준 것이다. 다른 사람들에겐 낭비처럼 보였던 이것이 그녀에겐 아무 것도 아니었다. 그래서 값비싼 향유를 부은 것으로도 모자라 울면서 머리카락으로 주님의 발을 닦아준 것이다. 물질뿐만 아니라 자신까지 주님께 드린 것이다. 자기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이 그 만큼 크다는 고백이다. 이것이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깨달은 사람과 그렇지 못한 사람의 차이다.

 

Jesus All

또한 이것은 마리아가 주님을 얼마나 소중하게 여기고 있는가를 보여준다. 사람은 언제 가장 행복한지 아는가? 누가 가장 고마운지 아는가?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받을 때다. 자신의 존재가치를 인정해주는 사람이다. 마리아의 행동은 그 무엇도 주님의 발에 놓기에 아깝지 않다는 표현이자, 선언이다. 주님이 자기 생애 최고의 가치, 전부라는 고백이다. 그래서 아낌없는 헌신, 아낌없는 희생, 아낌없는 섬김이 가능했던 것이다. 주님께서 마리아의 행동에 감동하시면서 복음과 함께 그녀의 삶이 영원히 빛나리라(막14:9)고 축복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주님 생애에 이런 환대는 마리아가 처음이다. 이것이 곧 주님을 섬기는 예배의 정신이고, 예배자의 태도이다.

 

여기서 논의를 약간 발전시켜 헌금에 대한 이야기를 하고자 한다. 헌금을 드리는 기본원칙은 크게 두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고후9:). 하나는 ‘형편대로’(①재정적인 가능성 ②믿음의 분량) 드리는 것이고(➠십일조는 이러한 재정적인 형편을 고려한 제도임), 다른 하나는 ‘원하는바’(①억지나 인색함이 없이 ②기꺼이 자발적)에 따라서 정성스럽게 준비하여 드리는 것이다. 그런데 이 헌금은 마리아가 모범을 보인 것처럼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표현이다. 즉 나에게 베풀어주신 주님의 은혜와 사랑에 대한 감사의 크기를 표현한 것이다. 우리의 물질적 헌신은 감사의 크기를 넘어설 수 없고, 물질적인 헌신으로 감사의 크기를 가늠할 수 있다. 또한 헌금은 나에게 있어서 주님의 존재가치를 외적으로 표현하는 것이다. 주님이 나에게 있어서 얼마나 소중하고 가치 있는 분인가를 표현하는 척도다. 그래서 헌금을 믿음의 표현이라고 한 것이다. 이런 점에서 마리아는 헌금을 드리는 기본원칙과 의미, 그리고 헌금을 드리는 사람의 태도를 잘 보여주고 있다. 우리 모두 마리아처럼 주님의 은혜와 사랑을 크게 깨닫고, 무엇을 드려도 아깝지 않는 소중한 분으로 주님을 인정하고, 그리고 그것을 당당하게 표현하는 믿음을 가질 수 있기를 바란다. 이런 사람들이 복음과 함께 빛나는 삶을 보장받게 된다.

 

순종이 능력이다.

패션잡지 에스콰이어 편집자 제이콥스(A.J.Jacobs)는 남다른 실험정신을 가진 사람이라고 한다. 그가 「미친 척하고 성경말씀대로 살아본 1년」이란 책을 썼다. 그는 성경을 읽어가며 700여개의 계명을 정리하여 1년 동안 그 계명대로 실행하여 보았다. 그것은 말씀의 영향력을 알아보기 위해서였다. 그는 2005년 9월 1일 첫날. 무심결에 아내의 대학 티셔츠를 입으려다 “남자가 여자 옷을 입어선 안 된다.”는 구절이 떠올라 멈췄고, 동네 문구점 계산대 앞에서 꾸물대는 여성 때문에 짜증이 났지만 “노하기를 더디 하라.”는 말씀을 기억하며 참았다. 그는 체험 62일째 70넘은 노인과 시비가 붙었고, ‘내가 간음했다. 어쩔래!’ 하는 그 노인 가슴팍에 계명대로 돌을 던졌다. 식당에서 가족과 식사하고 나오다가 아내의 동창을 만났는데, 그녀가 그의 아내에게 ‘조만간 또 보자.’고 했다. 생각해보니 얼마 후에 다시 만날 수가 없을 것 같았다. 그것이 정직한 마음이었다. 그래서 “거짓말 하지 말라.”는 말씀에 따라 아내의 동창에게 솔직하게 말했다. ‘그럴 것 같지가 않습니다, 그러니 약속하지 말고 그냥 헤어집시다.’ 그리고 아내에게 핀잔을 들었다. 그렇게 1년 동안 미친 척하고 말씀대로 실행해 보았다. 그리고 1년 후에 얻은 것을 정리해 보았다. 기도하면서 위로받게 된 것, 자신이 얼마나 무능하고 흠이 많은 사람인가를 절감한 것, 성경에서 안식을 찾고 기쁨을 누리게 된 것, 그리고 한 가지 부작용도 느끼게 되었다. 그것은 너무 자주 하찮은 것에도 감사하는 부작용이다. 매일 무탈하게 해준 수천가지의 사소한 일에 감사하다보니 결국 감사에 중독이 되었다는 것이다.

 

여러분은 제이콥스의 이 이야기를 듣고 어떤 생각이 드는가? 저는 ‘나도 이렇게 한 번 실천해 보리라’는 생각보다는 솔직히 ‘참 별난 사람이네!’ 하는 생각이 들었다. 실은 별난 것이 아니라 당연한 것인데 말이다. 그러니 내 삶이 말씀에서 얼마나 멀리 와있는지, 말씀을 실천하고자 하는 의지가 얼마나 요원한지를 알 수가 있다. 여러분, 우리 역시 금년 1년 ‘미친 척하고’ 주님의 말씀대로 순종해 보자! 특히 마리아처럼 주님으로부터 받은 은혜와 사랑을 표현하고, 내게 있어서 주님이 얼마나 소중한 존재인지를 보여줄 수 있기를 바란다. 그러면 마리아처럼 우리도 주님의 복음과 함께 빛나는 인생이 될 것이다. 교회사가 라투렛은 교회역사를 연구하면서 중요한 결론을 얻었다. ‘교회를 지켜온 사람들, 그들은 신학자도 정치가도 아니다. 부유한 사업가도 아니다. 심지어 목회자도 아니다. 이름 없이 빛도 없이 주의 제단에 사랑을 바친 수없이 많은 성도들, 바로 그들이 교회의 주인이었다.’ 다른 말로 표현하면 마리아와 같은 사람, 그들이 예수 그리스도의 교회를 지켜온 주역이라는 뜻이다. 오늘의 교회를 지키는 사람들도 이런 마리아의 영성을 지닌 성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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