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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섬기다가 죽은 사람, ‘나답과 아비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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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19회 작성일 14-02-16 13:4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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잘못 섬기다가 죽은 사람, ‘나답과 아비후’

레10:1~7

2014. 2/16. 08:00, 11:00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Smile-mask Syndrome)

 요즈음 백화점, 상가, 식당, 주유소 등 어디를 가나 과도하다 싶을 정도로 고객에게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고 머리를 숙이며 섬기는 자세를 취한다. 어쨌든 섬기는 이런 사회적 분위기는 아름다운 일이라 생각한다. 그런데 이해관계가 없는데도 이렇게 섬기는 분위기가 있을지에 대해선 회의적이다. 저는 이런 현상이 섬김의 문화’보다는 ‘군림의 문화’를 역설적으로 보여주는 것이라 생각한다. 사람들 마음속에 있는 군림하고 싶은 심리를 상업적으로 이용하고 있는 것이다. 즉 고객을 섬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기에 전략적으로 섬기는 것이다. 이처럼 지나치게 고객을 섬겨야만 살아남을 수 있는 문화라면 그 이면에는 그만큼 군림하고자 하는 천박한 ‘욕구’가 지배하고 있다는 뜻이다. 자신의 존재감을 돈으로 사고, 허영심으로 자기만족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그만큼 많다는 것이다. 바로 이런 현실을 잘 반영하는 것이 ‘스마일 마스크 증후군’(가면성 우울증)이다. 겉으로 얼굴은 웃고 있지만 속으로 마음은 울고 있는 심리상태를 말한다. 주로 서비스 업종에서 종사하는 감정노동자에게서 흔히 나타나는 병증이다. 마음과는 상관없이 그저 강요에 의해 억지로 하다 보니 이런 현상이 나타나게 된 것이다.

 

섬김이 얼마나 아름답고 복된 일인가? 친절하고 상냥하게 웃는 것이 사람들을 행복하게 해주고 얼마나 자신의 건강에 좋다고 하는가? 그런데 이기적인 목적으로 이용하는 사람들 때문에, 그래서 억지로 섬기고 억지로 친절하고 억지로 상냥하게 웃다보니 섬기는 사람들에게 섬김이 복(福)이 아니라 화가 되고, 웃는 사람들에게 웃음이 복이 아니라 독이 된 것이다. 본질을 벗어나면 아무리 아름다운 것도 추하게 되고, 복된 것도 저주가 된다. 거룩한 것도 속된 것이 되고, 영광스러운 것도 부끄러운 것이 되고 만다. 오늘 본문의 사건이 이를 잘 보여준다. 제사장이라는 영광스러운 직책이 저주의 통로가 되고 사망의 돌이 된 사건이다.

 

죽임을 당한 제사장

이스라엘 초대 대제사장 아론에겐 4명의 아들이 있었다. 본문에 나온 나답과 아비후, 그리고 엘르아살과 이다말이 그들이다(민3:2). 이들은 모두 이스라엘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는 제사장들이다. 제사장의 주요임무는 ‘속죄와 중보’다. 제사장은 이 속죄를 위해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께 제사를 드렸다. 이것이 제사장의 가장 중요한 첫 번째 임무다. 둘째는 성소에 있는 촛대의 불을 아침저녁으로 돌보며, 일주일마다 떡상의 떡을 진설하는 것이다. 그리고 셋째는 분향단에 향을 사르는 일이다. 이것이 중보의 임무다. 그런데 여기에 조건이 있다. 하나님께서 정하신 번제단의 불만 사용해야 한다. 하나님이 주신 불이기 때문이다(레9:24). 그래서 제사장에게는 향로가 있고, 그 향로에 번제단의 불을 담아가지고 성소로 들어가 분향단에서 향을 그 불로 살랐던 것이다. 그러나 나답과 아비후는 각기 향로를 가져다가 여호와의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여호와 앞에 분향하였다(1). 그리고 그 결과는 참담했다. “불이 여호와 앞에서 나와 그들을 삼키매 그들이 여호와 앞에서 죽은지라.”(2).

 

이것은 지상에서 가장 거룩한 장소인 성소 안에서 일어난 아주 끔찍한 사건이다. 그것도 가장 거룩한 직책인 제사장직을 수행하는 중에 발생했다. 이는 아론과 그의 가족은 물론 이스라엘 공동체 전체에게 실로 충격이었다. 거룩하신 하나님을 가까이서 섬기는 것은 그 무엇과 비교할 수 없는 특권이고 영광이다. 하지만 여기엔 목숨을 걸어야하는 위험도 있다는 점을 보여준 것이다. 그리고 나답과 아비후의 시신을 처리할 때 하나님은 아론의 접근을 금했고(4), 그들을 위해 울지도 못하도록 하셨다(6). 비록 하나님의 심판으로 죽긴 했으나 그래도 자식인데, 그 자식의 장례에 참석도 못하고 울지도 못하도록 하신 것이다. 이것은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 일하는 사람은 사사로운 정에 매어서는 안된다는 교훈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이런 끔찍한 사건이 가장 거룩한 장소에서, 영광스러운 직분을 맡은 사람들에게서, 이 영광스러운 직책을 수행하는 중에 일어나게 된 것일까?

 

깨어라! 근신하라!

8~9장에서 아론과 그의 아들들의 제사장 임직식이 일주일 동안 성대하게 치러졌다. 백성을 대표하여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대신하여 백성에게 복을 선포하는 직분이니 얼마나 소중하고 영광스러운 일인가? 그래서 이런 성대한 예식을 거행하도록 하신 것이다. 그리고 제 8일째에 아론과 그의 아들들에 의해 최초의 공식적인 제사가 거행되었다(9:). 이때부터 율법에 의한 제사가 시작된 것이다. 참으로 감격스러운 순간이다(:24). 하나님께서 불로서 응답하셨고, 백성은 경건한 두려움으로 하나님 앞에 무릎을 꿇었다. 이것이 우리가 회복해야 할 참된 예배의 모습이다. 그런데 호사다마(好事多魔)라 했던가? 본문의 사건은 이 예식 직후에 일어났다. 그리고 이 사건에 이어서 제사장에게 금주(禁酒)에 대한 규례가 주어졌다.

 

여호와께서 아론에게 말씀하여 이르시되 너와 네 자손들이 회막에 들어갈 때에는 포도주나 독주를 마시지 말라. 그리하여 너희의 죽음을 면하라. 이는 너희 대대로 지킬 영영한 규례라.”(8,9).

 

이 규례가 주어진 시기와 함께 주목해야 할 것이 또 하나 있다. 그것은 모든 규례는 모세를 통해서 주어졌는데 이 규례는 모세를 통하지 않고 아론에게 직접 주어졌다는 것이다. 이는 이 규례가 아론과 그의 자손에게만 해당되기 때문이고, 또한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아무튼 이 규례가 나답과 아비후 사건 직후에 주어졌다는 것은 이 사건이 술과 관련이 있다는 것을 시사한다. 그러니까 그들이 다른 불을 드리게 된 이유가 술 때문이라는 것이다. 술에 취하여 분별력이 흐려져서 “여호와께서 명하시지 아니한 다른 불을 담아” 분향을 한 것이다. 그렇다. 무엇인가에 취한 상태에서는, 곧 깨어서 근신하지 않고는 주님을 올바로 섬길 수 없다. 재물 욕심에 취한 엘리사의 종 게하시(왕하5:20~27), 명예에 취한 아나니아와 삽비라 부부를 보라!(행5:1~11). 사단은 먹잇감을 찾고 있는 사자처럼 삼킬 자를 두루 찾고 있다. 깨어있지 않고 조금이라도 틈을 보이면 그곳으로 파고들어 무너뜨리고 만다. 그래서 주님은 제자들에게 “시험에 들지 않게 깨어 기도하라.”(마26:41)고 하셨고, 베드로도 ‘깨어라!’ ‘근신하라!’고 권면했다. 이는 주님을 섬기는 사람들이 마음에 새기고 살아야 할 말씀이다.

 

임의(任意)로

하나님을 섬기는 것과 우상을 섬기는 것에는 결정적인 차이가 있다.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엄격한 규례대로 섬겨야 한다는 것이다. 우상은 사람이 임의로 정한 규정대로 섬기면 되지만 하나님은 하나님께서 정하신 규례대로 섬겨야한다. 하나님께서 성막과 기구들, 그것을 만드는데 필요한 재료와 만드는 방법까지 장황하게 지시하시고(출35:~40:), 각종 제사와 그 제사에 필요한 제물과 그것을 드리는 방법들을 자세하게 지시하신(레1:~7:) 이유가 바로 이것이다. 하나님은 자신의 생각이나 경험에 따라 ‘임의로’ 섬겨서는 안된다는 것이다. 하나님은 하나님이 정하신 곳에서 하나님이 가르쳐주신 방법대로 섬겨야 한다. 하나님은 우리가 하나님의 분부하심에 따라 섬기는 것을 원하시지 자기 자신의 생각에 따라 섬기는 것을 원치 않으신다. 하나님께서 소중하게 여기는 것은 우리가 무엇을 하느냐에 있지 않고, 우리가 얼마나 하나님께 복종하느냐에 있다(삼상15:22). 이것이 하나님을 섬기는 사람이 반드시 배워야 할 중요한 내용이다. 아론의 두 아들, 나답과 아비후가 실패한 또 하나의 원인이 바로 이것이다. 술에 취하여 분별력을 잃은 그들은 ‘하나님께서 명하신 불이 아니라 자기들 마음대로’(임의로) 다른 불을 향로에 담아 하나님 앞에 분향을 하였다.

 

이 시대는 모든 매체를 동원하여 ‘너의 생각대로 하라!’, ‘너의 판단대로 하라!’, ‘너의 느낌대로 하라!’고 부추기고 있다. 성경에 나온 이스라엘의 사사시대처럼 자기 소견에 옳은 대로 살라는 것이다. 이것이 곧 이 시대의 정신이다. 이렇게 자기 소견대로 살라는 말의 배후에는 하나님을 상대화시키고, 하나님의 말씀을 무력화시키려는 의도가 있다. 결국 이것은 인간이 자기를 극대화해서 자의적 숭배에 빠지도록 만든다. 모든 것에 하나님 중심이 아니라 자기중심, 하나님과 하나님의 말씀보다 자기 자신이 기준이 되니까 결국은 자기숭배인 것이다. 그러면 3절 말씀과는 달리 하나님의 거룩은 침범을 당하고 하나님의 영광은 드러나지 않게 된다. 하나님께서 나답과 아비후에게 이 사건을 이토록 엄격하게 다루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들이 하나님의 거룩을 침범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지 못했기 때문이다.

 

내 영광을 나타내리라.

고대의 숙련된 건축가였던 크니이두스는 이집트의 바로를 위해 망대를 지으라는 명을 받았다. 그는 건축을 해나가면서 자신의 이름을 벽의 한 돌 위에 큼지막한 글씨로 새겨 놓았다. 그리고 역청으로 그것을 가린 다음 그 위에다 금으로 바로의 이름을 새겨 넣었다. 그는 그런 식으로 바로의 영광과 명예를 위한 것처럼 가장해 놓았던 것이다. 하지만 그는 오랜 풍상의 세월을 거치면 역청이 떨어져 나가면서 자신의 이름이 드러나 자신의 공로가 미래 세대에 길이 남으리라는 것을 알았던 것이다. 이와 같이 많은 사람들이 하나님과 그분의 몸인 교회의 영광을 구하는 척하지만 실상은 자기를 위하여 하는 경우가 많다.

 

바울은 우리 신자 삶의 궁극적인 목적은 하나님의 영광이라고 했다. 그래서 먹든지 마시든지 무엇을 하든지 다 하나님의 영광을 위하여 하라(고전10:31)고 했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것도 하나님의 영광을 위함이다. 그러므로 우리가 섬기는 삶을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이 드러나도록 하려면 자신의 소견을 버리고 하나님의 말씀대로 순종하는 것이다. 내 생각, 내 뜻, 내 경험, 내 계획을 모두 내려놓고 하나님의 명하시는대로 순종해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늘 깨어서 근신해야 한다. 주님의 말씀에, 주님의 휘파람 소리에 민감해야 한다. 이것이 우리의 섬김을 복이 되게 하고, 하나님의 영광을 드러내는 비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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