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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감동시킨 사람, ‘가나안 여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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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237회 작성일 14-02-23 13: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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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감동시킨 사람, ‘가나안 여인’

마15:21~28

2014. 2/23. 08:00, 11:00

간절함이 답이다.

 어느 날, 소방관과 경찰관이 싸웠다. 그런데 소방관이 경찰관을 이겼다. 경찰관은 옳고 그름을 6하(6H)원칙에 따라 조목조목 따져가면서 싸웠지만 소방관은 물불을 가리지 않고 싸웠다. 그래서 소방이 경찰관을 이겼다. 며칠 후 이 소방관이 이번에는 장님과 싸웠다. 그런데 장님에게는 졌다. 물불을 가리지 않는 소방관도 눈에 보이는 것이 없으니까 막무가내로 덤비는 장님을 당해낼 수가 없었다. 또 얼마 후 이 장님이 노인과 시비가 붙어 싸우게 되었다. 이 싸움에서는 노인이 장님을 이겼다. 노인은 인생을 살만큼 살았으니 아쉬울 것이 없다며 죽기 살기로 싸웠다. 그래서 노인이 이겼다. 여우와 토끼가 달리기를 하면 누가 이길까? 토끼가 이긴다. 그 이유는 여우는 한 끼 식사를 위해서 달리지만 토끼는 목숨을 걸고 달리기 때문이다. 한 끼 식사를 위해 달리는 사람이 자신의 목숨을 걸고 죽기 살기로 달리는 사람을 절대로 이길 수 없다. 이것이 간절함의 차이다.

 

어떤 말을 1만 번 이상 되풀이하면 반드시 그 말이 이뤄진다.’는 인디언 격언이 있다. 이는 단순히 반복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 아니라 열정과 간절함의 중요성을 강조한 것이다. 무엇이든 간절히 바라면 이뤄진다는 것이다. 기적은 저절로 일어나지 않는다. 기적은 간절함이 결집되어 만들어진다. 본문에서 가나안 여인이 이에 좋은 본보기다.

 

꺾이지 않는 간절함

예수님께서 이스라엘 지역을 벗어나 이스라엘 북서쪽 항구도시 두로와 시돈 지역으로 가셨다. 본장 앞부분에서 있었던 유대교권자들(1~11)과의 충돌로 인한 박해를 피해 잠시 그곳을 찾으신 것으로 추정하는 사람들이 있다(막7:24~30 참고). 하지만 그들과 충돌은 늘 있었는데 하필 이 때만 주님께서 피신을 했다는 것은 다소 설득력이 떨어진다. 오히려 구원받아야 할 영혼, 즉 구원을 간절히 소망하는 영혼이 그곳에 있었기에 그 영혼을 구원하시기 위하여 찾아가신 것으로 해석하고 싶다. 인류의 구원을 위해 사람의 몸으로 오신 주님께서 비록 이방인일지라도 주님의 구원을 갈망하는 영혼을 위해 그곳을 찾아가신 것이다.

 

주님께서 그 지역에 도착하셨을 때 마치 그 방문을 미리 알고 손꼽아 기다렸다는 듯이 한 가나안 여인이 주님을 찾아왔다. 남편도 없이 딸과 함께 살고 있는데, 그 딸이 ‘흉악하게’ 귀신이 들렸다(22). 그래서 그녀는 주님께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 나의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22)라고 부르짖으며 도움을 구했다. 그런데 그녀에 대한 주님의 반응은 의외셨다. 그녀의 부르짖음과 제자들의 요청에도 불구하고 주님은 외면’(23)-‘무시’(24)-‘멸시’(26)의 반응을 보였다. 평소 세리와 죄인을 친구로 여기시고, 과부와 고아를 불쌍히 여기시는 주님의 모습과는 전혀 달랐다. 그런데도 이 여인의 부르짖음은 계속되었다. 22,23절의 ‘소리 질러’는 헬라어로 ‘에크라젠’(εκραζεν)인데, 이 동사의 시제는 미완료형이다. 미완료형은 어떤 행위가 계속 진행되고 있는 것을 뜻한다. 이는 그녀가 주님께서 자신의 요구를 외면하고, 무시하고, 자신을 멸시해도 포기하지 않고 계속 간청하였다는 뜻이다. 장애에도 꺾이지 않는 그녀의 간절함을 보여준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이와 같은 그녀의 모습을 통해 모정(母情)의 특별함을 이야기한다. 부모는 자식을 위한 일이라면 어떤 외면도 무시도 멸시도 참는다는 것이다. 틀린 말은 아니다. 하지만 본문은 단순히 모정에 대한 이야기가 아니다. 마태복음의 주제는 ‘제자의 길’(Discipleship)이다. 본문은 주님이 기뻐하시는, 혹은 찾으시는 올바른 신앙인의 모습, 즉 제자의 자세에 대한 말씀이다. 주님은 이 여인처럼 어떤 장애에도 간절함을 포기하지 않는 제자를 찾으시고, 이런 제자를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여러분이 이런 제자, 우리 교회가 이렇게 제자의 길을 실천하는 교회가 되기를 바란다.

 

절박함에서 간절함이 생긴다.

이 여인이 간절하게 주님을 찾고, 주님의 외면과 무시와 멸시에도 불구하고 간절히 주님께 부르짖는 이유가 22절에 나온다. “나의 딸이 흉악하게 귀신 들렸나이다.” 여기서 ‘흉악하게’(κακος)는 ‘위험할 만큼 해로운’이란 뜻으로, 딸의 병세가 매우 심각한 상태를 의미한다. 당시에는 질병의 원인을 귀신의 작용으로 생각하였다. 그래서 ‘흉악하게 귀신 들렸다’고 말한 것이다(막7:26 비교). 제가 어렸을 때도 그랬다. 병이 들면 약방을 찾는 것이 아니라 마을 무당을 찾아가서 조언을 구하고, 간단한 푸닥거리를 하기도 했다. 저의 아버지가 밭일을 하다가 허리병을 얻었다. 어느 날 무당이 와서 아버지를 해가 떠오르는 동쪽으로 향해 무릎을 꿇게 하고 사방으로 물을 뿌리면서 귀신을 쫒는 의식을 하는 것을 봤다. 귀신이 허리를 움켜쥐고 있어서 병이 생긴 것이란 뜻이다. 아무튼 그녀의 딸이 매우 절박한 상황에 놓여있었고, 이 절박함이 그녀로 하여금 주님께 간절히 부르짖게 만든 것이다.

 

단장(斷腸)이란 말이 있다. 창자가 끊어질 것 같은 슬픔을 뜻한 말이다. 전쟁에 나선 한 병사가 원숭이 새끼를 한 마리 붙잡았는데 어미가 백리 길을 울면서 따라오다 죽었다. 이 때 어미 원숭이의 배를 갈라보니 창자가가 갈기갈기 찢어져 있었다. 단장이란 바로 이 고사에서 비롯된 말인데, 부모의 마음을 잘 표현해주는 고사다. 부모에게 자녀의 문제만큼 절박한 것은 없다. 자녀가 위기에 처하면 부모는 창자가 갈기갈기 찢어지는 아픔을 경험하게 된다. 이런 절박함에서 간절함이 나온다. 위기에 처한 자녀를 두고 외면을 당하고 무시를 당하고 멸시를 당했다고 해서 포기할 부모가 어디 있을까? 그것도 그 사람만이 내 자녀의 문제를 해결할 수가 있다면 말이다. 이것이 주님을 따라는 제자의 자세이다. 제자는 심각한 위기에 처한 딸을 둔 이 여인처럼 어떤 장애에도 꺾이지 않고 간절히 주님을 찾고, 간절히 주님을 부르고, 간절히 주님을 따르는 사람이다. 그러기 위해선 절박함이 필요하다.

 

오늘 우리의 문제가 여기에 있다. 절박함이 부족하다. 마치 계시록에 나온 라오디게아 교회처럼 ‘자신의 곤고한 것과 가련한 것과 가난한 것과 눈 먼 것과 벌거벗은 것을 알지 못하고 스스로 부자라 부요하여 부족한 것이 없다.’(계3:17)고 여기고 있다. 그러니 간절함도 부족할 수밖에 없다. 내가 지금 얼마나 절박한 상황인지 알아야 한다. 곤고하고 가련하고 가난하고 눈 멀고 벌거벗은 것을 알아야 한다(이것을 깨닫는 것이 은혜다). 겉으로는 모두 안녕한 것 같다. 하지만 내 영혼, 내 자녀의 영혼, 내 부모의 영혼, 내 남편이나 아내의 영혼은 결코 안녕하지 못하다. 이것을 볼 수 있는 눈이 열리기를 바란다. 그리고 그 절박함을 가지고 주님을 간절히 바라보고, 간절히 찾고, 간절히 부르짖고, 간절히 따르기 바란다.

 

간절함은 믿음의 표현이다.

본문의 절정은 26절과 27절이다.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던짐이 마땅하지 아니하니라.”는 주님의 말씀에 대한 이 여인의 대답이다.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 그녀는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주님의 말씀을 멋진 재치로 받아넘겼다. 이는 자신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한 방편으로 이렇게 말한 것이 아니다. 이것은 그대로 주님에 대한 자신의 겸허한 믿음의 고백이고, 또한 간절함의 표현이다.

 

비록 이방인이지만 그녀는 이미 주님이 어떤 분이신지 정확하게 알고 있었다. “다윗의 자손이여”(22) 라는 호칭이 그 증거다. 이는 주님이 약속된 메시야(그리스도)라는 고백이다. 이는 본장 앞부분에 나온 유대교권자들의 태도와 크게 비교되는 내용이다(그들은 주님을 배척했으나 그녀는 환영했고, 그들은 주님을 비난했으나 그녀는 간구했고, 그들은 주님을 메시야로 인정하지 않았으나 그녀는 고백했다.). 그녀는 메시야이신 주님께 자신은 개와 같은 존재이고,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주워 먹는 개처럼 자신에게도 그런 은혜를 달라고 고백한 것이다. 주님은 간절한 소망을 담은 이 여인의 고백에 무척 감동하셨다. 그러면서 그녀를 크게 칭찬하셨다.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28). 주님을 감동시키고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우리의 믿음이다. 여기서 주님을 감동시킨 그녀의 믿음은, 주님을 그리스도로 고백하는 믿음, 여러 장애에도 꺾이지 않는 믿음, 자신을 개라고해도 개의치 않는 겸허한 믿음, 부스러기와 같은 사소한 은혜도 소중하게 여기고 사모하는 간절한 믿음이다. 그러므로 제자는 이 여인과 같은 믿음을 가져야 한다는 것이다. 이 믿음이 우리를 간절히 주님을 바라보고, 찾고, 부르고, 따르게 만든다. 또한 이 간절함은 역동적인 믿음, 살아 있는 믿음의 표현이다.

 

네 소원대로 되리라!

문제는 실패 그 자체가 아니다. 너무 ‘쉽게’, 그리고 너무 ‘빨리’ 포기하는 것이다. 그것은 간절함이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문제 해결에 대한 절박함이나 해결 받을 수 있다는 믿음이 없는 것이다. ‘去去去中知 行行行裏覺’(거거거중지 행행행리각)이란 말이 있다. 노자의 도덕경에 나온 말이다. ‘가고 가고 또 가다보면 알게 되고, 실천하고 실천하고 또 실천하다보면 깨닫게 된다.’는 뜻이다. 무엇이든 당장에 되지 않더라도 포기하지 않고 간절함을 가지고 묵묵히 실천하다보면 언젠가는 알게 되고, 깨닫게 된다는 의미다.

 

복음서에 많은 치유사건이 나온다. 주님을 통해 치유를 받은 사람들의 공통점이 간절함이다. 자신의 문제를 심각하게 생각하고, 주님만이 그 문제를 해결하실 수 있다는 믿음을 가지고 주님을 간절히 찾았다. 본문의 사건도 그 중에 하나다. 그녀가 자신의 소원(딸의 건강)을 성취할 수 있었던 것은 여러 장애에도 꺾이지 않는 간절함 때문이다. 장애물보다 딸의 건강이 더 절실했고, 주님만이 딸을 건강하게 해주실 것이라는 확신과 믿음, 신뢰가 있었기 때문이다. 오늘 우리에게 요구되는 것 또한 ‘간절함’이다. 어떤 장애물 앞에서도 꺾이지 않는 간절함이다. 이것이 주님을 감동시키는 제자의 길이다. 그리고 삶의 문제를 해결 받는 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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