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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좁은 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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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0,463회 작성일 14-08-03 13: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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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야 할 것, ‘좁은 문’

눅13:22~30

2014. 8/3. 08:00, 11:00

편리주의를 경계하라!

 현대인을 병들게 하는 철학이 세 가지가 있다. 그 첫째가 상대주의, 둘째가 실리주의, 그리고 셋째가 편리주의다. 이 편리주의 철학은 매사 편하고 쉽고 편리하게 살려고 하는 태도이다. 이런 편리주의가 과학의 발전과 기술의 진보를 가져왔다. 대체로 우리를 편리하고 편하게 해주는 문명의 이기(利器)들은 이와 같은 편리주의 산물이다. 이런 면에서 현대문명은 편리주의 꽃이라 할 수 있다. 며칠씩 걸리는 거리도 몇 시간이면 갈 수 있고, 단 하나를 만드는 데도 많은 시간이 걸렸던 것이 짧은 시간에 그것도 대량으로 만들 수 있고, 기다려서 먹어야했던 음식도 몇 분이면 완성이 된다. 많은 부분을 기계가 대신해 주고, 스위치만 누르면 만사 해결이 된다. 이렇게 우리의 삶은 말로 표현할 수 없을 만큼 편하고 편리해졌다. 그리고 우리는 여기에 굉장히 빠른 속도로 길들여져 가고 있다. 하지만 이러한 편리함이 인간과 사회를 병들게 하고 있다. 참고 기다리는 것을 견디지 못하게 하고, 불편하고 힘들고 부담스러운 것을 무척 싫어한다. 그러다보니 소중한 정성, 사랑, 고귀한 인간미를 상실하게 되었다.

 

편리주의가 우리의 생활에 많은 변화를 가져온 것은 분명하다, 하지만 우리의 인격까지 변화시키고 성숙시킬 수는 없다. 인격이란 전기 스위치를 켜면 켜지고 끄면 꺼지는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컴퓨터 화면처럼 누르면 금방 나타났다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인격은 많은 시간이 필요하고, 많은 훈련과 연단이 필요하다. 여기에는 기적이 있을 수 없다. 그저 오랜 시간 동안 많은 훈련과 연단을 통하여 좋은 인격으로 성숙해가는 것이다. 특히 건강한 신앙생활을 위해서 편리주의는 심각한 경계의 대상이다. 편리주의에 익숙해지면 신앙에서도 십자가보다는 편리함을 먼저 생각한다. 십자가 없는 신앙생활, 훈련과정을 무시한 은혜, 희생 없는 사랑, 헌신 없는 예배를 생각한다. 심지어는 ‘무엇을 드릴까?’보다 ‘무엇을 얻을까?’에 더 관심을 가진다. 주님은 모든 것을 십자가에 초점을 맞추셨다. 편리함보다 불편함을 감수하라고 말씀하셨다. 제자가 되려면 ‘자기를 부인하고 자기의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마16:24)고 말씀하셨다. 제자의 길은 쉽고 편한 길이 아니라 값비싼 대가를 지불해야 하는 길이란 뜻이다. 그렇다. 신앙의 길은 편리함과는 거리가 멀다. 오늘 본문도 이것을 강조한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본문에 의미심장한 질문이 나온다. 어떤 사람이 주님께 물었다. “주여 구원을 받는 자가 적으니이까?”(23). 사실 제자들을 비롯하여 주님을 따르고 있는 사람들 대부분이 세속적인 축복을 바라고, 형통을 바라고, 출세를 바라고, 명예를 바라며 주님을 따르고 있다. 그런데 주님의 교훈을 들어보니 자신들의 기대와는 사뭇 달랐다. 주님은 ‘부자가 천국에 들어가기가 약대가 바늘구멍으로 들어가기보다 어렵다.’ ‘자기 십자가를 져야한다.’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이런 질문을 하게 된 것이다. 그러자 주님께서 대답하셨다. 그 대답은 많고 적다는 말씀이 아니었다.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 내가 너희에게 이르노니 들어가지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24)고 하셨다. 이는 현재 주님을 따르는 사람들이 가져야 할 태도에 대한 ‘권면과 경계’의 말씀이다. 즉 구원을 받을 자의 수보다 자신의 신앙을 관리하는 것이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우선 여기서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라!’는 말씀은 신앙의 길이 결코 쉽고 편한 평탄한 길이 아니라는 것이다. ‘좁은 문’이란 단어와 ‘힘쓰라’는 단어가 이를 말해준다. 물론 본문은 좁은 문이 무엇인지 구체적으로 언급하고 있지 않지만 힘쓰라는 단어에 비추어볼 때 그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수 있다. 여기서 ‘힘쓰라’(αγωνιζεσθε)는 단어는 현재 명령형으로 이기기 위해 최선을 다해 ‘싸우라.’, ‘전력을 기울이라.’(make every effort)는 뜻이다. 이 단어는 운동경기에 사용되는 전문용어다. 성경은 신자를 운동선수, 혹은 싸움터에 나간 병사에 비유하고 있다. 그런데 이 단어가 ‘현재 명령형’이다. 이는 지금 영적 경기(주), 영적 전투가 진행 중이라는 것이다. 즉 신앙생활은 ‘경기(주) 중’, 혹은 ‘전투 중’이라는 뜻이다(좁은 문을 통과하고 있는 중/ 배경설명 생략). 이것이 우리의 영적 상황이다. 그러니 신앙의 길이 무척 힘들고 어려운 고난의 길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여기서 승리하기 위해선 힘써야 한다. 잠시도 방심하지 않고 최선을 다해야 하고, 몸부림치며 전력을 기울여야 한다.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주님은 이와 같은 권면과 함께 경고(계)의 말씀을 하셨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 금방 ‘들어가기를 힘쓰라’고 하시고선 ‘힘써도 못 들어가는 사람이 많다’고 하셨다. 언뜻 보면 서로 어긋난 것처럼 보인다. 그런데 두 문장의 시제를 보면 그 뜻이 분명해진다. 전자는 현재 명령형으로 ‘권면’의 뜻이고, 후자는 미래형으로 ‘경고’(계)의 뜻이다. 그렇다면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는 이 말씀은 무엇에 대한 경계(고)인가?

 

1. 기회상실의 비극성

세상에는 돌아오지 않는 것 세 가지가 있다고 한다. 하나는 흘러간 세월이고, 다른 하나는 시위를 떠난 화살, 그리고 마지막은 지나가 버린 기회다.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못하는 자가 많으니라.’는 말씀은 기회상실의 비극을 경고한 것이다. 이어지는 비유에서 그 의미가 더욱 분명하게 드러난다. “집 주인이 일어나 문을 한 번 닫은 후에 너희가 밖에 서서 문을 두드리며 주여 열어 주소서 하면 그가 대답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를 어디에서 온 자인지 알지 못하노라 하리니”(25). 이는 기회가 주어졌을 때 힘써야지 기회가 지난 후에는 아무리 힘써도 소용이 없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무슨 일이든지 때가 있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믿음의 문, 곧 구원의 문은 한 번 닫히면 절대로 열리지 않는다. 아무리 열어달라고 외치고 애원해도 소용없다(노아시대 사람들, 에서). 그러니 열려 있을 때, 기회가 주어졌을 때 들어가기를 힘써야 한다. 사단은 또다시 기회가 있을 것처럼 ‘나중에 하지 뭐!’ 하고 우리를 속인다. 卽是現今 更無時節(즉시현금 갱무시절)이라 했다. ‘지금이 바로 그때이지, 다른 시절이 없다’는 뜻이다. 바로 지금 이 자리에서 최선을 다해야 한다.

 

2. 이름뿐인 신앙의 위험성

어떤 분이 신자의 종류를 다음과 같이 분류해 놓은 것을 보았다. 교회 안에는 신앙생활이 조금만 힘들어도 불평하며 엄살을 부리는 ‘엄살’ 신자, 자기는 하지도 않으면서 다른 사람만 시키는 ‘황제’ 신자, 남이 보는 앞에서만 하는 척 하는 ‘피알’(PR) 신자, 일할 때가 되면 조용히 사라지는 ‘안개’ 신자, 잠깐 얼굴만 내밀고 들어가는 ‘마담’ 신자가 있다고 한다. 우리 교회에는 이런 신자가 한 사람도 없기를 바란다. 이런 신자를 가리켜 한 마디로 ‘나이롱’ 신자라고 한다. 신앙생활을 하고 있으나 무늬만 신자, 이름뿐인 명목상 신자인 것이다. 미국의 종교관련 통계 전문가 조지 버나는 미국 교회에서 ‘나이롱’ 신자의 수가 급증하고 있다고 지적하였다. 이것은 우리 한국교회도 비슷한 상황이라 생각한다. 본문의 비유는 기회상실의 비극성과 함께 이런 이름뿐인 신앙의 위험성을 경고하고 있다.

 

그 때에 너희가 말하되 우리는 주 앞에서 먹고 마셨으며 주는 또한 우리를 길거리에서 가르치셨나이다 하나 그가 너희에게 말하여 이르되 나는 너희가 어디에서 왔는지 알지 못하노라 행악하는 모든 자들아 나를 떠나가라 하리라.”(26,27).

 

그렇다면 왜 구원의 기회를 상실하고, 무늬만 신자, 이름뿐인 신자로 전락하게 되는 것일까?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지 않기 때문이다. 신앙생활을 위해 교회는 다니고, 예배도 드리고, 가끔씩 기도도, 찬양도, 봉사도, 헌신도 하지만 자의적, 편의적, 편리적 태도만 추구하기 때문이다. 나무도 뜨거운 햇빛과 강한 비바람을 맞아야 속이 꽉 찬 좋은 열매를 맺는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그저 쉽고 편하게만 신앙생활을 하려고 하면 결국은 주님께서 알아주시지 않는 이름뿐인 신자가 되고 만다(신앙생활에서 중요한 것은 내가 주님을 아는 것이 아니라 주님이 나를 알아주시는 것이다). 이런 사람은 들어가기를 구하여도 들어갈 수 없다. 천국 창고는 알곡만 들어가고 쭉정이는 들어갈 수 없기 때문이다.

 

브로드웨이(broadway)

뉴욕에 브로드웨이라는 유명한 길이 있다. ‘넓은 길’이란 뜻인데, 그 길이가 200km나 된다. 사람들이 뉴욕을 가면 꼭 가보고 싶어 하는 길이라고 한다. 여기가 이렇게 유명한 것은 볼 것 즐길 것이 수도 없이 많아 사람들의 정신을 홀딱 빼앗기게 만들기 때문이다. 여기에는 유명한 금융가 월스트리트가 있고, 최첨단 패션을 자랑하는 고급 옷을 파는 상점들이 즐비해서 세계의 멋쟁이들이 모여드는 곳이다. 뿐만 아니라 24시간 상영되는 포로노 영화관을 비롯하여 도박장 유흥가 뮤지컬 공연장 등이 즐비하여 사람들에게 매력적인 즐거움을 주는 곳이다. 그러다보니 술과 마약과 도박에 찌든 사람들, 향락에 빠져 허우적대는 사람들이 많은 곳이기도 하다. 그래서 이곳은 또한 범죄가 끊이지 않는 요란하고 시끄러운 곳이다. 그런데 이곳 이름이 ‘브로드웨이’, 곧 넓은 길이라고 지어진 것은 결코 우연이 아니다.

 

신앙생활에도 두 종류의 길이 있다. 그것은 넓고 편하고 편리해서 많은 사람이 찾는 넓은 길과 좁고 험하고 힘들어서 찾는 사람이 적은 좁은 길이다. 그렇지만 그 결과는 전혀 다르다. 넓은 길의 끝은 멸망이고, 좁은 길의 끝은 영생이다. 오늘 주님은 본문을 통해 저와 여러분에게 좁은 문으로 들어가 좁은 길을 걷기를 요구하신다. 이 길이 주님을 따르는 영생의 길이기 때문이다. 이 길은 좁은 문으로 들어가기를 ‘힘쓰는’ 사람만이 갈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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