힘써야 할 것, ‘감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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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2,566회 작성일 14-11-09 13:07본문
힘써야 할 것, ‘감사’
살전5:16~18
2014. 11/9. 08:00, 11:00
박사보다 감사
석사나 박사보다 더 좋은 학위는 ‘밥사’라고 한다. 삭막한 세상에서 따뜻한 밥 한 끼 사는 따뜻하고 넉넉한 마음이 어떤 학위보다 더 중요하다는 뜻이다. 그런데 이 밥사보다 더 좋은 학위가 있다고 한다. 그 학위는 무엇일까? ‘감사’라고 한다. 공부를 잘하고 공부를 많이 해서 석/박사가 되는 것보다 한 끼 밥을 대접할 수 있는 따뜻한 마음을 가진 것이 중요하고, 이런 마음보다 더 중요한 것은 감사할 줄 아는 태도라는 것이다.
공자가 그의 조카 공멸(孔蔑)에게 물었다. ‘직장생활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공멸이 대답했다. ‘얻은 것은 없고 잃은 것만 3가지가 있습니다. ①일이 많아 공부를 할 수 없고, ②봉급이 적어 친척을 돌볼 수 없었고, ③다급한 일 때문에 친구들과 관계가 소홀해졌습니다.’ 공자는 같은 직장을 다니고 있던 복자천(宓子賤)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직장생활에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 복자천이 대답했다.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3가지나 됩니다. ①배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여 학문이 늘었고, ②봉급은 적지만 이를 아껴 친척을 도왔기에 더욱 친근해졌고, ③일이 다급하지만 틈을 내니 친구들과 더욱 가까워졌습니다.’ 같은 공간에서 같은 일을 하고, 같은 공기를 마시고, 같은 밥을 먹고, 같은 시간을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하게 살고, 어떤 사람은 행복하게 산다. 공멸처럼 잃은 것만 생각한 사람에겐 불평과 원망이 늘어나 불행하게 살게 되고, 복자천처럼 얻은 것만 생각한 사람에겐 감사가 늘어나 행복하게 살게 된다. 사람은 어디에 있느냐, 무엇을 하고, 무엇을 먹고, 무엇을 마시냐가 중요한 것이 아니라 어떤 태도로 사느냐가 중요하다.
불평은 불행의 연습이고, 감사는 행복의 연습이다. 불평거리를 찾다보면 어느새 행복이 사라지고, 감사를 찾다보면 어느새 불행이 사라진다. 행복은 가진 것에 비례하기보다 감사에 비례한다. 가진 것과 상관없이 많이 감사하고 자주 감사하는 사람에게 행복은 찾아와서 문을 두드린다. 그래서 감사를 복을 부르는 호출 신호라고 한다. 감사하면 복이 사방에서 몰려온다. 교부(敎父) 크리소스톰은 ‘감사하는 것에 인색하지 않는 자는 축복의 열쇠를 손에 쥔 자다. 환난과 슬픔 속에서도 감사하라. 그리하면 하나님께서 그것을 축복으로 바꿔주실 것이다.’고 했다. 그래서 본문은 “범사에 감사하라”고 말씀한다. 이는 우리 신자가 힘써 추구해야 할 중요한 생활태도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모든 일에 감사할 수 있을까? 이를 위해 ‘기’자로 시작하는 세 단어를 소개하고자 한다(➠범사에 감사하기 위해선 ‘3기’를 가져야 한다).
1. 기억
감사는 생각과 깊은 관련이 있다. 깊이 생각하고, 많이 생각해서 감사한 일을 발견할 때 감사하게 된다. 그래서 감사(thank)와 생각(think)이 어원이 같은 것이다. 그러니 감사는 우선 ‘지나간 일들을 잊지 않고 깊이 생각하는 것’(기억)에서부터 시작된다. 지난 주일에 항상 기뻐하는 생활에서 기억의 중요성을 말씀드렸는데,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 역시 기억이 중요하다. 하나님께서 이스라엘에게 유월절과 맥추절, 장막절을 민족적인 축제로 예루살렘에 모여서 지키도록 하신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하나님께서 자기 백성 이스라엘을 430년 동안 종살이하던 땅 이집트에서 어떻게 구원하셨고, 광야 40년을 어떻게 인도하셨고, 그들에게 어떤 은혜를 베푸시고, 어떻게 사랑하셨는지를 잊지 말고 기억하도록 하기 위함이다. 기억해야 섬기고, 기억해야 사랑하고, 기억해야 감사할 수 있기 때문이다. 가장 행복한 사람이 누구인지 아는가?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고 그 주님 앞에 감사의 무릎을 꿇을 수 있는 사람, 그래서 주님께 기억되는 사람이다.
여기서 ‘기억하다’는 히브리어로 ‘자카르’(ןכר/zakar)라고 한다. 이는 단순히 과거의 어떤 사건이나 사실을 암기하는 정도가 아니다. 주의를 기울여 ‘묵상하고 회상하고 스스로를 권면하여 일깨우는’ 적극적이고 능동적인 영적 행위를 가리킨다. 그래서 이 기억은 두 가지의 결과를 가져오는 원동력이다. 하나는 ①참된 ‘회개’에 이르게 하고, 다른 하나는 ②‘감사’에 이르게 한다. 이는 당연하다. 주님께서 베풀어주신 놀라운 은혜와 사랑을 기억하는 사람은, 이런 사랑과 은혜를 받고도 올바로 응답하지 못한 자신에 대하여 회개하게 되고, 이런 은혜와 사랑을 받을 자격이 없는 자신을 생각하며 감사하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감사하지 못하는 이유는 잊기 때문이다. 기억하면 감사하게 된다. 감사가 마르지 않는다. ‘은혜는 물에 새기고, 원수는 돌에 새긴다.’는 말이 있다. 이는 죄의 속성을 잘 보여주는 말이다. 죄는 은혜를 기억하지 못하게 만든다. 그래서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시편기자는 자기 자신을 이렇게 독려(督勵)한다. “내 영혼아 여호와를 송축하며 그 모든 은택을 잊지 말지어다.” 잊지 말고 기억하자! 잊지 않고 기억하는 사람에겐 얼굴은 감사로 빛나고, 입술에는 감사의 찬양이 흐르고, 눈은 감사의 눈물이 그렁그렁 맺히게 된다. 이런 사람이 범사에 감사하게 되고, 바로 여기에 주님의 더 큰 은혜와 복이 머물게 된다.
2. 기적
다음은 우리로 하여금 일상이 얼마나 소중한 것인지, 일상이 곧 기적이라는 사실에 눈을 뜨게 하는 우리 장로교 최초의 선교사 언더우드의 기도다.
걸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설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들을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말할 수만 있다면 더 큰 복은 바라지 않겠습니다.
누군가는 지금 그렇게 기도를 합니다.
놀랍게도 누군가의 간절한 소원을 나는 다 이루고 살았습니다.
놀랍게도 누군가가 간절히 기다리는 기적이 내게는 날마다 일어나고 있습니다.
부자가 되지 못해도, 빼어난 외모 아니어도, 지혜롭지 못해도,
내 삶에 날마다 감사하겠습니다.
날마다 누군가의 소원을 이루고, 날마다 기적이 일어나는 나의 하루, 나의 삶을 사랑하겠습니다.
어떻게 해야 행복해 지는지 고민하지 않겠습니다.
내가 얼마나 행복한 사람인지 날마다 깨닫겠습니다.
나의 하루는 기적입니다.
나는 행복한 사람입니다.
신학자 칼 라너는 기적을 믿느냐는 물음에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기적을 믿지 않습니다만 기적에 의존해서 하루하루 살아갈 뿐입니다.’ 일상에서 일어나는 모든 일이 하나님이 베풀어주신 기적이라는 고백이다. 일상의 소소한 일들 가운데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눈이 열린다면 라너처럼 언더우드처럼 우리는 날마다 기적 속에서 살고, 또한 우리의 삶에서는 감사가 떠나지 않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는 또 하나의 비결은 ‘일상을 기적으로 여기는 것’이다.
특별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일상의 평범한 것을 가볍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크고 위대한 것을 추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일상의 소소한 것을 하찮게 여기는 사람들이 있다. 경이로운 하늘의 것을 갈구하는 사람들이 있다. 그래서 땅의 소중한 한 순간을 놓치는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이런 사람들이 기억해야 할 진리가 있다. 하늘은 땅과 잇대어 있다는 것이다. 비범함은 평범함과 연결되어 있다는 것이다. 크고 위대한 것은 소소한 일상이 모여서 된다는 것이다. 그러니 일상을 바라보는 ‘눈’(관점)의 변화, 일상에 대한 ‘생각’(가치)의 변화가 필요하다. 관점과 가치가 바뀌면 동일한 사건, 사물에 대한 평가도 바뀌게 된다. 감사하는 생활도 여기서부터 시작된다. 이렇게 변화된 생각, 변화된 눈으로 바라보면 일상이 기적인 것을 알게 되고, 그러면 일상이 감사로 변하게 된다. 그래서 모든 일에 감사하게 된다. 어느 것도 당연한 것은 없다. 모두가 특별한 것들이다. 지금 우리가 예배하고 있는 이 순간도 기적이다.
3. 기대
참된 신앙은 ‘내가 하나님께 무엇을 했느냐?’에 관심을 갖지 않고, ‘하나님이 내게 무슨 약속을 하셨느냐?’를 바라보는 것이다. 그래서 히브리서 기자는 믿음을 “바라는 것들의 실상이요 보이지 않는 것들의 증거니”(11:1)라고 했다. 한 마디로 요약하면 ‘믿음이란 곧 기대하는 것’이라는 뜻이다. 하박국 선지자는 전쟁으로 폐허가 된 현실에서도 이렇게 고백했다. “비록 무화과나무가 무성하지 못하며 포도나무에 열매가 없으며 감람나무에 소출이 없으며 우리에 양이 없으며 외양간에 소가 없을지라도 나는 여호와로 말미암아 즐거워하며 나의 구원의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기뻐하리로다.”(합3:17,18). 현실적으로는 완전히 폐허가 되어 ‘없으며, 없으며, 없으며, 없을지라도 하나님으로 말미암아 즐거워하고 기뻐한다.’고 했다. 이런 고백이 가능했던 것은 하나님께서 회복해 주실 것에 대한 기대 때문이다. 기대가 없는 사람은 쉽게 무너진다. 그러나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는 사람은 현실이 아무리 혹독해도 그 현실에 무릎을 꿇지 않는다. 불평대신 더 큰 소리로, 더 힘차게 찬양하며 감사한다. 내일에 대한 기대가 있기 때문이다.
감사생활에는 지금까지 주신 복을 기억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장차 주실 복을 기대하는 것도 중요하다. 특히 맥추절과 장막절에 관련된 말씀(신16:9~17)을 보면, 지금까지 ‘주신 복’과 함께 장차 ‘주실 복을 인하여’ 감사하라는 말씀이 나온다. “여호와께서 네 모든 소출과 네 손으로 행한 모든 일에 복 주실 것이니 너는 온전히 즐거워할지니라.”(:15). 아직 보이지 않지만, 아직 손에 잡힌 것은 없지만, 아직 얻은 것은 없고 이룬 것은 없지만 감사하라는 것이다. 주님은 분명히 약속하셨고, 그 약속을 성취하시는 분이시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주님을 기대하고 주님의 약속을 기대하는 것’, 이것이 세 번째로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해주는 비결이다.
온도계와 온도 조절기
두 종류의 사람이 있다. ‘온도계’와 같은 사람과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다. 온도계는 날씨가 추우면 내려가고, 더우면 올라간다. 온도의 변화에 따라 계속해서 변한다. 심지어는 입김만 불어도 요동을 친다. 반면 온도 조절기는 일정한 온도에 고정시켜 놓으면 어떤 변화무쌍한 날씨에도 그 온도를 유지한다. 오히려 온도를 조절한다. 더우면 내려주고, 추우면 올려준다. 온도에 따라 변한 것이 아니라 온도를 유지하고 조절을 한다. 마찬가지로 온도계와 같은 사람은 끊임없이 주변의 온도에 따라서, 즉 환경적인 요인에 따라 요동을 친다. 직장이란 온도, 가정이란 온도, 자녀란 온도, 건강이란 온도, 물질이란 온도의 변화에 따라 마치 주식시장의 현황판처럼 출렁거린다. 이런 사람의 삶에는 감사가 있을 수 없다. 그러나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은 환경에 따라 움직이지 않고, 오히려 환경을 지배하고 조절한다. 따라서 어떤 경우에도 마음의 평안을 유지하며 감사하는 생활을 살게 된다. 범사에 감사하는 사람은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다.
여러분도 온도 조절기와 같은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주변 환경에 요동하지 않고 어떤 경우, 어떤 상황에서도 감사할 수 있는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그러기 위해선 ‘기억, 기적, 기대’ 이 ‘3기’를 잊지 말아야 한다. 주님을 기억하고, 주님이 나를 위해서 하신 일을 기억해야 한다. 그리고 일상에서 하나님의 섭리를 볼 수 있는 눈을 가져야 한다. 그래서 일상이 기적이라는 것을 알아야 한다. 또한 나를 향한 주님의 수많은 약속을 기대해야 한다. 이 3기는 감사하는 신앙생활을 비롯하여 감사하는 마음, 감사하는 가정, 감사하는 직장 등 범사에 감사하는 생활을 가능하게 해줄 것이다. “범사에 감사하라. 이것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너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니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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