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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리는 생활(06-12-1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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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574회 작성일 06-12-19 10:56

본문

기다리는 생활
행1:12~14

기다림의 중요성
그리스 신화에 코카서스 산의 어느 암벽에 매달려 독수리들에게 그 심장이 뜨기는 형벌을 받고 있는 프로메테우스라는 인물이 나옵니다. 그가 이런 형벌을 받게 된 것은 인간을 이롭게 하기 위해 제우스의 신전에 불을 훔친 것 때문에 신들의 제왕 제우스에게 벌을 받은 것입니다. 프로메테우스에게 이런 벌을 주는 것으로 분이 안 풀린 제우스는 대장장이의 신 헤파이스토스에게 명하여 아름다운 여인을 만들게 하였습니다. 그녀가 바로 최초의 여성 판도라입니다. 그러자 여러 신들이 그녀를 아름답게 꾸며주었습니다. 미의 여신인 아프로디테는 그녀에게 우아함과 아름다움을 선사하였고, 아테나는 바느질과 길쌈하는 법을 가르쳤습니다. 헤르메스는 그녀의 말에 설득력을 부여하고, 마음에 간교함을 넣어주었습니다. 이렇게 해서 만들어진 여인에게 제우스는 판도라(Pandora, 모두의 선물을 받은 자)라는 이름을 지어 주었습니다. 그런 다음 제우스는 판도라에게 예쁜 상자 하나를 건네주면서 절대로 열어 봐서는 안 된다고 했습니다. 거듭 다짐을 받은 뒤 제우스는 판도라를 프로메테우스의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데려다 주었습니다.

미리 이런 일이 일어날 것을 예견한 프로메테우스는 형벌을 받으러 코카서스 산으로 끌려가기 전에 동생 에피메테우스에게 제우스가 주는 어떤 선물도 받지 말라고 경고를 하였습니다. 그렇지만 에피메테우스는 판도라의 아름다운 자태에 넋이 빠져 덥석 선물을 받았습니다. 그리하여 판도라는 에피메테우스의 아내가 되어 지상에서 살게 되었습니다. 행복한 나날을 보내던 어느 날 판도라는 제우스가 절대로 열지 말라던 상자가 생각이 났고, 상자의 내용이 궁금하여 견딜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참다 참다 호기심을 견디지 못하여 그 상자를 살짝 열어보았습니다. 바로 순간입니다. 상자 안에서 온갖 재앙과 질병이 쏟아져 나와 사방팔방으로 흩어졌습니다. 깜짝 놀란 판도라는 재빨리 상자 뚜껑을 닫았지만 이미 상자 속에 들어있던 것은 다 날아가고 단 하나만 남았습니다. 그것이 바로 '희망'입니다.

이 신화는 당시 그리스 사람들의 인생관을 잘 보여주고 있습니다. 이 세상의 모든 불행의 원인은 인간의 잘못된 호기심 때문이라는 것과, 인생이 아무리 어렵고 힘들어도 희망 하나만 있으면 괜찮지 않느냐는 것입니다. 즉 우리에게 희망이 있는 한 어떤 어려움도 극복할 수 있다는, 우리의 삶에서 희망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이야기입니다.

2차 세계대전 당시 수많은 유대인들이 나치당에 의해 죽임을 당했습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절망 속에서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랍비가 길가에 책상을 놓고 세상에서 가장 값진 물건을 판다며 사람들을 모으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책상 위에는 아무 것도 놓여 있지 않았습니다. 랍비의 이상한 행동 때문에 모여든 많은 사람들이 랍비에게 다가가서 팔고 있는 물건이 무엇이냐고 물었고, 랍비는 묻는 사람마다 그 사람의 귀에다 대고 속삭였습니다. 그리고 랍비의 말을 들은 사람들은 정말 값진 선물을 발견한 것처럼 기쁘게 그 자리를 떠났습니다. 여러분, 이 랍비가 판 것이 무엇이었을까요? 그것은 ‘희망’입니다. 악이 득세하여 힘들고 어려운 시대지만 희망을 버리지 말자는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희망이야말로 세상에서 가장 값지고 소중한 것입니다. 희망을 버리면 다 버린 것이요, 희망을 간직하고 있다면 기회는 얼마든지 있는 것입니다. 사실 성경은 희망을 말하는 책입니다. 우리에게 소망을 심어주는 말씀들입니다. 그리고 우리가 믿는 주님은 희망의 그리스도요, 우리 기독교는 희망의 종교입니다.

기다림의 대상
사무엘 베케트(S.Beckett)의「고도를 기다리며」라는 책이 있습니다. 현대인의 부조리한 삶을 보여주는 대표작이라고 합니다. 책의 내용은 의미도 없는 말들을 서로 주고받으면서 그저 막연하게 기다리고 있는 두 주인공의 이야기입니다. 말은 하고 있지만 대화가 되고, 관계가 형성되지 않습니다. 이것이 현대인의 모습이라는 것입니다. 그런데 한 가지 공통점이 있습니다. 무엇인가(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점입니다. 그래서 이 책의 주제는 한마디로 기다림인데, 대화도 관계도 단절된 고독하고 무의미한 생활에서 기다림 그 자체가 의미라는 것을 역설하고 있는 것입니다. 물론 기다림(희망) 그 자체만으로도 의미가 있는 일입니다. 그렇지만 막연한 기다림은 위험한 일이기도 합니다. 무작정 기다린다는 것은 목적이나 목표가 없이 그냥 달리는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오래 전에 어느 월간지 만평(漫評)에서 본 것입니다. 공원에서 어떤 사람이 달리기를 시작합니다. 그러자 주변에서 이 사람을 보고 따라서 달립니다. 사람들이 왜 달리냐고 물으니까 앞 사람이 달리니까 그냥 달린다고 말하면서 달립니다. 그러자 그 사람 역시 그냥 따라서 달리기 시작합니다. 그렇게 해서 달리기 시작한 사람들이 커다란 무리를 이루었습니다. 그런데 맨 처음 달리기를 시작한 사람이 마지막에 어디로 간 줄 아십니까? 그곳은 화장실이었습니다. 이 사람은 소변이 급해서 달렸는데 다른 사람들은 그것도 모르고 다른 사람들이 달리니까 덩달아 달린 것입니다. 그 그림의 압권은 마지막 장면입니다. 이 사람이 화장실로 향하자 따라서 달리던 사람들 모두 그 자리에 주저앉아 땅을 치는 장면입니다. 대상이나 내용이 없는 무작정 기다림의 위험이 바로 이와 같은 것입니다. 그러므로 무엇에 대한 기다림이냐가 더 중요합니다. 분명한 기다림의 대상과 목적이 있어야한다는 것입니다.

기다리는 사람들
오늘 본문은 기다리는 사람들의 이야기입니다. 이들은 예수님의 지상생애 마지막 순간까지 함께 했던 사람들입니다. 예수님은 이들에게 한 가지 부탁을 하셨습니다. “.......가라사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고 내게 들은 바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을 기다리라.”(행1:4)는 것이 그것입니다. 여기서 아버지의 약속하신 것이란 ‘성령’을 두고 하신 말씀입니다. 성령을 기다리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야 권능을 받고 복음의 증인이 될 수 있다(1:8)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이 사람들은 예수님이 갑자기 하늘로 올라가시자, 흩어지지 않고 마가의 다락방에 모였고, 기다렸습니다. 그러나 이들은 막연하게 기다리지 않았습니다. 이들의 기다림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1. 이들은 분명한 대상을 두고 기다렸습니다.
이들의 기다림 대상은 이미 주님께서 말씀하신 성령입니다. 그리고 이들 앞에서 하늘로 올라가신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행1:9~11절을 보면, 이들 역시 잠시 잘못된 기다림에 빠졌습니다. 갑자기 예수님이 구름을 타고 승천을 하시자 이들은 잠시 혼란에 휩싸이게 됩니다. 어떤 사람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을 버리고 떠난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다른 곳의 기록을 보면 당시 주님의 승천을 보았던 사람들이 500여 명이나 되었는데(고전15:6), 남은 사람은 겨우 120명(행1:15)뿐이었습니다. 그리고 남은 120명도 그저 멍하게 주님이 올라가신 하늘만 쳐다보고 있었습니다. 한순간이지만 이들의 막연한 기다림에 대한 묘사입니다. 기다림의 대상을 잊어버린 채 하늘만 쳐다보았던 것입니다. 그 때 흰 옷을 입은 두 천사가 나타나 이들을 깨우쳐 줍니다. “갈릴리 사람들아, 어찌하여 서서 하늘을 쳐다보느냐. 너희 가운데 올리우신 이 예수는 하늘로 가심을 본 그대로 오시리라.”(:11) 비로소 이들은 자신들이 기다려야 할 대상을 깨닫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주님이 부탁하신 말씀을 따라 마가의 다락방에 모여 성령을 기다리기 시작한 것입니다. 아울러 승천하신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게 된 것입니다. 바로 이들이 우리 기독교회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그래서 교회를 기다림의 공동체, 그리고 신자들을 기다리는 사람들이라 부르는 것입니다. 그러나 막연하게 추상적으로 기다리는 사람들이 아닙니다. 우리의 기다림은 분명한 대상이 있습니다. 초대교회 이후 모든 교회와 신자들이 그랬던 것처럼, 그 대상은 다시 오실 예수님입니다. 오순절에 이 땅에 임하신 성령 안에서 예수님의 다시 오심을 기다리고 있는 것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주님의 재림에 대한 기다림은 신자들 사이에서 행해진 격려의 인사말이었고, 기도였습니다. ‘마라나타!’라는 말이 바로 그것입니다.

이 말은 처음에는 하나의 선포였습니다. ‘주님 곧 오십니다! 그러니 현재의 고통과 아픔을 조금만 참으십시오. 주님 곧 오십니다! 그러니 주님을 맞이할 수 있도록 깨어서 기도하십시오......’ 주로 격려와 각성의 의미를 담은 선포였습니다. 그렇지만 주님의 재림이 지연되면서 이것은 하나의 기원으로 바뀌기 시작했습니다. ‘주님, 오서 오십시오. 오셔서 우리를 구원해 주십시오. 주님, 오서 오십시오. 오셔서 우리를 신원하여 주십시오......’ 이런 기원과 탄식의 의미를 담은 기도가 되었습니다.

어쨌든 주님은 우리 기다림의 대상이자, 내용이십니다. 우리의 기다림이 헛되지 않은 것은 그 대상이 분명하기 때문인 것입니다. 그러므로 기다림이 중요하지만 누구를 기다리고, 무엇을 기다리느냐가 더 중요합니다. 이것에 따라 그 사람의 정체성이 결정되고, 나아가서 그 사람의 운명이 결정되기 때문입니다.  

2. 이들은 분명한 행동을 가지고 기다렸습니다.
기다림에 있어서 또 중요한 것이 기다림에 대한 태도입니다. 기다림에 대한 잘못된 태도는 기다리는 사람들이 빠지기 쉬운 또 하나의 함정입니다. 기다린다는 것을 방패삼아 아무런 행동도 하지 않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혹은 기다림을 핑계로 현실생활을 도피해버린 사람들도 있습니다. 이는 우리가 경계해야 할 잘못된 기다림의 모습(태도)입니다.

신약성경에 나온 데살로니가 교회의 문제가 바로 이 점입니다. 데살로니가 교회는 바울이 많은 칭찬을 했던 훌륭하고 아름다운 믿음을 가진 교회였습니다. 그런데 주님의 재림과 관련된 기다림의 신앙에 문제가 있었습니다. 그 교회에 주님의 재림을 핑계로 일상생활을 뒷전으로 하고 무위도식(無爲徒食)하는 신자들이 있었습니다. 이 사람들은 일상생활을 그만 두고, 아무 것도 하지 않으면서 주님의 재림만 기다리는 것입니다. 그러면서도 다른 한편으론 집집이 돌아다니며 모든 것을 게걸스럽게 먹어 치웠습니다. 이런 사람들을 향해 바울은 이렇게 경고를 합니다. “일하기 싫어하는 자는 먹지도 말게 하라.”(살전3:10).

올바른 기다림은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분명한 행동을 가지고 있고, 일상생활을 벗어나 기다린 것이 아니라 삶의 현장에서, 즉 내가 있는 그 곳, 내가 하고 있는 그 일상 속에서 기다리는 것입니다. 이것이 기다림에 대한 올바른 태도입니다.

본문에 나온 사람들의 모습에서 이 점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주님은 4절에서 예루살렘을 떠나지 말라고 부탁하셨습니다. 이는 삶의 현장을 떠나지 말라는 말씀입니다. 그들이 처해 있는 예루살렘이라고 하는 삶의 현장에서 성령님을 기다리라는 말씀입니다. 이 말씀대로 120명의 신자들은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기다렸습니다. 이것이 올바른 기다림의 첫 번째 태도입니다. 그러므로 올바른 기다림의 태도는 삶의 현장을 벗어나지 않습니다. 기다림을 도피처로 이용하지 않는다는 말입니다. 교회사를 보면, 데살로니가 교회처럼 잘못된 기다림에 빠진 사례들이 종종 나옵니다. 한 때 우리나라에서도 특정 종교단체들에 의해, 곧 오실 주님을 깨끗한 마음으로 맞이하고 싶다며 직장을 그만두거나 가정과 가족을 버리고 산속이나 기도원 등으로 잠적해 버린 사람들이 있었습니다. 그래서 사회문제를 일으키기도 했습니다.

두 번째 태도는 기도입니다(14). 일상생활 속에서 기도한다는 것은 몸은 이 세상에 있지만 그 마음이 하늘에 닿아 있음을 의미합니다. 그의 의식과 가치와 관심이 주님께 있음을 의미한 것입니다. 또한 그렇지 않고는 기도할 수도 없는 것입니다. 기도야말로 주님을 기다리는 가장 적극적이고, 중요한 태도입니다. 성경의 다른 말씀들에서도 기다림의 태도로 기도를 권하는 말씀들이 많습니다.

그리고 세 번째는 가룟 유다로 빠진 열두 사도의 자리를 보궐한 것(16~26)입니다. 여기서 기도의 문제는 신앙생활에서 너무 중요하기에 기다림의 중요한 행동이라 치더라도, 가룟 유다 자리를 보선한 것이 지금 이 자리에서 해야 할 만큼 시급한 일이었느냐 반문해 볼 수도 있을 것입니다. 다음에 하더라도 하등 문제될 것이 없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이 사람들은 기도 다음으로 이 일을 했다는 사실입니다. 이는 현재 직면한 문제를 해결하는 것이 기도만큼 중요함을 보여주고 있는 것입니다. 즉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이 일이 기도만큼 중요하다는 것입니다. 즉 기도와 일이 함께 가야한다는 말입니다. 기도한 만큼 자기 일에 충실하고, 부지런히 일한 만큼 기도에도 열심을 내야 한다는 것입니다. 자기가 하고 있는 일에 충실한 것, 이것이 기다림의 또 하나 중요한 태도입니다.

기다림의 대상만큼 기다림의 태도도 중요합니다. 오늘 본문에 나온 초대교회 120명의 신자들은 우리 기다림의 좋은 모델입니다. 이들을 모범삼아 이 기다림의 계절(대림절)을 의미 있게 잘 보낼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에 대한 기다림, 그 소망의 삶이 충만하시기를 기원합니다.

※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오늘 말씀 중에서 당신에게 특별한 의미를 주는 것이 무엇입니까?(도전, 책망, 교훈)

2. 기다림의 중요성과 관련된 경험(당신의 경험을 중심으로)을 이야기해 봅시다.

3. 오늘의 이 말씀을 삶 속에서 어떻게 적용할 수 있을까요?

※ 함께 기도합시다.
1. 주 예수여, 오서 오소서!
2. 날마다 주님과 주님 나라에 대한 기대와 소망 속에 살게 하소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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