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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인 예수님(06-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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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704회 작성일 06-12-26 11:5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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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유에 누인 예수님
눅2:1~7

방 없어요!
다소 지적 능력이 떨어지는 윌리라는 소년이 있었습니다. 그는 교회에서 준비한 성탄절 성극에서 여관집 주인역을 맡게 되었습니다. 성탄절이 되어 교회에는 많은 사람들이 모여 들었습니다. 연극이 진행되던 중 드디어 요셉과 만삭이 된 마리아가 여관집 문을 두드리는 장면이 되었고, 주인이 나와 방이 없으니 다른 곳에서 찾아보라고 했습니다. 그러나 요셉과 마리아는 더욱 간절히 말했습니다.
“우린 너무 멀리서 왔습니다. 아내는 출산할 날이 되었고 쉬어야 할 곳이 필요합니다.”
그러자 여관집 주인으로 분장한 윌리가 말없이 마리아를 오랫동안 쳐다보는 것이었습니다. 무대 위에서 대사를 읽어주던 선생님은 윌리가 대사를 잊어버린 줄 알고 작게 일러주었습니다. 한참을 말없이 서 있던 윌리는 무대 뒤에서 들리는 선생님의 목소리에 정신을 차리고 대답했습니다.
“안돼요. 방이 없으니 딴 곳으로 가세요!”
요셉과 마리아는 낙심하여  돌아갔고, 대본대로라면 문을 닫고 안으로 들어가야 했던 윌리가 그대로 문간에 서서 눈물을 흘리며 요셉과 마리아의 가는 모습을 지켜보고 있었습니다. 그러다가 갑자기 외쳤습니다.
“요셉과 마리아 가지 마세요. 마리아를 데리고 돌아오세요. 내 방을 쓰세요. 내 방에서 쉬란 말이에요.”
물론 이는 대본에 없는 대사였습니다. 그래서 비록 연극은 엉망이 되었지만 윌리의 행동을 지켜본 많은 사람들은 감동의 눈물을 흘렸습니다.

아무리 보아도 만왕의 왕이신 우리 주님의 탄생은 비극입니다. 방에 있을 곳이 없어 마구간 말구유에서 탄생하셔야했기 때문입니다(:7). 그러나 정확히 말하면 방이 없어서가 아닙니다. 윌리와 같이 따뜻한 마음을 가진 사람들이 없었던 것이 문제입니다. 욕심에 눈이 멀고 자기 안일만 생각하는 이기심에 귀가 막혀서 이웃의 고통, 아픔, 어려움을 볼 수도 들을 수도 없었기 때문입니다. 탐욕으로 마음의 방들이 가득 채워져 주님이 들어가실 수 있는 방이 없었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우리와 우리 시대에 일어나지 않기를 바라면서, 우리 주님의 구유탄생이 주는 의미에 대하여 잠시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탄생의 시대적 배경
예수님이 탄생하신 것은 제정 로마시대 최초의 황제 아우구스도(주전 31~주후14년까지 통치)시대입니다. 이 때 황제가 조세를 목적으로 그의 제국 전체에 호적령을 내렸습니다. 어제 낮 예배 때 말씀드렸듯이 요셉은 다윗의 후손이었는데, 나사렛이란 시골에서 목수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선조 다윗의 고향인 베들레헴으로 호적을 하기 위해 만삭이 된 마리아를 데리고 가게 되었습니다. 그런데 고향은 너무 삭막하게 변해 있었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라는 율법 정신도 사라지고, 나그네를 대접하던 따뜻한 인심도 찾아볼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오랜만에 찾은 고향이지만 짐승의 마구간에서 밤을 새야했고, 거기에서 아기를 출산해야했던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예수님 탄생의 배경입니다.

구유탄생의 의미  
예수님의 구유 탄생은 성탄의 본질을 보여줍니다. “너희가 가서 강보에 싸여 구유에 누인 아기를 보리니 이것이 너희에게 표적이니라.”(:12) 예수님의 구유 탄생이 하나의 표적(상징)이라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께서 베들레헴 어느 마구간의 구유에 탄생하심은 단순히 예수님의 비천한 탄생 이상의 의미를 가지고 있다는 말씀입니다. 그러면 이것이 무엇을 의미하는 상징(표적)일까요?

첫째는, 주님이 비천한 사람들의 구주, 자신을 비천하게 여기는 겸손한 사람들의 구주되심을 상징합니다.
일찍이 선지자 이사야는 오실 메시야의 사역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주의 성령이 내게 임하셨으니 이는 가난한 자에게 복음을 전하게 하시려고 내게 기름을 부으시고 나를 보내사 포로된 자에게 자유를, 눈먼 자에게 다시 보게 함을 전파하며, 눌린 자를 자유케 하고, 주의 은혜의 해를 전파하게 하려 하심이라.”(눅4:18~19) 이와 같은 예수님의 사역과 삶을 구유 탄생이 미리 상징적으로 보여준 것입니다.

실제로 복음서에 나타난 주님의 생애는 비천한 사람들과 함께 하는 것이었습니다. 그의 제자들은 불학무식한 갈릴리 출신 어부들이 대부분이었고, 세리, 창기, 어린이, 여자들, 가난하고 병든 사람들, 즉 육체적, 사회적, 경제적, 종교적인 약자들과 함께 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을 반대한 사람들은 예수님에게 ‘세리와 죄인들의 친구’라는 별명을 붙여주기도 했습니다. 그 때마다 예수님은 ‘의원은 건강한 자게 필요한 것이 아니고 병든 자에게 필요하다.’ ‘나는 의인을 부르러 온 것이 아니라 죄인을 부르러 왔다.’고 응수하셨습니다.

그렇다면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은혜를 입고, 주님을 자기 마음에 모셔드릴 수가 있을까요? 스스로 자신을 말구유처럼 비천하게 여기는 사람. 자신을 겸손하게 낮춘 사람만이 주님을 맞이할 수가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주님의 구유탄생 상징 첫 번째는, 주님은 겸손의 왕으로 오셨다는 것과 겸손한 사람을 찾으신다는 것입니다.

둘째는, 주님이 세상 사람들의 먹이가 되심을 상징합니다.
예수님이 탄생하신 베들레헴은 ‘떡 집’이란 뜻이고, 예수님은 자신을 하늘로서 내려온 ‘산 떡(생명의 떡)’이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떡 집에 떡이 탄생하신 것입니다. 그리고 구유(manger) 역시 가축들의 먹이를 담는 곳입니다. 아기 예수님을 거기에 누이신 것은 그가 우리 영혼의 양식으로 오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이 베들레헴에서 탄생하시고, 탄생하셔서 짐승의 구유에 누인 것은 유연한 일이 아닙니다. 이것은 상징이었습니다. 세상을 살리는 생명의 떡, 사람들의 먹이로 오신 분이신 것을 상징한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이 세상에서 영화를 누리고 사람들에게 섬김을 받기 위해 오신 것이 아니라 그들에게 생명을 주기 위해 오셨다고 하셨습니다. 사람들의 밥이 되고, 떡이 되기 위해서 오셨습니다.

요6;48, "내가 곧 생명의 떡이다. 이는 하늘로서 내려 온 떡이니 사람이 이 떡을 먹으면 영생하리라. 이는 세상의 생명을 위한 내 살이다." 이는 십자가의 죽음으로써 성취가 되었는데, 예수님의 구유 탄생은 죽음에 대한 예표로 십자가에서 죽으시므로 우리의 영원한 생명의 양식이 될 것을 보여주신 것입니다. 그러므로 예수님의 구유 탄생은 우리의 영원한 떡, 양식으로 오신 주님의 상징입니다. 즉 주님이 우리의 영원한 생명이 되심을 상징한 것입니다. 우리가 생명을 얻고, 더욱 풍성히 얻기 위해서 떡이신 주님을 먹어야 합니다. 주님을 먹는다는 것은, 주님의 말씀을 듣고, 보고, 공부하여 지켜 순종하는 것입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이 곧 말씀이기 때문입니다(요1:14). 그러므로 구유탄생 상징 두 번째는, 주님은 생명을 주시는 분이고, 그 생명을 더욱 풍성하게 하시는 분이시라는 것입니다.

셋째는, 주님이 변화의 주인이심을 상징합니다.
상표가 내용을 결정한 것이 아니라 내용이 상표를 결정합니다. 그릇으로 말하자면 그릇의 가치를 결정하는 것은 그릇 속에 담긴 내용물입니다. 집도 마찬가집니다. 아무리 성처럼 우람한 집이라도 그곳에 도둑이 살면 도둑의 집이요, 초가라도 그곳에 유명한 선인이 살면 선인의 집이 됩니다. 우린 예수님의 구유 탄생과 더불어 이와 같은 소중한 진리를 생각해 볼 수가 있습니다. 세속적인 안목으로 말구유는 분명 지저분하고 비천한 곳입니다. 그러나 그 곳에 만왕의 왕이 태어나셨습니다. 이제 그곳은 더 이상 말구유가 아닙니다. 왕의 요람입니다. 마구간 역시 더 이상 초라하고 냄새나는 마구간이 아니라 왕의 보좌, 왕의 처소가 되었습니다. 그곳에 하나님의 영광이 비추고 천사들의 노래가 있고 목자들의 경배가 있었습니다. 말 그대로 천국이었습니다. 이는 무엇을 의미합니다. 마구간, 말구유는 초라한 우리 마음,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상징합니다. 그러나 이곳에 우리 주님이 탄생하시면, 주님이 이곳에 임하시면 이곳은 더 이상 초라한 곳이 아니라는 것입니다. 왕의 요람으로, 왕의 보좌, 왕의 처소로 변한다는 사실입니다. 구유탄생 상징 세 번째는, 구유는 내 마음, 가정, 일터, 교회를 상징하는데, 주님이 임하시면 이곳들이 새롭게, 거룩하게, 의미있게 변한다는 것입니다.

사랑하는 성도 여러분, 주님의 구유탄생은 주님의 비극이 아니라 우리의 비극입니다. 우리의 교만과 우리의 이기심과 사랑이 없는 우리 모습의 폭로요, 우리에게 구주로 오신 주님을 맞이할 마음의 방이 없음을 상징한 것이기 때문입니다. 다시는 이런 비극이 되풀이 되지 않도록 교만으로, 이기심으로, 탐욕으로 채워진 우리 마음의 방을 비워둡시다. 다시 오실 주님 맞이하기에 부족함 없도록 합시다. 더불어 주님의 구유탄생의 의미를 마음 깊이 묵상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주님은 스스로를 겸손하게 낮춘 사람을 찾습니다. 주님은 생명의 양식입니다. 주님은 내 삶과 생애를 고치시고 변화시키시는 주인이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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