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06-12-31)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06-12-31)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547회 작성일 07-01-02 16:32

본문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빌4:4-7

서양 속담에 ‘악마도 기뻐하고 있을 때는 선량하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은 누구를 막론하고 기뻐할 때 가장 아름답고 선한 마음을 갖는다는 뜻이라고 생각합니다. 기뻐하는 마음에는 나쁜 생각 나쁜 마음이 끼어들 수 없는 것입니다, 한문 격언에도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 즉 웃으면 복이 온다는 말이고, ‘일노일노일소일소’(一怒一老一笑一少), 즉 한번 화내면 한번 늙어지고 한번 웃으면 한번 젊어진다는 말입니다. 웃음이 단순히 마음의 문제를 넘어서 복되고 건강한 삶에까지 영향을 준다는 말입니다. 그렇습니다. 마음이 즐거우면 몸도 건강하게 되고 모든 일들이 잘되게 되는 것입니다. 그래서 요즈음 ‘웃음치료’라는 것도 있습니다. 많이 웃고, 계속해서 웃다보면 병이 치료가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은 이미 임상실험을 통하여 그 효과가 증명이 되었습니다. 성경도 “항상 기뻐하라”고 말씀합니다. 이는 기쁨이 영적인 생활에서도 중요하다는 뜻입니다.  

지난 9월에 기쁨을 주제로 말씀을 증거했는데, 오늘 다시 이 주제로 말씀을 준비했습니다. 살다보면 쌓이는 게 근심과 걱정, 염려입니다. 앞 일 또한 마찬가집니다. 그래서 이런 것들을 다 털어버리고 기쁨으로 한 해를 보내고, 새해를 맞이했으면 좋겠다는 생각에서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기쁨을 주제로 은혜를 나누고자 합니다.

기독교의 특징, 기쁨
우리 기독교의 특징 중 하나는 기쁨입니다. 어느 보살(菩薩) 시어머니와 믿음이 좋은 며느리가 있었는데, 며느리의 정성에 교회를 몇 번 나간 시어머니가 개종하면서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절에 갈 때는 평안함이 있었는데, 교회에 나가니까 기쁨이 있구나.” 기독교는 기쁨의 종교, 기쁨을 주는 종교입니다.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항상 기뻐하라.”(살전5:16)는 것이고, 성령의 열매 중 두 번째가 희락(기쁨)입니다(갈5:22), 성경에 예수님께서 웃었다는 기록은 한 번도 없지만 예수님은 “내 기쁨이 너희 안에 있어 너희 기쁨을 충만하게 하려 함이니라.”(요15:11)고 하셨습니다. 예수님은 우리에게 기쁨을 주시는 분이시고, 또한 기쁨을 충만케 하신 분이십니다. 그리고 그리스도인의 힘은 “여호와를 기뻐하는 것”(느8:10)입니다. 성탄절에 천사들의 메시지도 “온 백성에게 미칠 큰 기쁨의 좋은 소식을 너희에게 전하노라.”(눅2:10)였습니다. 어거스틴은 “그리스도인은 머리부터 발끝까지 할렐루야가 되어야 한다.”고 말했고, 「영적 훈련과 성장」이란 책을 쓴 리차드 포스터는 “그리스도인의 모든 영적 훈련의 기본은 기쁨”이라고 말했습니다. 기독교의 특징이며 기독교인들의 특징이 되어야 하는 것은, 바로 기쁨입니다. 주님을 기뻐하고, 주님 때문에 기뻐하는 것. 이것이 신자의 모습이고 삶입니다. 나아가서 다른 사람들에게 기쁨을 주는 사람입니다.

기쁨의 해결책
알면서도 행하지 못함은 모든 신자들의 고민입니다. 기쁨에 대해서도 마찬가집니다. 신자라면 매일 기뻐하는 삶을 살아야 하고, 이것이 우리를 향한 하나님의 뜻(살전5;16)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그렇지 못한 것이 우리의 현실입니다. 왜 그럴까요? 왜 우리는 기뻐하지 못하는 것일까요? 본문에서 바울은 그 이유와 해결책을 제시하고 있습니다.

1. 갈등 관계를 극복해야 합니다.
모든 관계를 경쟁관계로 생각하는 사람이 있습니다. 이런 사람에게 상대방은 더불어 살아가는 형제나 지체가 아니라 제거되거나 극복해야 할 대상입니다. 이런 태도가 갈등관계를 만들고, 이런 갈등관계는 미움, 시기, 열등의식, 교만 등을 만들어냅니다. 예를 들어 자기보다 못한 사람에 대해서는 교만한 마음을 품게 되어 상대를 무시하고, 자기보다 나은 사람에 대해선 시기와 질투, 미움. 나아가서 스스로 자기연민에 빠져 열등의식에 사로잡히게 되는 것입니다. 마음속에 미움이 있고, 시기가 있고, 열등의식이 있고, 교만 등의 감정이 있을 때 어떻게 기뻐할 수가 있겠습니까? 우리의 삶은 어려서부터 경쟁 속에서 갈등관계에 길들여져 왔습니다. 그러다보니 알게 모르게 미움, 시기, 질투, 교만, 열등의식 등만 우리 마음에서 자라게 된 것입니다. 자연히 기쁨이나 감사에 대해선 인색할 수밖에 없는 것입니다.

본문 바로에 있는 2절에, 유오디아와 순두게라는 여성들이 나옵니다. 구체적으로 이들이 누구인지는 알 수 없으나 빌립보교회의 두 여성 지도자인 것은 분명합니다. 그런데 이들이 주님을 섬기고 교회를 섬기는 일에 서로 경쟁관계에 있었습니다. 나아가서 빌립보교회 전체가 이 두 여성으로 인하여 파당이 생기고 서로 갈등하게 되었습니다. 이 때문에 바울은 2:3절에서, “아무 일어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라고 말하였습니다. 다툼과 허영은 경쟁관계에서 생기는 것입니다. 경쟁하다보다 보면 다툼이 있고, 하나님의 영광을 위해서 일을 하는 것이 아니라 허영, 즉 자신의 야망을 실현하기 위해서 하게 됩니다. 그리고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지 않고 무시하고 비난하고 비방하여 상대방을 깎아내리게 되는 것입니다. 이 두 여인 때문에 빌립보교회가 다툼과 허영에 빠져 불화하게 된 것입니다. 그리하여 교회는 더 이상 기쁨의 공동체가 되지 못했고, 신자들 역시 기쁨의 삶을 살지 못하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1)서로 경쟁하지 말고, 대신 2)겸손한 마음으로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라고 말한 것입니다.

본문 역시 그 갈등에 대한 해결책입니다. 갈등을 넘어 기쁨을 회복하는 비결에 대한 말씀입니다. 여기서 바울이 제시한 것은 ‘관용’입니다. 관용은 양보하는 마음, 이해하고 용서하는 마음, 너그러운 마음, 넉넉하게 포용하는 마음, 넓은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 기쁨이 있습니다. 관용하는 마음에는 경쟁이 존재할 수 없습니다. 갈등도 관용하는 마음 앞에선 사라집니다. 문제는 좁고 편협한 마음입니다. 마음이 좁고 편협하기 때문에 서로를 자기보다 낫게 여기지 못하고, 양보하지 못하고, 용서하지 못하고, 항상 각을 세우고 갈등구조를 만들어 모든 관계를 경쟁관계로 이끌어 갑니다. 특히 사람의 마음에 암 덩어리가 있는데, 그것은 관용하지 못하는 마음입니다. 마음이 좁고 편협하여 용서도 양보도 너그러움도 넉넉함도 없는 마음입니다. 이런 마음에는 기쁨이 없습니다. 다섯 가지 종류의 웃음이 있습니다. 하하, 호호, 허허, 해해, 희희가 그것입니다. 어떤 사람이 이것을 다섯 가지 마음으로 해석을 했습니다. 즉 (하하)마음을 낮추고(下), (호호)좋은 마음을 품고(好), (허허)마음을 비우고(虛), (해해)스트레스를 해소(解)하는 곳에, (희희)기쁨이 있다(喜)고 해석했습니다. 새겨둘 만합니다. 이런 마음의 태도가 어디서 오겠습니까? 관용하는 마음에서 오는 것입니다.

원수까지 사랑하셨던 예수님의 마음처럼, 넓고 큰 마음, 관용하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그래야 자신을 낮추는 겸손한 마음, 항상 모든 것을 좋게 보고 좋게 생각하는 좋은 마음, 세상 것 다 비워내고 주님의 기쁨 주님의 사랑 주님 은혜만 채우려는 빈 마음, 모든 스트레스로부터 자유로운 참으로 기뻐하는 마음을 가질 수가 있는 것입니다.  

2.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우리 몸에서는 아드레날린이라고 불리는 강력한 호르몬이 분비되고 있습니다. 우리 몸에서 이 아드레날린의 효과는 미사일의 로켓 연료와 비교할 수가 있다고 합니다. 아드레날린이 혈액 속으로 들어가서 두려움, 흥분, 또는 극도의 감정에 대응할 수 있는 힘을 만들어 준다고 합니다. 원래 이 아드레날린은 우리 몸에서 즉시 연소되게 만들어졌지만, 만약 이것이 완전히 소모되지 않고 남아 있으면 오히려 몸에 좋지 않는 영향을 미친다고 합니다. 즉 아드레날린이 남이 있으면 쉽게 신경질을 내고, 냉소적이 되기도 하고, 쉽게 피곤하고, 상처를 잘 받고, 더 빨리 늙는다고 합니다. 이 아드레날린을 우리 몸이 다 소비하여 삶의 힘으로 전환시키지 못하고, 도리어 그것을 우리 몸에 축척시켜서 우리 몸을 해롭게 만드는 것이 있습니다. 그것이 바로 스트레스와 염려입니다. 우리가 염려하면 소량의 아드레날린이 하루 종일 우리 몸에 남아 있게 되고, 몸에 좋지 않는 영향을 미치게 되는 것입니다.

기쁨을 소멸시키는 또 하나의 주범이 바로 이 염려입니다. 염려란 ‘질식시키다.’ ‘목 졸라 죽이다.’라는 말과 어원이 같습니다. 이 어원만 가지고도 염려가 어떤 것인지, 얼마나 고약한 것인지 알 수가 있습니다. 염려는 우리 안에 있는 기쁨, 소망, 감사, 믿음 등을 질식시킵니다. 그러므로 염려하는 사람에게 기쁨은 없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반드시 이 염려를 극복해야 합니다. 그 비결이 기도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아무 것도 염려하지 말고, 오직 모든 일에 기도와 간구로 너희 구할 것을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라.” 파도처럼 밀려오는 염려를 이기는 힘은 기도입니다. 기도할 때, 염려는 사라지고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켜주십니다(7절). 그때 비로소 우리는 기쁨의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염려는 심리적인 것입니다. 마음의 문제이고, 생각의 문제입니다(7절 참조). 내 마음을 내 마음대로 못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어야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으면 슬플 일밖에 없어도 기쁘고, 고통을 당해도 찬송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에서 떠나면 만나는 일마다 모두 걱정입니다. 돈이 많으면 돈 지키느라 걱정, 돈 없으면 없어서 걱정, 걱정이 팔자가 됩니다.(라스베가스의 호텔 왕 하워드 휴Howard Hugh.......)

그러나 하나님의 평강이 내 마음을 덮을 때, 내 마음에 진정한 평안이 있고, 이것이 우리를 감사로 인도하고, 은혜로 인도하고, 약속으로 인도하고, 믿음으로 인도합니다. 소망의 삶으로 인도합니다. 또한 생각을 다 지켜 주십니다. 똑 같은 상황과 사건도 어떻게 생각하느냐에 따라 전혀 다르게 반응하게 됩니다. 기도하면 하나님께서 우리의 생각을 붙들어 주십니다. 항상 좋은 생각, 감사한 생각, 긍정적이고 밝은 생각만 하게 합니다. 하나님의 평강이 그리스도 안에서 우리 마음과 생각을 지배하시므로 우리는 기뻐하는 삶을 살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 비결이 기도입니다. 감사함으로 하나님께 아뢰는 것입니다.

3. 기뻐하는 것은 선택해야 하는 삶의 방식입니다.
어떤 사람이 의사와 면담을 했습니다. 그는 불평을 늘어놓기 시작합니다. ‘선생님, 요즘 와서 만지는 곳마다 아픈 것 같습니다. 무릎을 누르면 무릎이 아프고, 배를 누르면 배가 아픕니다....... 도대체 이유가 무엇 때문인가요? 늙어가는 증거인가요?’ 그래서 의사는 전신 엑스레이 촬영을 시도했고, 엑스레이 결과를 검토한 의사는 천천히 말하기 시작했습니다. ‘왜 만지는 곳마다 아픈지 이유를 알 것 같습니다.’ 의사는 엑스레이 사진을 가리키며,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당신의 손가락이 부러져 있습니다.’

삶의 방식(태도)이란 마치 부러진 손가락과 같습니다. 몸에는 아무 이상이 없는데, 손가락이 닿는 곳마다 아픕니다. 몸에 이상이 있어서가 아니라 손가락이 부러졌기 때문입니다. 태도도 마찬가집니다. 태도가 우리 삶 전체에 영향을 미치는 것입니다. 태도가 나쁘면 삶도 나빠지고, 태도가 좋으면 삶도 좋아집니다. 기뻐하는 것도 하나의 삶의 태도(방식)문제입니다.

본문의 ‘기뻐하라’는 헬라어로 카이레테인데, 이것은 습관적 지속적으로 기뻐하라는 의미입니다. 즉 끊임없이 기쁨을 선택하라는 말씀입니다. 우리의 삶은 원망과 불평, 기쁨과 감사 등으로 섞여 있습니다. 문제는 어느 것을 선택하느냐가 중요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이것은 기뻐하는 삶을 선택하라는 주님의 명령입니다. 따라서 우리는 이 말씀 앞에 ‘알겠습니다. 순종하겠습니다. 항상 기뻐하겠습니다.’라고 반응해야 합니다. 이것이 믿음입니다. 도저히 기뻐할 수 없는 상황이고 환경이지만 주님이 기뻐하라고 하셨으므로 그 말씀에 순종하는 것. 이것이 믿음입니다. 믿음의 결단입니다.

엘리노 포터라는 사람의 「폴리아나」라는 책이 있습니다. 목사의 딸인 폴리아나는 아빠가 죽자 이모에게 보내지는데, 어렵고 힘든 속에서도 항상 “......하기 때문에 기쁘다.”고 말을 합니다. 이에 동네사람들이 궁금해 묻자, 폴리아나는 “아빠가 힘들고 어려울 때 ‘기뻐하기 게임’을 하라고 가르쳐 주셨는데, 어려움 속에서 기쁜 것이 무엇인지 찾는 거예요. 처음에는 조금 어렵지만 자주 하다보면 익숙해지고, 나중에는 세상 모든 것들이 기쁜 일로 가득 차게 보여요.”라고 대답을 합니다. 이처럼 기뻐하기 게임을 여러분에게 제안합니다. 이것은 선택의 게임입니다. 지금 내가 처한 상황에서 어느 것을 선택할 것인지. 그것은 우리가 선택해야 할 몫입니다. 항상 기쁨과 감사를 선택하는 분들이 되길 축원합니다.

“항상 기뻐하라.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지금 기뻐할 상황이 아닙니까? 그러나 성경은 말씀합니다.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진짜 기뻐할 수 없습니까? 그래서 성경은 말씀합니다. “내가 다시 말하노니, 기뻐하라.” 주님, 기뻐할 조건도 상황도 아니지만, 주께서 말씀하시니 기뻐하겠습니다. 이런 마음이 필요합니다. 그때 기쁨이 우리 마음을 지배할 것입니다. 그리하여 기쁨으로 이 한 해를 마감하고, 기쁨으로 새로운 한 해를 맞이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6 / 6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