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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더 좋은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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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3,150회 작성일 16-01-03 1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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끝이 더 좋은 사람

눅2:25-35

2016. 1/3. 08:00, 11:00(신년주일, 개당기념주일)

끝이 좋아야 모두 좋다.

연말이나 연초에 자주 듣는 말로 우리를 매우 난처하고 초라하게 만드는 한자어가 있다. ‘작심삼일’(作心三日)과 ‘용두사미’(龍頭蛇尾)란 말이다.

 

용두사미는 ‘용머리에 뱀꼬리’라는 말로 ‘화려하게 시작해서 흐지부지 끝을 맺는 것’을 두고 한 말이다. 지금까지 우리의 삶이 그랬던 것 같다. 항상 년 초마다 무엇인가 대단한 것을 이룰 것처럼 엄청난 계획을 세워보지만 작심삼일로 그치다보니 연말에 가서보면 내놓을 것이 없는 빈손인 경우가 많다. 이것이 대부분 사람들의 반복된 생활이다. 물론 ‘시작이 반이라’는 말도 있다. 시작하는 것이 어렵다는 뜻에서 나온 말이다. 그러니 시작을 했다면 이미 절반은 이룬 것이나 다름없다는 것이다. 일을 저지르기만 하고 끝맺음이 좋지 않는 것도 문제지만 너무 신중한 나머지 어떤 일을 시도하지 못한 것도 문제다. 아무튼 가장 바람직한 것은 시작과 끝이 다 좋은 것이다. 특히 신앙은 시작도 중요하지만 끝이 더 중요하다. 오늘은 2016년도 첫 주일이다. 바라기는 2016년도는 우리 모두에게 정말 끝이 좋은 한 해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이 시간에 스스로 자신의 끝을 만족하게 여긴 한 사람을 소개하려고 한다. 그를 통하여 우리 삶의 더 좋은 끝, 영광스러운 결말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리는 사람

본문은 노년이 좋았던 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인생의 끝을 아름답게 마무리한 사람을 소개하고 있다. 시므온이라는 사람이다. 시므온은 유대사회에서 흔한 이름이다. 혹자는 그가 당시 잘 알려진 랍비 힐렐의 아들이요 가말리엘의 아버지로 주후13년에 산헤드린회장이 되었다고 말한다. 그러나 이것은 추측일 뿐 정확한 근거는 없다. 중요한 것은 그가 누구의 아들이고, 누구의 아버지이며, 어떤 직위에 있었느냐가 아니다. 하나님 앞에 어떻게 살았느냐이다. 그는 평생 ‘의롭고 경건하게 살면서 이스라엘의 위로를 기다렸다.’(25). 여기서 ‘이스라엘의 위로’란 그리스도(메시야)가 오셔서 이스라엘을 회복하실 때 받는 위로를 뜻한다. 하나님은 말라기 선지자이후 약 400년 동안 이스라엘에 선지자를 보내지 않으셨다. 그래서 이 시기를 ‘침묵의 시대’, 혹은 ‘암흑의 시대’라고 부른다. 이런 시대를 살면서도 시므온은 그리스도의 오심을 확신하며 끈기 있게 기다리는 믿음을 가졌다. 그는 오늘 우리에게 예수님의 재림을 기다리는 삶이 어떤 것인가를 보여주는 좋은 모범이다.

 

그는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성령의 지시’를 받았다(26). 언제일지는 몰라도 죽기 전에 반드시 그리스도를 보게 되리라는 약속이었다. 이런 기다림의 끝에 드디어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다. 율법에 따라 정결예식을 치르기 위해 예루살렘을 방문했을 때였다. 유대인은 아들이 태어나면 8일 만에 할례를 행하고(21), 그 아이가 첫아들일 경우는 두 가지 예식을 행하였다. 하나는 아이를 하나님께 구별하여 드리는 예식(獻兒式)이고, 다른 하나는 산모의 정결예식이다(남자 아이를 낳았을 경우 40일, 여자 아이는 80일 후에 정결예식을 행함). 본문에서 마리아와 요셉이 성전을 방문한 것은 이 두 가지 예식을 행하기 위해서다(22~24). 아무튼 시므온으로서는 평생의 소원이 응답되는 날이었다. 그는 얼마나 기뻤던지 “주재여 이제는 말씀하신 대로 종을 평안히 놓아 주시는도다.”(29) 라고 노래했다(Nunc Dimitis). 그가 성령의 약속을 믿고 얼마나 간절히 그리스도를 기다리면서 살았는지, 그 기다려온 세월이 잘 느껴진다. 그의 고백처럼 지금 죽어도 여한이 없을 만큼 그의 마지막은 충만했다. 실제로 성경이 보여준 그의 마지막은 찬양과 축복, 예언이었다. 그가 이렇게 멋진 끝을 맺을 수 있었던 비결이 있다.

 

그리스도께 매인 생활

매여 있어야 편함을 느끼는 병이 있다. ‘매임병’(stuckititis)이라는 것이다. 사람은 누구나 무언가에, 어딘가에, 누군가에 매여 있다. 또한 매여 있기를 원한다. 이것을 사회학적으로 ‘소속감’이라 한다. 이 소속감을 철학적으로 ‘정체성’이라 하고, 종교적으로는 ‘신앙’이라고 한다. 사람은 매인 데가 없으면 살 수가 없다. 그래서 ‘나는 소속되어 있다. 고로 나는 존재한다.’는 말이 있는 것이다. 그런데 문제는 누구에게 매여 있고, 무엇에 매여 있느냐다. 매여 있을 만한 것에 매여 있으면 복이지만 그렇지 못하면 구속이 되고 불행이 된다. 가족은 가정에 매여 있어야 정상이고, 이때 편안함을 느낀다. 남편은 아내에게 매여 있고, 아내는 남편에게 매여 있어야 좋다. 그래야 서로 든든한 버팀목이 된다.

 

신앙도 마찬가지다. 신자로 산다는 것은 매이는 것이다. 주님의 몸된 교회에 매이고, 예배에 매이고, 기도에 매이는 것이다. 주님의 은혜에 매이고, 주님의 사랑에 매이는 것이다. 주님의 말씀에 매이고, 주님의 복음에 매이는 것이다. 성령에 매이는 것이다. 무엇보다도 우리 구주 예수 그리스도께 매인 것이다. 이렇게 주님께 매인 것은 구속이 아니다. 오히려 죄의 속박으로부터 자유, 사단의 정죄와 권세로부터 자유를 뜻한다. 지옥의 형벌로부터 자유, 사망으로부터 자유를 뜻한다. 주님께 매일 때 세상의 줄이 끊어진다. 죄에 대한 욕망이 끊어지고, 세속적인 욕구가 끊어진다. 옛 생활과 습관이 끊어진다. 주님께 매인 것은 새에게 있어서 날개와 같고, 연에게 있어서 연줄과 같다. 새는 날개가 있어 자유롭게 공중을 날 수가 있는 것이고, 연은 줄이 있어 더 높이, 더 멀리 날 수가 있는 것이다. 시므온이 그의 삶을 아름답게 매듭지을 수 있었던 것은 그리스도께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그는 성령으로부터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않을 것이라는 계시를 받았다. 그 후 그는 여기에 매여 예루살렘을 떠나지 않고 살았다. 그래서 결국은 그리스도로 오신 아기 예수님을 만나는 영광을 경험하게 된 것이다. 특히 성경은 그를 ‘의롭고 경건한 사람’이라고 소개를 하고 있는데, 그에게 이런 삶이 가능했던 것 역시 그의 삶이 그리스도께 매여 있었기 때문이다.

 

성령에 이끌리는 생활

또 하나 본문에서 시므온의 삶에 특징적으로 나타나는 것이 ‘성령의 역사하심’이다. 짧은 구절에서 성령의 역사하심이 3번이나 언급이 되고 있다. ‘성령이 그 위에 계시더라.’(25). ‘성령의 지시를 받았더니’(26). ‘성령의 감동으로’(27). 이는 한 마디로 그가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을 하였다는 뜻이다. 그는 성령의 지시로 그리스도를 보기 전에는 죽지 아니하리라는 계시를 받았고, 성령의 감동으로 성전에서 아기 예수님을 만났다. 그리고 그는 아기 예수님을 안고 이렇게 찬양했다. “내 눈이 주의 구원을 보았사오니 만민 앞에 예비하신 것이요 이방을 비추는 빛이요 주의 백성 이스라엘의 영광이니이다.”(30~32). 그는 예수님께서 이스라엘은 물론 만민과 이방을 비추는 빛이라고 하였다. 그리스도의 구속이 인류를 향하신 포괄적 사역임을 찬양하는 내용이다. 사실 이 부분이 참으로 놀라운 내용이다. 그가 어떻게 가난한 부부의 아기에게 이런 놀라운 찬양을 드릴 수가 있고, 이어서 그 부모를 축복하고 예언까지 할 수 있었을까? 그것은 성령께서 아기 예수님이 그리스도이심을 알게 해주셨기 때문이다. 이것은 그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정말 그는 성령과 동행하는 성령에 민감한 사람, 성령의 지배를 받는 사람, 그래서 영안이 열리고, 영적인 귀가 열린 사람이었다. 아무나 예수를 그리스도라 고백할 수 없다. 성령을 통해서만 가능하다. “그러므로 내가 너희에게 알리노니 하나님의 영으로 말하는 자는 누구든지 예수를 저주할 자라 하지 아니하고 또 성령으로 아니하고는 누구든지 예수를 주시라 할 수 없느니라.”(고전12:3). 영안이 열리지 않는 사람은 부활하신 주님과 함께 길을 걷고, 가르침을 받고, 함께 식사를 하면서도 알아보지 못했다(눅24:13~31). 시므온이 그의 삶을 아름답게 매듭지을 수 있었던 또 하나의 비결은 성령에 이끌리는 생활을 했기 때문이다.

 

앞에서 의롭고 경건한 생활이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생활과 관련이 있다고 했다. 성령의 지배를 받는 생활 역시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생활과 관련이 있다. 왜냐하면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이다. 성령은 그리스도의 영이기 때문에 그리스도께 매여 있는 사람은 성령의 지배를 받을 수밖에 없다. 성령과 동행하는 성령에 민감한 사람일 수밖에 없다. 그리고 성령에 민감한 사람은 하나님의 사랑을 받고, 하나님의 사랑을 받은 사람은 모든 것이 합력하여 선을 이루는 복을 경험하게 된다. 시므온처럼 주님께 매여서 성령에 민감한 사람이 되기를 바란다.

 

주님이 문을 열어주시도록

어느 교회 여선교회에서 회장을 선출했다. 회장 후보로 추천을 받은 분이 말했다. ‘미안해요. 우리 남편의 사업이 너무 바쁩니다. 일 년 후에 추천하여 주시면 열심히 하겠습니다.’ 완곡하게 거절하였다. 할 수 없이 다른 분을 추천하여 회장으로 뽑았다. 그분이 말했다. ‘남편이 새로운 사업을 계획하고 있습니다. 주님의 일을 위하여 일 년만 미루자고 권하고, 여선교회를 잘 섬기겠습니다.’ 그리고 일 년이 지났다. 남편을 돕겠다며 회장을 미룬 분의 남편사업은 형편없이 기울었다. 그러나 여전도회를 충성스럽게 섬기기 위해 사업을 뒤로 미루도록 하겠다던 분의 남편사업은 정신없이 번창하였다. 사람이 계획할지라도 그 걸음을 인도하시는 이는 하나님이시라고 했다. 인간의 화복(禍福)은 하나님의 손에 달렸다. 하나님이 열어주셔야 열리는 것이다. 하나님이 닫아버리시면 아무리 발버둥을 쳐도 헛수고가 되고, 하나님이 열어주시면 복이 쏟아지는 것이다. 이런 복의 원리를 알고 주님을 더욱 잘 섬기기를 바란다.

 

주님이 열어주시면 시작은 미약하나 나중이 창대한 복, 끝이 더욱 좋은 복을 경험하게 될 것이다. 어떤 사람이 주님의 이런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주님께 매인 사람이다. 주님의 사랑에 매이고, 주님의 은혜, 주님께서 맡겨주신 사명에 매인 사람이다. 그래서 성령의 이끌림을 받는 사람이다. 그러면 우리 또한 시므온처럼 끝이 좋은 사람들이 될 것이다. 용두사미는 우리와 상관이 없는 말이 되고, 2016년도를 정말 아름답게 마무리를 지을 수가 있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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