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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의 위험(07-02-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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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797회 작성일 07-02-05 12:3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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빈 집의 위험
마12:43~45  

삶의 의미를 찾아서
어느 여학교에서 선생님이 학생에게 나르시시즘이라고 하는 단어와 그 유래에 대해서 설명을 하고 있었습니다. 본래 이것은 그리스 신화에서 나오는 이야기로, 나르시스라고 하는 소녀가 살았는데, 숲 속의 은빛 고요한 아름다운 호수에 비친 자기 얼굴이 너무나 사랑스러워서 거기다 대고 사랑을 고백했지만 물론 상대방이 반응을 보이지 않기 때문에 그만 물 속에 빠져서 죽어 수선화가 되었다라고 설명을 해주었습니다. 즉 ‘자기 자신을 지나치게 사랑하는 병, 자애(自愛)병, 이것이 나르시시즘이다.’고 설명을 했습니다. 그러자 어느 여학생이 "선생님, 아무리 생각해도 제가 그 병에 걸렸나 봐요. 저는 거울을 볼 때마다 제가 너무 예뻐요. 너무 예뻐서 거울을 떠날 수가 없고, 때로는 제 얼굴을 제가 들여다보면서 아주 미치게 될 때가 많습니다."하고 말했습니다. 선생님이 대답하기를 "그것은 자애(自愛)병이 아니라 착각증(錯覺症)이란다." 라고 말했습니다.

자기가 자신을 안다는 것, 참으로 중요한 것입니다. 그리고 자기가 자기에게 속고 있다는 것, 그것처럼 비참한 것도 없습니다. 아무리 바빠도 우리는 잠깐 내가 누군지를 알아야겠습니다. 내 운명의 시점이 어디까지 왔는지, 나는 도대체 무엇 때문에 살아야 하는지? 생각해야합니다. 사실 자기 자신을 모르는 데서부터 모든 문제가 파생됩니다.

의사이자 심리학자인 빅터 프랭클(Viktor E. Frankl)이라고 하는 분이 "삶의 의미를 찾아서"(The Will to Meaning)라고 하는 책을 썼는데, 그 속에서 '공허감과 무의미'에 대해 이야기하고 있습니다. 공허감과 무의미에 시달리는 인간상태를 그는 철학적으로 이렇게 부릅니다. 존재적 진공상태(existential vacuum), 아주 의미 있는 말입니다. 사람은 멀쩡한 것 같은데 속이 텅 비었습니다. 진공상태. 여기 문제가 있는 것입니다. 왜 사람들이 존재적 진공상태에 빠지는가? 자신의 존재의미를 찾지 못해서 그렇습니다. 인간은 본능적 충동으로 자신의 존재를 채울 수가 없습니다. 이것이 인간이 동물과 다른 점입니다. 동물은 충동만 충족되면 그것으로 행복하고 만족합니다. 그러나 인간은 아닙니다. 그렇다고 전통이나 관습, 문화적 가치관. 여기에 따라간다고 해서 그것이 삶의 존재를 말해주지 않습니다. 남들이 가진 대로 가지고, 남들이 먹는 대로 먹고, 남들이 하는 대로 문화, 풍속, 전통을 충실하게 따른다고 해서 인간의 존재 의미를 찾을 수는 없습니다. 바로 이 의미를 찾지 못할 때 인간은 존재적 진공상태에 떨어집니다.

존재적 진공상태
존재적 진공상태에 있는 사람은 두 가지 경우로 빠지기가 쉽습니다. 하나는 동조(同調)주의입니다. 무조건 남이 하는 대로 따라가는 것입니다, 아무런 생각없이 남이 하니까 하는 것입니다. 이 사람에게 자기는 없습니다. 또 하나는 전체주의(예, 나치즘이나 파시즘)에 빠집니다. 다른 그 누군가가 자신을 이끌어주기를 바라고, 강압적으로 해주기를 바라고, 자기는 그저 따라가고만 싶은 것입니다. 그래서 독재자가 이 세상에 존재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는 참으로 중요한 이야기입니다. 가끔 교회에서도 교인들이 존재적 진공상태에 빠져서 동조주의, 나아가서 전체주의적인 경향을 보이는 경우가 있습니다. 교회가 목회자나 힘있는 몇 사람에게 휘둘리고, 다른 신자들은 맹목적으로 따라가는 것을 은혜로 착각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빈집 이야기
오늘 본문은 한 집에 대한 이야기입니다. 한 집이 있습니다. 그 집에 귀신이 들어가서 그 집을 엉망으로 만들어놓았습니다. 귀신도 살 수 없을 만큼 집이 망가졌습니다. 그래서 귀신이 그 집을 나갔습니다. 귀신이 나가자 집 주인이 그 집을 깨끗이 청소하고 수리도 했습니다. 그렇지만 주인은 그 집을 비워두었습니다. 전에 이 집에서 살던 귀신이 여기저기 돌아다니다가 갈 곳이 없어 다시 이 집을 찾아 왔습니다. 집은 깨끗이 청소가 되고 수리도 되어 있습니다. 그런데 비어 있습니다. 귀신도 양심은 있었던지 혼자서 그 수리된 집엘 들어갈 수가 없었습니다. 그래서 주변에 자기보다 더 악한 귀신 일곱을 데려와 그 집에서 함께 살게 되었습니다. 그리하여 그 집의 형편이 전보다 훨씬 나빠졌습니다.

집은 비워두면 못씁니다. 초가라도 사람이 살면 무너지지 않습니다. 그러나 아무리 좋은 집이라도 사람이 살지 않고 비워두면 무너집니다. 자동차나 그릇, 연장 등 모든 것이 마찬가집니다. 사람의 마음도 공백상태가 되면 문제가 생깁니다. 결국은 악한 것들로 채워지게 되는 것입니다. 삶이 심각하게 망가지게 되는 것입니다. 귀신이 나가고, 집이 청소가 되고 수리가 된 것. 좋은 일입니다. 하지만 문제는 비워두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청소하고 수리를 하였으면 그 집에서 사람이 살아야합니다. 살면서 지속적으로 관리해야 합니다. 새로운 것으로 채워야 합니다. 그렇지 않으면 그 형편이 전보다 더 나빠집니다.

빈집의 의미
예수님께서 이 빈집 이야기를 마치면서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이 악한 세대가 또한 이렇게 되리라.”(45) 이 이야기는 예수님 당시를 상징한다는 것입니다. 특히 당시 사람들의 정신적, 영적인 생활을 주도하고 있던 유대교 신자들에 대한 경고의 말씀입니다. 당시 유대교는 종교적 형식에만 매달린 생명력을 상실한 종교였습니다. 이런 종교는 형식적인 율법만 강조하고, 이들이 강조하는 율법의 특징은 무엇이든지 하지 말라는 것입니다. 물론 이 ‘하지 말라’는 율법이 마음을 비우게 할 수 있고, 깨끗하게 할 수 있습니다. 그러나 비운 곳을 채울 수는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당시 유대교의 약점이었습니다. 유대종교의 율법이 사람의 마음을 비우게는 했지만 빈 그곳을 채워주지는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은 생명력을 상실한 저들을 향하여 회칠한 무덤이라고 책망했던 것입니다.

유대인들의 이와 같은 종교생활이 오늘날도 계속되고 있음을 확인했습니다. TV 프로에 나온 것인데, 어느 개그맨이 예루살렘을 갔습니다. 뒤에는 카메라가 따라다니고 있고 그가 거리를 왕래하는데, 점잖은 사람이 그를 붙들고 "저희 집에 잠깐 들어오십시오."하고 초대를 했습니다. 영문도 모른 이 개그맨이 그 집에  따라 들어갔더니 전기 스위치를 가리키면서 "이 전등스위치를 이렇게 내려주세요."라고 말을 합니다. "왜요?"하고 물으니까. "오늘이 안식일이라서 내가 일을 할 수가 없어 당신이 좀 대신 해주십시오." 정말 웃기는 개그지요. 아니 이것이 성경에나 있는 얘기인줄 알았더니 오늘날도 있었습니다. 안식일 범하는 것이 죄라면 남도 안식일 지키도록 해줘야지 자기 안식일 지키기 위해서 남보고 죄지으라니 이런 얌체가 어디 있습니까.

왜 이런 해프닝이 일어납니까? 하지 말라는 계명에만 붙들려 있기 때문입니다. 분명 우리 기독교는 유대교에 뿌리를 두고 있습니다. 유대교에서 경전으로 사용하고 있는 구약을 성경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그런데 우리 기독교가 유대교와 다른 것은, 우리 기독교는 ‘하라’는 종교입니다. 단순히 마음을 비우는데 집중하지 않고 비운 곳을 채우는 것에 집중하는 종교입니다. 이것이 예수님의 사역이었습니다. 유대인들은 예수님을 율법의 파괴자라고 생각했지만, 예수님은 ‘하라’는 율법의 적극적인 면을 가르치고 실천하신 분이십니다.

당시 유대인들은 하지 않은 것을 죄로 생각하지 안했습니다. 이웃을 미워하지만 않으면 된다고 생각했습니다. 그렇지만 예수님은 미워하지 않는 것으로 만족하지 않으셨습니다. 예수님은 사랑하지 않은 것이 죄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봉사하지 않은 것이 죄요. 그를 위하여 희생하지 않은 것이 죄입니다. 구원을 기다리는 사람에게 도움을 주지 않는 것이 죄입니다(눅10:25절 이하에 나온 선한 사마리아인 비유가 이를 잘 보여줌). 할 수 있는데 아무 일도 안하는 것. 그것이 죄입니다. 야고보는 “사람이 선을 행할 줄 알고도 행치 아니하면 죄니라”(약4:17)고 하였습니다.

빈집의 교훈
오늘 이 빈집의 비유가 주는 교훈이 바로 이것입니다. 그저 청소하고 수리하여 비워두지 말고, 새로운 것으로 채우라는 것입니다. ‘하지 말라’의 삶에 묶여 있지 말고 ‘하라’의 삶으로 전환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날 신자들 중에도 신앙생활을 이렇게 오해한 사람들이 있습니다. 신앙생활은 은혜를 받은 일로 끝나는 것이 아닙니다. 그것이 시작입니다. 비로소 우리 신앙은 하나님의 은혜에서 시작이 되는 것입니다. 하나님의 은혜로 더러워지고 부서진 우리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하게 됩니다. 그리고 그곳에 새로운 것으로 채우는 것도 하나님의 은혜입니다. 우리가 집을 청소하고 수리한 이유는 그 집에 살기 위해서입니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은혜를 베푸셔서 우리 마음을 청소하고 수리하심도 하나님께서 우리 마음을 성전삼아 살기 위해서입니다. 주님의 은혜를 입은 우리는 우리의 마음에 주님을 주인으로 모시고 받은 은혜대로 주님을 섬겨야합니다. 이것이 바로 빈집의 위기를 극복하는 길입니다. 그러면 받은 은혜가 풍성한 열매로 나타나게 되는 것(갈5;22~23)이고, 이를 통하여 주님이 영광을 받으신 것(요15:8)입니다.

그러므로 ‘은혜 받았으니 이제 나는 아무것도 하지 않아도 된다.’ 아닙니다. 이것은 아주 위험하고 잘못된 생각입니다. 예수를 잘 믿는다(?)는 어느 집사님 집에 불이 났습니다. 동네 사람들이 불을 끄기 위해 그릇을 들고 달라왔습니다. 그 때 집 주인인 이 집사님이 동네 사람들을 말렸습니다. 기도만 하면 우리 하나님이 불을 꺼주실 것이니 그냥 돌아가라고 했습니다. 여러분, 하나님이 이 집사님의 기도를 들어주어 불을 꺼주셨을까요?

반대로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미국의 유명한 부흥사 D.L.무디의 일화입니다. 무디가 영국에서 집회를 인도하고 배를 타고 미국으로 돌아오는 배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대서양 한복판에서 한 선원의 잘못으로 배위에 불이 났습니다. 그러자 무디도 물동이를 나르며 불을 껐습니다. 곁에 있던 사람들이 무디에게 ‘불은 우리가 끌 테니 목사님은 하나님께 기도해 주세요.’라고 말했습니다. 그러자 무디가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지금은 함께 불을 끄는 것이 하나님께 기도하는 것입니다.’ 여러분, 위 두 이야기 중 어느 쪽이 참 믿음의 태도입니까? 은혜를 받았으니 아무 것도 하지 않는 것이 아니라 은혜를 받았기에 그 은혜로 무엇인가를 해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야 받은 은혜가 은혜가 되는 것입니다. 주님께 이 큰 은혜를 받았으니 내가 무엇으로 그 은혜를 보답할까 하는 심정으로 사는 것이 참된 신앙인의 모습입니다.

지난주간에 가진 부흥회는 마치 집에서 귀신이 나가고 깨끗이 청소가 되고 수리가 된 것처럼, 우리들의 마음을 주님의 은혜로 청소하고 수리하는 기간이었습니다. 이제 중요한 것은 은혜를 받은 이후의 생활입니다. 은혜를 받고 잘 관리하지 않으면 집을 청소하고 수리하여 비워둔 것과 같은 것입니다. 때때로 은혜를 받고 더 큰 시험에 빠진 사람들이 있습니다. 믿기 전보다 더 악화가 된 사람들도 있습니다. 그것은 청소와 수리만 하고 비워두었기 때문입니다. 때문에 전보다 더 악한 귀신이 들어와서 그 형편을 더욱 어렵게 만들어 버린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본문은 우리 마음을 비워두지 말 것을 교훈하고 있는 것입니다.

여러분, 공허와 진공과 허탈. 그 다음에는 절망입니다. 빈집은 위험합니다. 아무 것도 안하면 아무 것도 할 수 없게 됩니다. 보십시오. 발을 사용하지 않으면 발이 약해지고. 허리를 사용하지 않으면 허리가 약해집니다. 눈을 사용하지 않으면 눈이 침침해집니다, 무엇이든지 사용해야 됩니다. 건강해서 일하는 것보다 일을 함으로 건강해 진다는 것을 잊지 말아야 합니다. 열심히 기쁜 마음으로, 사랑과 충성된 마음으로 일할 것이요. 그것이 삶의 길이요, 존재의 의미를 창출하는 길입니다. 긍정적이고 창조적으로 힘써 일함으로, 보람을 찾고 내 존재의 가치가 확충이 됩니다. 그리고 일하면서, 충성되게 일하면서 주님의 역사를 이룰 때, 아주 충만한 생을 살아갈 수 있게 되는 것입니다. 청소되고 수리된 우리 마음을 채웁시다. 말씀과 성령을 채우고, 기도를 채우고, 섬김과 봉사, 사랑으로 가득 채웁시다.

※생각해 봅시다.
1. 금번 성회를 통해 청소되거나 수리된 것들이 있다면 무엇입니까?
2. 청소되고 수리된 마음에 새롭게 채워야 할 것들이 무엇인지 이야기해 봅시다.
3. 주어진 말씀을 통해 받은 은혜를 두 사람 이상에게 나누어 봅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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