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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생각나게 한 사람(07-03-0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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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5,764회 작성일 07-03-05 12:2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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예수를 생각나게 한 사람
요14:7~10, 빌2:5~8

배고픈 호랑이가 있었습니다. 너무 오래 굶어서 기진맥진할 지경이었습니다. 잡아먹을 만한 동물이 눈에 띄지 않았습니다. 먹을 것이 없어서 하나님께 기도했습니다. "하나님, 이번 한번만 사람을 먹을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나님께서 대답하셨습니다. "좋다. 그러나 예수 향기가 나는 사람은 먹지 말거라."

호랑이는 수풀에 웅크리고 앉아서 먹이로 걸려들 사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 때 한 나그네가 흥얼거리며 그곳을 지나가고 있었습니다. "사랑합니다. 나의 예수님. 사랑합니다. 아주 많이요......."

호랑이는 실망스러웠지만 행여나 하는 마음에 "어흥~!"하고 크게 소리를 쳤습니다. 그러자 깜짝 놀란 나그네가 뒤로 벌렁 넘어졌는데, 공교롭게도 발이 호랑이 입 속으로 들어가 버렸습니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입니까? 그의 발에서는 예수님의 향기가 나지 않았습니다. 온통 유흥장 냄새, 오락실 냄새, 술집 냄새 등 세속적인 죄악의 냄새만 났습니다. 그래서 호랑이는 나그네를 발부터 시작해서 맛있게 먹어 올라갔습니다. 그렇지만 그의 어느 곳에서도 예수님의 향기가 나는 곳은 없었습니다. 그의 손도, 그의 몸도, 그의 심장....... 다 먹고 이제 머리만 달랑 남았는데, 나그네의 입에서만 간신히 예수님의 향기를 느낄 수가 있었습니다. 그나마 그 입으로 주님을 찬양하였기 때문입니다.

처음 이 이야기를 읽을 땐 그저 우스개 소리로만 보였습니다. 그런데 다시 읽어보니 제 마음에 찔림이 있었습니다. 입으론 신앙생활을 무척 잘 한 것 같지만, 실제의 삶은 얼마나 예수님의 삶과 멀리 떨어져 있는지. 불순종하고, 판단하고, 분내고, 험담하고, 절망하고, 낙심하고, 게으르고, 종종 마귀 같은 모습을 하고 사는 제 모습을 생각하니 주님께 너무 죄송한 마음이 들었습니다. 호랑이가 나에게서 예수님의 향기를 맡을 수 있을까? 바울은 우리를 그리스도의 향기라(고후2:15)고 말하였습니다. 아무튼 입술뿐만 아니라 머리부터 발끝까지, 속에서부터 겉까지 예수님의 향기로 점령되길 간절히 소망해 봅니다.

헨리 나우웬의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란 책이 있습니다.(오늘 저의 설교제목은 바로 여기서 가져온 것입니다.) 여기서 저자는, 제자란 예수를 생각나게 하는 사람이어야 한다고 말합니다. 즉 1)예수님의 치유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2)예수님의 붙드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 3)예수님의 인도하심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그렇습니다. 무엇보다도 신자와 교회는 예수님을 생각나게 해야 합니다. 우리의 말과 행동, 우리의 삶에서 우리 예수님이 보여야 합니다. 이를 달리 표현하면 예수님의 향기가 되어야 한다는 말입니다. 「막 쪄낸 찐빵」이란 책을 썼던 이만재 씨가, 이 번엔 「소금되어 만납시다.」라는 신앙 에세이를 썼습니다. 이 책에서 그는 믿기 전 신자와 교회의 모습을 이렇게 기록하였습니다. ‘너무 엄숙하고 고지식하기만 하여 숨이 막힐 것 같았고, 신자와 교회가 예수님의 모습을 제대로 그려내지 못하여 예수님의 모습이 잘 보이질 않았다.’

오늘 요한복음 본문은 예수님이 죽으시기 전날 저녁 어느 다락방에서 일어난 일입니다. 예수님은 제자들과 마지막 식사를 하신다음 여러 가지 교훈을 주셨습니다. 본문은 그 중에 하나입니다. 예수님께서 말씀하실 때 제자 빌립이 예수님께 질문을 했습니다. “아버지를 우리에게 보여주소서.”(8) 그러자 예수님께서 “빌립아, 내가 이렇게 오래 너희와 함께 있으되 네가 나를 알지 못하느냐.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 어찌하여 아버지를 보이라 하느냐?”고 반문하셨습니다. 이는 3년 동안 함께 살았으면서도 아직도 ‘깨닫는 마음과 듣는 귀, 보는 눈’이 없는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잔잔한 책망이지만, 빌립의 이 질문은 우리를 향한 세상의 요청인 것입니다. “예수님을 우리에게 보여주소서.” 우리를 향한 이 세대의 요청입니다. 이 세대가 아무리 영적으로 무관심한 시대라고 하지만 저들의 깊은 내면엔 예수님 보기를 갈망하는 갈망이 있습니다.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참 믿음의 사람, 참된 교회를 갈망하고 있다는 이야기입니다. 우리가 이것을 외면해서는 안됩니다. 우리에게 저들의 부르짖음을 들을 수 있는 귀, 볼 수 있는 눈, 깨닫는 마음이 있어야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오늘날 신자와 교회가 예수님처럼,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거늘”이라고 말할 수 있느냐는 것입니다.  

여러분 신자란 어떤 사람입니까? 교회는 어떤 곳이 되어야 합니까? 신자는 예수님을 보여주는 사람, 교회는 예수님을 보여줄 수 있는 곳이어야 합니다. 그러면 어떻게 이 일이 가능하겠습니까? 그것은 예수님을 닮으면 됩니다. 예수님의 마음을 닮고(빌2:5), 예수님의 삶을 닮으면(요13:15,34,35) 우리의 삶은 예수님을 보여주는 삶이 될 수가 있습니다. 예수님이 나를 본 자는 아버지를 보았다고 말씀하신 것처럼, 우리의 마음과 삶이 주님을 닮으면 우리도 자신있게 나를 본 자는 주님을 보았다고 말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가 닮아야 할 예수님의 삶이란 무엇입니까?

1. 낮아지는 삶입니다(7~8上).
빌립보서 본문 7~8절, “자기를 비어 종의 형체를 가져 사람들과 같이 되었고, 사람의 모양으로 나타나셨으매 자기를 낮추시고”

예수님은 본래 하나님이셨습니다(6). 그런데 스스로 그것을 포기하고 자기를 낮추어 사람이 되셨습니다. 바울은 바로 이런 예수님의 마음과 삶을 본받으라고 말합니다(5). 그것은 겸손한 마음, 겸손한 삶입니다. 우리 마음과 삶을 겸손히 낮출 때 겸손의 왕으로 오신 예수님을 만날 수 있고, 이 겸손한 마음과 삶을 살 때 주님이 우리의 삶에서 드러나게 되는 것입니다.

16세기, 로마 부근 수도원에 있던 어느 수련 수녀가 갈수록 명성을 얻어 성녀라는 소문이 나게 되었습니다. 교황은 한 지혜자를 시켜 그 사실을 알아보도록 했습니다. 그 지혜자는 노새를 타고 한겨울 진흙과 수렁 길을 달려 수도원에 다다랐습니다. 그는 사람을 시켜 그 수련 수녀를 오게 했고, 그녀가 방에 들어오자 그는 여행 때문에 진흙범벅이 된 그의 신발을 벗겨달라고 부탁했습니다. 그러자 그녀는 화를 내며 그토록 명성을 얻고 있는 자기에게 그런 일을 시킨 것에 대해 불쾌감을 표시했습니다. 그러자 그 지혜자는 더 이상 아무 말 없이 수도원을 떠나 로마로 돌아갔습니다. 그리고 교황에게 이렇게 보고했습니다. "거기에는 성녀가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겸손이 없기 때문입니다."  

거룩한 삶이란 단순히 도덕적으로 정결한 삶을 말하지 않습니다. 거룩한 삶은 예수님을 닮은 삶입니다. 예수님을 닮아 겸손으로 허리를 묶고 자신을 낮추는 삶입니다. 요13장에서 주님은 친히 제자들의 발을 씻겨주신 다음 이렇게 말씀하셨습니다. “내가 주와 또는 선생이 되어 너희 발을 씻겼으니 너희도 서로 발을 씻기는 것이 옳도다. 내가 너희에게 행한 것같이 너희도 행하게 하려하여 본을 보였노라.”(14~15). 겸손히 자신을 낮추는 것, 그리고 섬기는 것이 주님을 드러내는 비결입니다. 우리의 이런 삶이 사람들에게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것입니다.

2. 하나님의 뜻에 복종하는 삶입니다(8).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

지난 주일 설교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예수님의 삶은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삶이었습니다. 하나님의 뜻에 순종하는 것이 예수님의 양식이었고, 주님은 이를 위해서 오셨다(요4:34)고 했습니다. 그리고 이 하나님의 뜻은 십자가의 죽음을 통한 인류를 구원하는 일입니다. 이 일에 예수님은 죽기까지 복종하셨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하나님의 뜻을 죽기까지 복종하신 예수님의 이 모습을 본받아 하나님의 뜻을 이루는 삶을 살아야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이 무엇일까요? 베드로 사도가 말한 대로 ‘선한 행실을 가지는 것’(벧전2:12)입니다. 이 땅에 사는 동안 신자다운 거룩하고 선한 생활을 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선이란 단순히 착하고 좋은 일을 뜻하지 않습니다. 우리 교회의 비전과 같이, ‘하나님께 영광(기쁨)이 되고 이웃에게 유익(기쁨)이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우리를 향하신 하나님의 뜻입니다.

미국에서 있었던 일입니다. 어느 교회훈련 프로그램 중에 하루 동안 이웃에게 최대한 친절을 베풀고 그 소감문을 쓰는 것이었습니다. 조건은 돈을 쓸 경우엔 10불 이내로 쓰는 것이었습니다. 한 자매님의 소감문입니다. 내용은 이렇습니다. 아침 일찍 출근하는 남편에게 보통 땐 한 번 한 키스를 두 번하고 잘 다녀오라고 했다는 것, 아이들의 도시락에 사랑의 메시지를 담은 메모지를 넣어두었다는 것, 가게에서 휠체어를 탄 아주머니가 있어서 문을 열어주고 먼저 들어가도록 했다는 것, 카운터에서 일하는 자매에게 보통 땐 ‘감사합니다.’란 말을 한 번했는데, 두세 번 ‘정말 감사해요. 수고하세요.’라고 했다는 것, 그리고 시간이 조금 남아서 목사님께 감사편지를 썼다는 것, 독거노인에게 수프 끓인 것을 갔다주고 왔다는 것 등입니다. 그런데 중요한 것은 이렇게 친절을 베풀면서 별로 손해 본 것이 없다는 것, 돈은 8불밖에 쓰지 않았다는 것, 그런데 너무나 풍성한 하루였다는 것, 할 수 있으면 이대로 계속 살아갔으면 좋겠다는 내용입니다. 그러면서 ‘이웃을 기쁘게 하는 것이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고, 또 나를 기쁘게 하는 길인 줄을 이전에는 미처 몰랐다’고 고백하였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의 뜻은 먼데 있지 않고, 가까운데 있습니다. 크고 거창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사소하게 여기는 그것이 바로 하나님의 뜻입니다. 이런 일들을 통해 진정으로 이웃을 기쁘게 하고 유익하여 하나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하나님의 뜻입니다. 사소한 일에서부터 하나님의 뜻을 찾아 순종할 때 우리의 삶에서 예수님의 모습이 드러나게 될 것입니다.

3. 사랑의 삶입니다(8下).
“......곧 십자가에 죽으심이라.”

예수님의 삶은 사랑의 삶입니다. 예수님은 사랑 때문에 천한 사람의 몸을 입고 이 땅에 오셨습니다(요3:16). 사랑 때문에 평생을 주리고 목마른 자, 병든 자, 눌린 자, 갇힌 자를 찾아 섬기셨습니다(눅4:18). 그리고 그 사랑 때문에 십자가에서 비참한 죽음을 당하셨습니다(롬5:8). 특히 십자가의 죽으심은 주님 사랑의 절정입니다. 그러면서 우리에게 말씀하시기를 “새 계명을 너희에게 주노니 서로 사랑하라. 내가 너희를 사랑한 것 같이 너희도 서로 사랑하라.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4~35)고 하셨습니다. 주님은 친히 본을 보이신 사랑의 삶을 우리에게 요구하십니다. 그리고 이 사랑의 삶이 제자의 삶이요, 세상에 주님을 보여주는 삶이라고 말씀하십니다.

조지 애틀리라는 젊은 선교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중앙아프리카에서 선교를 했습니다. 하루는 그가 자기의 숙소를 홀로 떠나서 주변 지역을 탐사하고 있었습니다. 그의 손에는 성능이 좋은 총이 있었습니다. 맹수의 공격에서 자신을 보호하기 위해서였습니다. 그가 숙소에서 멀리 떨어져 있을 때, 인근의 원주민들이 창과 몽둥이를 들고서 그를 향해 다가오기 시작했습니다. 한 발자국 한 발자국 가까이 다가옵니다. 자기 방어를 위해 총을 쏘고 싶었으나 참았습니다. 만약 그렇게 해서 원주민 가운데 한 사람이라도 죽거나 다치게 되면 그곳에서의 선교는 영영 물거품이 될 것이기 때문입니다. 결국 그는 총을 쏘지 않았고, 그 대신 원주민들의 창과 몽둥이에 자신의 몸을 내맡겼습니다. 마지막 숨을 거두면서 그는 스데반처럼 하늘을 우러러 보며, 자신의 영혼과 원주민들의 영혼을 주님께 맡기는 기도를 올렸습니다. 그가 죽고 난 뒤에 추장은 그의 손에 있는 총을 조사해 보았습니다. 그 속에 열 발의 총알이 들어있었습니다. 그제야 추장은 그의 고귀한 뜻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추장은 그의 얼굴에 입 맞추면서 이렇게 말했습니다. "이 사람은 우리를 살리기 위해서 대신 죽은 것이다. 그러니 우리는 그의 뜻을 받들어야 할 것이다!" 그리해서 그곳 원주민들 전체가 예수 그리스도를 영접하게 되었습니다.

이것이 바로 사랑의 능력입니다. 이 원주민들처럼 사람들은 사랑 앞에 입을 맞추고, 사랑 앞에 감동하고, 사랑 앞에 무릎을 꿇습니다. 거기에서 진정한 예수님의 모습을 보게 되고, 예수님을 영접하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세상에 주님을 보여주는 방법은 주님처럼 사랑의 삶을 사는 것입니다. 무엇보다 지체들 끼리 서로 깊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세상이 부러워할 만큼 사랑해야 합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 개신교의 큰 문제점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세상 사람들에게 서로 분열하는 모습을 너무 많이 보여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오죽했으면 아이들이 길에서 싸운 것을 보고, 지나가던 행인이 이렇게 말했다고 합니다. ‘이 놈들아, 여기가 교회인 줄 아느냐!’고. 먼저 지체들 끼리, 교회 안에서부터 깊이 사랑해야 합니다. 그리고 주변과 세상으로 그 사랑을 확장해 가는 것입니다. 우리의 이런 사랑의 삶에서 비로소 주님을 보게 됩니다. “너희가 서로 사랑하면 이로써 모든 사람이 너희가 내 제자인 줄 알리라.”(요13:35).

우리 신자는 reminder입니다. 생각나게 하는 사람입니다. 구원의 예수님, 길이요 진리요 생명이신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 함께 생각해 봅시다.
1. 당신의 어떤 점이 다른 사람들로 하여금 예수님을 생각나게 한다고 생각합니까?
2. 예수님을 생각나게 하는 사람으로서 더욱 힘써야 할 부분에 대하여 이야기해 봅시다.
3. 도전이 되거나 새롭게 결단한 내용이 무엇이며, 이 말씀을 당신의 삶 속에 어떻게 적용하겠습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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