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웃 없이 살 수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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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441회 작성일 17-03-05 13:32본문
이웃 없이 살 수 없다!
눅15:25~32
2017. 3/5. 11:00
형제(자매)로 보일 때
옛날에 어떤 성자가 있었다. 그 성자가 제자들을 불러 모아놓고 ‘어둠이 지나고 새날이 밝아 온 것을 그대들은 어떻게 아는가?’ 하고 물었다. 제자 중의 하나가 ‘그거야 동창이 밝아 오는 것을 보면, 새날이 온 것을 알 수 있지요.’ 라고 대답했다. 스승은 고개를 저었다. 이렇게 제자들은 나름대로 말했지만, 스승은 듣고 나서 모두 ‘아니다’ 라고만 했다. 그러자 이번에는 제자들 편에서 스승에게 물었다. ‘그럼 스승께서는 밤이 가고 새날이 밝아 온 것을 무엇으로 알 수 있습니까?’ 스승은 이렇게 말했다.
‘너희가 눈을 뜨고 밖을 내다보았을 때, 지나다니는 모든 사람이 형제(자매)로 보이면, 그때 비로소 새날이 밝아 온 것이다.’
참으로 의미심장한 말이다. 모든 사람이 그냥 사람으로만 보이지 않고 사랑하는 형제(자매)로 보일 때, 우리의 마음에 비로소 새날이 밝아 온다는 뜻이다. 자, 옆 사람을 한 번 바라보자! 어떻게 보인가? 두고 보기에도 아까운 사랑하는 형제와 자매로 보인가? 아니면 꿈속에라도 나타날까 무서운 웬수로 보인가? 솔직히 나는 지금 날이 ‘밝았다-어두웠다.’를 반복하고 있는 중이다. 그리고 목표는 극지방의 백야(White Night)현상처럼 최대한 어둠의 시간을 줄이고 밝음의 시간을 늘리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이어 오늘 말씀을 전하려고 하는 탕자의 비유는 두 가지 내용-작은 아들 중심의 이야기와 큰 아들 중심의 이야기-을 담고 있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작은 아들 이야기가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오늘 큰 아들 이야기는 형제(이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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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 안의 탕자, 큰 아들
지난주일 설교에서 둘째 아들에 대해서 ‘패륜아’, ‘망나니’라는 다소 과격한 표현을 사용했고, 큰 아들에 대해서는 ‘고분고분한’ 사람이라고 호의적으로 표현을 했다. 그런데 본문을 보면 큰 아들 역시 문제가 많은 사람이다. 동생처럼 드러내놓고 나쁜 짓을 안했을 뿐이지 마음이 비뚤어진 ‘삐딱이’였다. 그래서 사람들은 흔히 작은 아들을 ‘집 나간 탕자’, 큰 아들을 ‘집 안의 탕자’라고 부른다. 이와 같은 큰 아들의 실체가 밝혀진 것은 집 나간 동생이 돌아오고 나서다. 본문을 통해 나타난 큰 아들의 문제점은 최소한 두 가지다.
아버지의 마음을 알자.
첫째는 아버지와 생활하면서도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점이다. 동생이 집에 돌아온 날도 그는 밭에 나가 종일토록 일했다. 그리고 날이 저물어 집으로 돌아오는데, 집에서 잔치소리가 들렸다. 그도 충분히 눈치 챘을 것이다. 자기 집에서 잔치를 베풀 일이라곤 동생이 돌아오는 일밖에 없었기 때문이다. 동생이 집을 나간 뒤로 아버지가 일손을 놓고 매일 마을 밖까지 나가서 동생을 기다리는 것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그런데도 그는 집으로 곧장 들어가 동생을 맞아주지 않고, 오히려 하인을 불러내어 자초지종을 물었다. 아마 이렇게 물었을 것 같다. ‘야, 그놈 돈 많이 벌어 왔대? 무슨 차를 타고 왔대? 무슨 옷을 입고, 무슨 신발을 신고......’ 그러자 하인이 대답했다. ‘돈은 무슨 돈입니까? 거지도 그런 거지가 없었습니다. 그런데 주인 어르신이 건강하게 돌아왔다며.......’(22,23). 그가 망해서 돌아왔다는 이야기가 한편으로 안도가 되긴 했으나 그런 자식을 다시 받아주고, 그런 자식 위해 잔치를 베푼 아버지에게 대하여 분노를 터뜨렸다(28).
아버지의 마음을 조금이라도 헤아릴 줄 아는 자식이라면 이럴 수는 없는 일이다. 날마다 마을 밖에까지 나가서 기다리는 아버지의 마음을 모를 리 없다. 그런데 그는 그렇게 오매불망하던 아들이 돌아와 기뻐하는 아버지의 마음을 헤아리지 못한 것이다. 오히려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항의했다. ‘창녀와 함께 아버지의 재산을 모든 삼켜버린 자식을 다시 받아주고, 그것도 모자라 그 자식을 위해 살진 송아지를 잡아 잔치를 베풀어요!.......’ 이 기쁘고 즐거운 날에 아버지의 마음을 완전히 뒤집어 놓은 것이다. 우리가 하나님을 섬기는 가장 중요한 조건도 동일하다. 먼저 하나님의 마음을 아는 것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고 기도를 드리고, 찬양을 드리고, 예배를 드리고, 또한 섬겨야 한다. 〈하나님 아버지의 마음〉이란 찬양이 있다. 가사의 내용이 이렇다(※아래 곡 참조).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것 나도 기뻐하고, 하나님이 원하시는 것 나도 원하고, 하나님께서 눈물 흘리신 일에 나도 눈물을 흘리고, 하나님께서 싫어하신 것.......이것이 참된 성도의 모습이다. 하나님의 마음을 알지 못하고 하는 모든 종교행위는 오히려 하나님을 화나게 한다. 그것은 자기가 좋아서 하는 자기만족이고 자기숭배이지 하나님을 위한 것이 아니다. 큰 아들이 정말 아버지의 마음을 알았다면 아버지에게 불량한 짓을 하고 나간 동생이지만 그를 찾아 나섰을 것이다. 그래서 아버지에게 데리고 왔을 것이다. 그리하지 못했다면 그가 돌아왔을 때 아버지와 함께 그를 즐겁게 맞아주었을 것이다. 그런데 큰 아들은 오히려 아버지에게 분노를 터뜨리며 잔치에 참여하기를 거부했다. 큰 아들의 모습이 지금 우리의 모습이 아니지 깊이 생각해 보자!
이웃 없이는 살 수 없다.
둘째는 돌아온 동생을 동생으로 받아들이지 않은 점이다. 눅15장에는 세 비유가 나온다. 잃은 양의 비유, 잃은 동전의 비유, 그리고 오늘 본문인 잃은 아들의 비유다. 이 세 비유의 메시지는 하나다. 그것이 양이든 동전이든 사람이든 잃어버린 것은 반드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본문에는 여기에 한 가지가 더 덧붙여지고 있다. 그것은 다시 찾은 사람(아들)을 기쁘게 환영하라는 것이다. 사실 이 세 비유는 그 대상이 바리새인과 서기관들이다(1,2). 그리고 본문에서 작은 아들은 세리와 죄인을 상징하고, 큰 아들은 바리새인과 서기관을 상징한다. 이러고 보면 주님께서 왜 이 비유를 말씀하셨는지 이해가 될 것이다(설명생략).
그런데 본문에서 큰 아들은 작은 아들이 아버지의 아들일지는 몰라도 자신의 동생은 아니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아버지에게 말했다. “아버지의 살림을 창녀들과 함께 삼켜 버린 이 아들이 돌아오매.......”(30). 여기서 “이 아들”이 원문에는 ‘당신의 이 아들’로 되어 있다. 동생으로 받아들일 수 없다는 뜻이다. 그렇지만 아버지는 그가 동생이란 사실을 강조한다. “이 네 동생은 죽었다가 살아났으며 내가 잃었다가 얻었기로.......”(32). 탕자를 아버지인 내가 아들로 받아들인 것처럼 너도 그를 동생으로 받아들이라는 뜻이다. 주님께서 세리와 죄인들을 환영하여 그들과 즐겁게 지낸 것처럼 너희(바리새인과 서기관)도 그들을 형제(자매)로 받아들이라는 것이다. 지난 주일에 말씀드린 것처럼 작은 아들 이야기가 아버지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었다면, 오늘 큰 아들 이야기는 형제(이웃) 없이는 살 수 없다는 것을 보여주고 있다.
고슴도치 딜레마(hedgehog's dilemma)
6세기에 이스라엘의 가자지구에 살았던 도로테우스(Dorotheus)는 이렇게 말했다. ‘세상 둥근 원이고 하나님이 그 중심이며, 인간의 다양한 삶이 원의 반경이라고 상상해 보라. 하나님께 가까이 오려는 사람은 원의 중심으로 걸어갈 것이고, 하나님께 다가가는 동시에 서로에게 다가간다. 하나님께 가까워질수록 서로에게도 가까워진다. 또 서로에게 가까이 갈수록 하나님께 가까워진다.’ 하나님께 가까이 가고자 하는 모든 사람이 하나님이 계신 원의 중심으로 다가간다면, 그들은 서로에게 다가가는 동시에 하나님께 다가가게 된다. 하나님께 다가가기 위해서는 이웃에게 다가서야 하고, 이웃에게 참으로 다가가기 위해서는 하나님께 다가서야 한다(보수신학과 자유신학의 실패원인).
함께 살아야 할 사람들이 때로는 더할 나위 없이 소중한 존재로 여겨지지만 때로는 걸림돌처럼 느껴지기도 한다. 때로는 사랑스런 천사처럼 여겨지지만 때로는 소름돋는 악마처럼 느껴진다는 것이다. 그래서 가까이 다가가고 싶지만 머뭇거리게 되는 것이다. 가까이 가자니 상처를 받을 것만 같고, 혼자 있자니 외롭고, 그래서 이러지도 저리지도 못하는 것이다(고슴도치 딜레마). 그렇지만 주님을 더 깊이, 더 가까이 만나기를 원한다면 용기를 내야 한다. 용기를 내어 이웃을 향해 다가가야 한다. 형제의 모습 속에, 자매의 모습 속에 주님이 계시고, 함께 할 때 주님의 나라를 경험할 수 있기 때문이다. 주님은 사람들을 가까이 하므로 하나님을 가까이 하는 법을 몸소 보여주셨고, 또한 그렇게 살라고 본문을 통해 우리에게 말씀하고 계신다. 세리니 죄인이니, 혹은 바리새인이니 서기관이니 하는 것들은 병든 사회, 타락한 종교가 만들어 놓은 악한 구분일 뿐이다. 하나님께는 모두가 똑같은 소중한 자녀다. 그러므로 하나님의 자녀가 서로 용서하고 용납하여 받아들이고, 함께 기뻐하는 것은 너무 당연한 일이다. 이로써 잔칫집 같이 즐거운 우리 가정, 우리 교회를 만들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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