확신의 삶Ⅰ, ‘복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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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1,270회 작성일 17-11-05 14:42본문
확신의 삶Ⅰ, ‘복음’
요14:1~6
2017. 11/5. 11:00
아이드마(AIDMA)의 법칙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누군가를 설득시키는 것은 개인에게나 기업에게나 매우 중요한 일이다. 이와 관련해서 광고와 마케팅에 ‘아이드마(AlDMA) 법칙’이라는 것이 있다. Attention(주의, 인지), Interest(관심, 흥미), Desire(욕망), Memory(기억), Action(행동/구매)의 첫 글자를 따서 ‘AlDMA’라고 부른다. 사람이 행동하기까지 주의(attention)→흥미(interest)→욕망(desire)→기억(memory)→행동(action)의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소비자가 상품을 구매하기까지 이와 같은 5가지 과정을 거친다는 것이다. 그래서 이를 ‘소비심리의 단계’라고도 한다. 클렌드 홀(C. Hall)이 주장한 것으로 광고나 판매에 있어서 격언과 같은 법칙이다. 그런데 어떤 심리학자는 ‘AlDMA’가 아니라 ‘AlUDMA’로, 즉 여기에 ‘우’(U)를 추가해야 한다고 했다. I와 D사이에 Understand(이해)의 과정이 필요하다는 것이다. 어떤 상품이나 대상에 주의를 기울이게 하고(A), 흥미(관심)를 갖게 하고(I), 이해를 시켜서(U) 욕망이 샘솟게 하고(D), 잊지 않도록 기억시키면(M) 행동으로 옮긴다(A)는 것이다.
이렇게 종래의 주장에 ‘이해’의 과정을 강조한 것은 관심과 흥미는 있어도 필요성이나 유용성에 대한 이해의 과정이 없으면 다음의 행동이 일어나지 않기 때문이다. 허황된 미사여구나 달콤한 말로 꾄다고 해도 실체가 빈약하면 목적을 달성할 수 없다는 것이 ‘아이드마’에서 ‘아이우드마’로 발전된 원인이다. 그래서 무슨 일이건 실체를 보여서 이해와 공감을 얻어야 한다는 것이다. 또 어떤 사람은 ‘AlUDMA’에서 memory(기억)의 ‘M’을 conviction(확신)의 ‘C’로 바꾸어 ‘AlUDCA’로 부르기도 한다. 단순한 기억보다 강한 확신이 행동을 잘 유발시킨다는 것이다. 그래서 확신의 중요성을 강조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잘 기억하고 있어도 확신이 없으면 그것이 행동(투자나 구매)으로 이어지기가 쉽지 않다. 중대한 일일수록 더욱 그렇다. 물론 확신의 부정적인 면도 있지만 확신은 우리를 감동시켜 강력한 행동을 일으킨다. 장애물을 뚫고 나가도록 행동하게 하는 힘이다. 특히 우리 신앙인에게 확신은 믿음을 현실로 바꾸는 힘이다. 그래서 앞으로 확신의 삶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려고 한다.
포스트모던시대와 복음
우리 시대를 포스트모던시대라고 한다. 포스트모던시대의 시대정신은 상대주의 혹은 다원주의다. 절대 진리, 절대 가치와 같은 절대적인 것은 없다는 것이다. 물론 내가 소중한 만큼 상대방도 소중하고, 내 것이 귀한 만큼 상대방의 것도 귀하게 여겨 인정해주고 존중해주자는 의미에서의 상대화는 얼마든지 환영할 일이다. 그리고 당연히 그래야 한다. 문제는 지난주일 바울처럼 ‘다른 복음은 없다.’, ‘다른 복음을 전하는 자는 저주를 받을 것이다. 그가 하늘로부터 온 천사라도.’(갈1:7~9)와 같은 주장을 지극히 위험하고 독선적인 것으로 혐오스럽게 생각한다는 점이다. 그러다보니 이와 같은 시대정신은 오직 성경, 오직 하나님의 은혜, 오직 예수 그리스도를 통한 구원 등 절대성을 강조하는 우리 기독교에게 심각한 도전이 될 수밖에 없다. 우리 기독교는 양보할 수도 타협할 수도 없는 절대성을 강조하는 종교이다. 그러니 이런 시대정신은 우리에게 큰 위협이고, 또한 위기가 아닐 수 없다.
하지만 위기가 곧 기회라고 했다. 포스트모던 이전 시대(모던시대)는 논리적 명제가 이끌어가는 시대였다. 말과 글로 소통하는 시대였다. 그래서 논리와 명제를 가지고 말과 글을 통해 복음을 전했다. 그렇지만 포스트모던시대는 말로 소통하지 않고 삶으로 소통하고, 이성보다 감성을 중요하게 여긴다. 이 시대는 말에 대한 상처가 많고 거절의 경험이 많기 때문에 말의 진정성에 회의적이다. 그러니 말이나 글로 설명하는 것보다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 중요하고, 이성적 논리적으로 설명하여 설득하는 것보다 실천적으로 감동을 주는 것이 효과적이다. 바로 여기에 우리 성도가 이 시대를 극복할 수 있는 방법이 있다. 그것은 ‘복음에 합당한 삶’(빌1:27)이다. 말로 복음을 전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에 합당한 삶으로 보여주는 것이다. 합리적으로 설명하고 논리적으로 설득하는 것이 아니라 복음 안에서 변화된 겸손하고 경건한 삶, 깨끗하고 거룩한 삶으로 복음의 능력을 드러내는 것이다. 삶으로 예수님을 보여주고, 삶으로 하나님의 말씀을 증명하는 것이다. 그래서 감동을 주는 것이다. 마샬 맥루한(M. McLuhan)은 매체가 곧 메시지라고 했다. 우리의 삶이, 그리고 우리의 공동체(가정, 구역, 선교회, 교회 등)가 메시지라는 것이다. 다시 말하면 복음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즉 복음을 보여주어야 한다는 것이다.
복음에 대한 확신
그러면 이와 같은 시대에 우리가 하나님 자녀로서의 정체성을 가지고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기 위해선 어떻게 해야 할까? 바울처럼 복음에 대한 절대적인 확신을 가져야 한다. 앞에서도 말했지만 확신이 있어야 행동이 따르게 된다. 그것을 위해 다른 것을 포기하고, 나아가서 그것을 위해 목숨까지 내어놓을 수 있는 담대한 용기를 가질 수가 있다(마13:44). 마찬가지로 복음에 대한 확신이 있어야 복음에 합당한 삶을 살 수가 있다. 그래서 복음에 대한 확신이 요구되는 것이다. 요한은 성경을 기록한 목적을 이렇게 말했다. “내가 하나님의 아들의 이름을 믿는 너희에게 이것을 쓴 것은 너희로 하여금 너희에게 영생이 있음을 알게 하려 함이라.”(요일5:13). 한 마디로 확신을 갖도록 하기 위함이라는 것이다. 왜? 자기 안에 영생이 있음을 알아야 그 영생을 주신 주님을 위한 삶이 가능하기 때문이다.
레너드 스윗(L. Sweet)은 현대의 수많은 교회가 ‘예수결핍장애’(Jesus Deficit Disorder) 상태에 있다고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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