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큰 손, 큰 축복(07-04-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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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734회 작성일 07-04-22 16:34

본문

큰 손, 큰 축복
창 18:1-8

진정한 보물
길을 가던 한 나그네가 마을 어귀에 이르러 정자나무 아래에서 하룻밤을 묵기로 하였습니다. 짐을 풀고 있을 때 마을 사람 하나가 헐레벌떡 달려왔습니다.
“선생님이 가지고 계신 그 보석을 저에게 주십시오.”
“그 보석이라니요?”
“간밤에 내가 섬기는 신께서 꿈에 나타나 해거름이 되면 동구 밖으로 나가 보라고 하시더군요. 그러면 나그네 한 명을 만나게 될 것이고, 그가 값진 보석을 하나 줄 터인데, 그 보석으로 영원히 부자가 될 것이라고요.”
이야기를 들은 나그네는 보따리를 뒤져 보석을 하나 꺼내 들었습니다.
“아마 이것을 말씀하신 모양입니다. 며칠 전에 길을 걷다 오솔길에서 주웠는데, 원한다면 가져도 좋습니다.”
보석을 받아 든 마을 사람은 눈이 휘둥그레졌습니다. 나그네가 건네준 보석은 커다란 다이아몬드였습니다. 아마도 세상에서 보기 드믄 큰 다이아몬드였습니다. 떨리는 마음으로 다이아몬드를 받아 가지고 집으로 돌아온 그 사람은 밤새 한잠도 잘 수가 없었습니다. 누가 보석을 훔쳐 갈까봐 그랬던 것이 아닙니다. 귀한 보석을 자신에게 내어준 나그네의 행동 때문입니다. 그는 깊은 생각에 빠져 잠을 이룰 수가 없었습니다. 다음날 새벽 첫닭 우는 소리가 들려오자. 그는 다이아몬드를 챙겨 들고서 나그네가 자고 있는 정자나무로 달려갔습니다. 그리고는 다이아몬드를 나그네 앞에 내놓으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다이아몬드처럼 귀한 것을 서슴없이 내어 줄 수 있는 그 부유한 마음을 제게 주십시오.”

나그네에게서 다이아몬드를 전해 받았을 때만 해도 마을 사람은 당연히 자기의 신이 꿈에 이야기 해준 보물이 바로 그 커다란 다이아몬드인줄 알았습니다. 그러나 밤새 잠을 이루지 못하고 생각하고 또 생각해본 결과, 그 다이아몬드보다도 더욱 귀한 보물이 있다는 것을 알게 되었습니다. 그처럼 귀한 것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선뜻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이라는 것이었습니다. 자기의 신이 ‘그 보석으로 영원히 부자가 될 것이라’고 일러준 보석은 다이아몬드가 아니라 바로 그런 마음이라는 것을 마침내 그는 깨닫게 된 것입니다. 이 자리에 계신 우리 기뻐하는교회 지체들은 이미 이 보물을 소유한 사람들이라 믿습니다.

우리 신체에 여러 지체들이 있는데, 이들이 종종 비유를 나타내는 관용어로 쓰입니다. 눈이 높다, 콧대가 세다, 입이 싸다, 귀가 얇다, 발이 넓다. 이 중에 ‘손이 크다’라는 말도 있습니다. 이는 ‘씀씀이가 후하고 크다’는 의미를 나타낼 때 사용하는 관용어입니다. 주식이나 사채 시장에서 큰 돈을 움직이는 영향력 있는 사람을 ‘큰 손’이라 말합니다. 오늘 저는 이런 의미의 ‘큰 손’이 아니라, 베풀고 섬기는데 ‘후하고 크게 쓰는 씀씀이’를 의미하는 ‘큰 손’을 가진 이를 소개하고자 합니다. 아브라함입니다. 아브라함은 ‘후하고 크게 쓰는 씀씀이’의 큰 손을 가진 사람입니다. 이 때문에 하나님으로부터 큰 복을 받은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은 귀한 것을 필요로 하는 이에게 선뜻 내줄 수 있는 넉넉한 마음을 가진, 진정한 보물을 간직한 사람입니다.

아브라함의 손님 접대
본문은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하는 아름다운 모습인데, 그 나그네가 하나님이셨습니다. 나그네를 대접하다가 하나님을 섬기는 복을 갖게 된 것입니다. 그래서 유대인들이나 우리 기독교인들에게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모범적인 인물입니다. 히브리서 기자는 이 아브라함을 염두에 두고 나그네 대접을 강조합니다. “형제 사랑하기를 계속하고 손님 대접하기를 잊지 말라. 이로써 부지중에 천사들을 대접한 이들이 있었느니라.”(히13:1~2). 그런데 아브라함의 손님 대접을 보면 몇 가지 특징이 있습니다. 이와 같은 아브라함의 모습에서 섬김의 자세를 배울 수가 있습니다.

1. 자발성입니다.
팔레스타인(近東) 지방의 낮은 덥습니다. 그래서 사람들은 정오부터 3시까지 활동을 하지 않고 쉬고, 결혼식도 밤에 행합니다. 특별한 경우가 아니고는 서로를 방문하지도 않고 초대하지도 않습니다. 그래서 지금 아브라함이 그늘에 앉아 쉬고 있는데, 나그네 세 명이 나타났습니다. 아는 사람도, 그의 집에 오는 사람도 아닙니다. 그냥 지나치는 나그네입니다. 그런데 아브라함은 그들을 보자마자 달려가 자기 집으로 모십니다. 자신도 졸린 대낮인데, 억지가 아닌 자발적으로 한 행동입니다. 본문 1절에서 “오정 즈음에”라는 시간을 강조한 것은 아브라함의 나그네 대접 정신을 강조하기 위함입니다. 대접하기 어려운 상황임에도 아브라함이 나그네를 대접했다는 것입니다. 그리고 2절에 “그가 그들을 보자 곧 장막 문에서 달려 나가 영접하며.......” 마치 아주 반가운 벗을 맞이하듯 달려가 그들을 자기 집으로 영접했습니다. 아브라함의 자발성을 강조하는 표현입니다. 이는 아브라함이 남 섬기는 일에 잘 훈련이 되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을 통해 배울 수 있는 섬김의 제1원리는 자발성입니다. 이런 자발성은 훈련에서 비롯됩니다. 무엇이든 몸에 배면 자연스럽게 흘러나오는 법입니다. 섬김도 마찬가집니다. 아브라함은 나그네를 대접하는 일이 몸에 배었기에 대접하기 어려운 상항에서도 기꺼이 섬기게 된 것입니다. 자발성은 주님을 섬기는 아주 중요한 자세입니다. 사도 바울은 고린도 교회에게 보낸 편지에서 헌금의 원리를 말하면서 제일 강조한 것이 바로 이 자발성입니다. 자발성이 없는 억지나 강요가 따른 것은 참된 헌금이 아니라고 말합니다. 자발성이 곧 믿음이라고 말하였습니다. 이는 헌금에만 해당되는 말씀이 아닙니다. 주의 일은 모두가 섬기는 일들이고, 이 일들은 우리의 자발성을 요구합니다. 그래야 기쁨이 있고, 보람이 있고, 감사가 있고, 의미가 있는 것입니다.

2. 겸손함입니다.
본문에서 나그네들에 대한 아브라함의 인상적인 태도가 나옵니다. “몸을 땅에 굽혀”(2). “내 주여 내가 주께..... 원컨대 종을.....”(3),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4). “......나무 아래 모셔 서매”(7). 나그네를 높이는 아브라함의 겸손한 모습을 나타내는 말씀들입니다. 이때 아브라함의 나이 99세로 결코 적은 나이가 아니었습니다. 어쩌면 세 나그네가 아브라함보다 더 젊게 보였을지도 모릅니다. 물론 이 세 분이 뒤에 하나님으로 밝혀지지만 아직까지 아브라함은 이들이 누군지 몰랐습니다. 그냥 지나가는 나그네로만 알고 있었습니다. 그럼에도 자신을 낮추어 겸손히 나그네들을 섬겼습니다. 마치 주님을 섬기듯 그들을 섬겼습니다. 특히 4절에서 “물을 조금 가져오게 하사”는, 나그네들의 발을 씻어주기 위함입니다. 팔레스타인 지방은 먼지가 많기 때문에 손님을 집으로 들일 때는 반드시 발을 씻게 했습니다. 귀한 분일 경우엔 주인이나 종들이 손님의 발을 씻어주었습니다. 99세의 할아버지가 친히 물을 떠다가 나그네들의 발까지 직접 씻어 주었습니다. 종들을 시키지 않고 자신이 직접 종처럼 이들의 발을 씻어준 것입니다. 아브라함의 섬김의 절정을 보여주는 장면입니다.

여기서 우린 섬김의 제2원리를 보게 됩니다. 그것은 겸손함입니다. 누군가를 섬긴다는 것은 그 사람 앞에 무릎을 꿇는 것입니다. 내 자세를 낮추고 마음을 낮추어 겸손해지지 않으면 섬길 수 없습니다. 그러므로 겸손은 굉장히 중요합니다. 그 이유는 겸손하지 않으면 섬김의 열매를 맺을 수 없기 때문입니다. 농부가 하는 일을 자세히 관찰해 보면, 반 이상이 무릎을 꿇거나 엎드려서 하는 일입니다. 씨앗을 심고, 그 심은 것을 돌보고, 잡초를 제거하고..... 이 모든 일은 자세를 낮춰야만 할 수 있는 일입니다. 그래야 농작물의 좋은 열매를 얻을 수 있습니다. 그런데 한 가지 중요한 사실은 겸손하게 섬겨야 하지만, 또한 섬기면 겸손해 진다는 사실입니다. 섬길 때 내가 겸손해집니다. 섬기다 보니 자신도 모르는 사이에 무릎을 꿇고 엎드리게 되고, 몸을 낮추다 보니 마음도 겸손하게 낮아지게 된 것입니다.

3. 후하게 입니다.
“떡을 조금 가져오리니”(3절). 이렇게 말한 후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떡을 준비하게 하고, 짐승 떼로 달려가 기름지고 좋은 송아지를 잡아서(7절) 종들로 요리하게 했습니다. 자신이 한 말보다 더 후하고 풍성하게 정성을 다해 대접한 것입니다. 자신이 할 수 있는 최상의 것으로 최선을 다해 섬기는 아브라함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정말 그는 아낌없이 후하게 나그네를 대접하였습니다.

이것이 섬김의 제3원리 후함입니다. 후함은 자발성의 결과입니다. 억지로 하는 일은 인색으로 나타나지만 자발성은 항상 후함으로 나타납니다. 그리고 이 후함은 풍성한 사랑의 표현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엔 항상 풍성하게 넘칩니다. 이 후함은 하나님의 성품과도 통합니다. 하나님은 풍성한 분이십니다. “후히 주시고 꾸짖지 아나하시는 하나남”(약1:5), “후히 되어 누르고 흔들어 넘치도록 하여 너희에게 안겨 주리라.”(눅6:38). 복음서에 나온 예수님의 사역을 통해서도 이를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가나 혼인 잔치, 오병이어).

롯의 손님 접대
19:1-3절에, 아브라함의 조카 롯의 손님 접대가 나옵니다. 롯 역시 자발성과 겸손함으로 손님을 대접했습니다. 그런데 후함이 없습니다. 3절에 보면 식탁에 겨우 무교병, 즉 누룩 없는 떡만 내놓았습니다. 손님을 청하여 자기 집에 초청한 것까지는 좋은데, 그 접대가 너무 소홀했습니다. 아브라함과 비교할 가치조차 없습니다. 손님을 초대하고 대접을 소홀히 한 것은 손님을 무시한 것과 같습니다. 롯이 가난해서 그런 것이 아닙니다. 그 역시 아브라함과 비교될 만큼 큰 부자였습니다(창13:6). 그런데 대접에 너무 인색했습니다. 이 점이 아브라함과 롯의 차이입니다. 더욱 흥미로운 것은 아브라함은 아내에게 음식을 준비하게 하는데, 롯은 자신이 직접 준비합니다. 그 이유를 롯의 아내는 물욕은 있으나 섬김과 대접에 부족했기 때문이라고 합니다. 그래서 그 물욕이 결국 소돔과 고모라성의 멸망과 함께 그녀를 소금 기둥으로 만든 것이라고 합니다. 섬김과 대접은 물욕으로부터 우리를 자유롭게 해줍니다.  

그리고 후함과 인색함의 차이가 어떤 결과를 낳게 되었는가를 성경은 우리에게 분명하게 보여줍니다. 18장과 19장이 손님 접대 이야기로 시작되는데, 그 결과 아브라함은 꿈에도 소원이었던 아들 출산의 약속, 자손 창대의 약속, 소돔과 고모라를 멸망시키고자 하는 하나님의 계획까지 숨지기 않고 알려주셨습니다. 반면에 롯은 맨 몸으로 소돔과 고모라성을 탈출하다가 아내는 소금기둥이 되고 가정이 망가지는 결과를 낳습니다. 이런 결과가 반드시 인색함 때문이라고는 할 수 없으나 그 영향이 있는 것은 분명합니다....... 인색한 사람 되지 마세요. 특히 하나님 앞에서 그렇습니다.

큰 손으로 살자.  
“너희는 구제할 때에 아끼는 마음을 품지 말 것이니라. 이로 인하여 네 하나님 여호와께서 네게 복을 주시리라.”(신15:10). 모든 대접에 인색함이나 억지가 아니라 자원함과 겸손함과 후함으로 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우리 개인과 가정, 그리고 우리 교회가 잘되는 비결이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섬기는 삶을 살면 복을 받습니다. 큰 손이 큰 축복을 받고, 작은 손이 작은 축복을 받습니다. 하나님이 살아계셔서 보고 계시고 갚아주신다는 것을 믿으시기 바랍니다. 큰 손은 물질의 량이 아니라 마음의 크기, 나아가서 태도의 문제입니다. 우리 모두 큰 손에 큰 축복을 받기를 주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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