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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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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148회 작성일 18-07-08 13:3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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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

5:21~43

2018. 7/8. 11:00

말은 습관이다.

영국의 프로축구 프리미어리그에서 활동하고 있는 선수의 옷에 소형 녹음기를 부착해 경기를 하면서 얼마나 욕을 하는지 조사해보았다. 선수들은 거친 욕설을 수시로 내뱉었고, 그 수위가 너무 높아서 다큐멘터리에서 내보낼 수 없을 정도였다. 심지어 같은 편 선수에게도 스스럼없이 욕을 했고, 이 때문에 경기 중에 경찰이 와야 할 정도로 큰 싸움이 일어난 적도 있었다. 또 미국의 여러 대학이 연합해 성인 직장인의 옷에 녹음기를 부착해 하루 종일 거짓말을 몇 번이나 하는지 알아보았다. 그리고 그 결과 사람들은 8분에 한 번씩 거짓말을 한다.는 결론이 나왔다. 이 결과가 모든 사람에게 적용이 된다면 사람은 누구나 매일 150번이 넘는 거짓말을 한다는 말이 된다


중요한 것은 하루 종일 내가 사용하는 말이 나의 생각을 나타내고, 내가 어떤 사람인지를 보여준다. ‘네 말소리가 너를 표명한다.’(26:73). 말은 생각이고, 생각은 곧 그 사람이기 때문이다. 그러니 위 실험결과에 따르면 우리 인간은 욕쟁이에, 거짓말을 싫어하면서도 거짓말을 숨 쉬듯 하는 거짓말쟁이라는 것을 보여준다(Homo Fallax). 다시 말하면 말을 매우 부정적으로 잘못 사용하고 있다는 뜻이다. 문제는 이러한 말에 우리의 삶이 영향을 받는다는 사실이다(네 친구 이야기). 그러므로 경건한 사람, 경건한 생활을 위해선 먼저 말이 달라져야 한다. 경건한 언어습관을 가져야 한다. 여기서 습관이라는 것은 연습과 훈련으로 가능하다는 뜻이다. 그러니 은혜로운 말, 덕스러운 말, 감동을 주는 말, 믿음의 말, 살리는 말, 복을 부르는 말을 연습하고 훈련해야 한다. 그러면 반드시 복되고 형통할 것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 살리는 생명의 말, 말과 행동이 항상 일치하셨던 주님의 말씀’(언어생활)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자 한다

 

여러 사람의 여러 말들

성경은 말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다. 세계의 시작이 (하나님의 말씀)에서 비롯되었고(1:), 인간의 불행도 (사단의 말)에서부터 시작되었다(3:). 심지어 사도 요한은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실 때 하셨던 말씀이 예수님이라고 했다. 예수님이 곧 말씀(λγος)이라는 것이다(1:1). 말씀이셨던 주님의 말(언어)을 보면 살리는 생명의 말, 위로와 소망의 말, 믿음의 말이었다. 본문에도 이와 같은 특징이 잘 나타나고 있다. 본문은 복음서에 나온 죽은 자를 살리신 세 사건(회당장 야이로의 딸과 나인성 과부의 아들, 죽은 지 나흘이 지난 나사로) 중 하나다. 회당장 야이로(‘하나님께서 깨닫게 하는 자란 뜻)의 딸을 살려주신 사건이 중심을 이루면서 거기에 12년 동안 혈루증으로 고생한 여인의 치유사건이 끼어있는 샌드위치구조로 되어 있다. 본문에는 여러 사람의, 여러 종류의 말이 나오고 있다.

 

우선 가장 먼저 야이로의 말이 나온다. “간곡히 구하여 이르되 내 어린 딸이 죽게 되었사오니 오셔서 그 위에 손을 얹으사 그로 구원을 받아 살게 하소서.”(23). 죽어가고 있는 어린 딸을 위한 아버지의 절박하고 간절한 말이다. 애끓는 부정(父情)을 느낄 수 있는 대목이다. 다음은 제자들의 말이다.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는 주님의 물음에 대한 제자들의 반응이다. “무리가 에워싸 미는 것을 보시며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 물으시나이까.”(31). 못마땅하고 시큰둥한 말이다. 상황을 아시면서 그런 말을 하시냐는 질책의 의미를 가가지고 있다. 그 다음은 혈루증을 치료받은 여인의 말이다. 물론 본문에는 생략되었지만 그녀의 말이 어떠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녀는 분명히 두려움으로 사색이 되어 말을 했을 것이다. 율법에 의하면 혈루증과 같은 병에 걸린 사람은 사람이 모인 곳에 나오거나 사람을 만지지 못하도록 했다(5:1~3). 접촉하면 부정하게 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여인은 이 율법을 어겼고, 다행이 아무도 알아본 사람이 없었다. 하지만 주님께서 이 사실을 아시고 들춰낸 것이다. 그러니 얼마나 두려웠겠는가? 또한 야이로의 집에서 보낸 사람들의 말이다. “당신의 딸이 죽었나이다. 어찌하여 선생을 괴롭게 하나이까.”(35). 모두 끝났으니 주님 모시고 올 필요 없다는 뜻이다. 전형적인 절망의 말, 낙심하게 하고 무너지게 하는 말이다. 외경에 의하면 야이로가 이 말을 듣고 쓰러졌다고 한다. 마지막으로 야이로 딸의 죽음을 슬퍼한 사람들이다. 그들은 비웃는 말을 쏟아냈다(40). 여기에 나온 절박하게 간청하는 말을 비롯하여 질책하는 말, 두려하는 말, 절망하게 하는 말, 비웃는 말까지 이 모든 말들은 우리가 일상에서 흔히 접하는 말이고, 또한 우리가 자주 사용하는 말이기도하다.

 

주님의 말씀

하지만 주님의 말씀은 이들과 확연히 다르다. 본문에 주님의 말씀이 6 나오고 있다. 첫째 말씀이 누가 내 옷에 손을 대었느냐’(30)는 질문이다. 이는 치료받은 사람을 확인하기 위한 질문이 아니다. 혈루증이라는 무서운 불치병으로 인하여 육체적인 고통뿐만 아니라 사회적으로 고립되어 당한 정신적인 고통까지 치유하시고자 하신 말씀이다. 즉 인격적인 만남을 통해 영육간의 온전한 구원을 베푸시기 위해서 하신 말씀이다. 두 번째 하신 말씀을 보면 이 사실이 분명해 진다. “딸아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으니 평안히 가라. 네 병에서 놓여 건강할지어다.”(34). 여기에 나타난 주님의 말씀은 치유와 회복의 말, 위로와 격려의 말, 축복의 말이다. 셋째는 두려워하지 말고 믿기만 하라.”(36). 야이로의 집에서 온 사람들의 말을 듣고 쓰러진 야이로에게 하신 말씀이다. 딸이 죽도록 두지 않을 것이니 두려워하지 말고 주님을 믿으라는 뜻이다. 사람들의 말에 마음 두지 말고 주님의 말씀에만 집중하라는 뜻이다. 소망의 말이고, 믿음의 말, 확신의 말이다. 넷째는 너희가 어찌하여 떠들며 우느냐 이 아이가 죽은 것이 아니라 잔다 하시니”(39). 아이의 죽음을 두고 울며 슬퍼하는 사람들에게 하신 말씀이다. 이는 사망에 대한 선전포고와 같은 말이고, 생명의 선언과 같은 말이다. 다섯째는 달리다굼”(41)이다. 죽은 소녀를 향해 하신 말씀이다. 자고 있는 아이를 깨우듯 소녀야 일어나라.고 말씀하셨다. 이것은 죽은 자도 살려내는 살리는 생명의 말이다. 마지막으로 소녀에게 먹을 주라.”(43)고 그 부모에게 하신 말씀이다. 아이가 음식을 먹을 수 있을 만큼 온전히 회복되었음을 확인하라는 의미도 되지만 그 동안 질병으로 음식을 제대로 먹지 못한 아이에 대한 주님의 깊은 사랑과 배려의 말씀이다.

 

이와 같이 여러 사람의 말과 주님의 말씀이 얼마나 큰 차이가 있는지를 금방 알 수가 있다. 동시에 우리의 언어생활도 이 여러 사람의 말과 별 차이가 없다. 그런데 주님은 생명의 언어, 믿음의 언어, 소망의 언어, 격려와 배려의 언어, 축복의 언어, 감사의 언어, 사랑의 언어를 사용하셨다. 그래서 본문에서처럼 주님의 말씀을 듣는 자마다 살아나는 역사가 일어났다. 주님의 말씀에 죽은 야이로의 딸이 살아났고, 낙심하여 쓰러진 야이로가 소망을 품고 다시 일어났고, 두려움으로 사색이 된 여인이 위로와 평안을 얻고 집으로 돌아갔다. 이와 같은 주님의 언어생활을 본받는 저와 여러분이 되자!

 

말이 전부가 아니다.

복음에서 나온 주님의 말씀을 살펴보면 주님은 말의 연금술사와 같다. 하지만 주님은 말에 묶이지 않으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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