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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시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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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857회 작성일 18-07-22 13:0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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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시선

5:1~9

2018. 7/22. 11:00

같은 일 다른 삶

같은 벼슬살이를 하면서도 전혀 다른 삶을 살았던 두 사람의 이야기다. 한 사람은 공자(孔子)의 조카 공멸(孔蔑)이고, 다른 한 사람은 공자의 제자 복자천(宓子賤)이다. 공자가 조카 공멸에게 물었다. ‘말직이지만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공멸이 그 물음에 대답했다. ‘얻은 것은 하나도 없고, 잃은 것만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일이 많아 공부를 하지 못했고, 두 번째는 녹봉이 적어 친척을 돌볼 수 없었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여 친구들의 경조사조차 챙기지 못하여 관계가 소원해졌습니다.이 말을 듣고 마음이 불편한 공자는 같은 벼슬을 하고 있는 제자 복자천에게도 같은 질문을 했다. ‘벼슬해서 얻은 것이 무엇이고, 잃은 것이 무엇이냐?복자천이 대답했다. ‘잃은 것은 없고 얻은 것만 세 가지나 됩니다. 첫 번째는 예전에 스승님께 배운 것을 날마다 실천하고 있으니 이론과 실천이 나날이 분명해져 학문이 늘었고, 두 번째는 녹봉은 적지만 이를 아껴 친척에게 나누어주니 더욱 친근해졌습니다. 세 번째는 공무가 다급하지만 저녁에라도 틈을 내서 부지런히 경조사를 챙기니 친구들이 더욱 저를 친하게 여깁니다.공자가 이 말을 듣고 크게 기뻐하며 복자천을 이렇게 칭찬하였다. ‘네가 곧 군자(君子)로다. 네가 곧 군자로다. ()나라에 군자가 없었더라면 어디서 그런 덕을 배웠겠는가?’(說苑 政理篇에서).


같은 벼슬살이를 했는데 공멸은 잃은 것만 세 가지고, 복자천은 얻은 것만 세 가지였다. 공멸은 잃은 것만 보았고, 복자천은 얻은 것만 보았기 때문이다. 이와 같이 같은 일을 하면서도, 같은 하루를 보내면서도 어떤 사람은 불행에 빠져 살고, 어떤 사람은 행복에 겨워 산다. 그 차이는 바라보는 시선에 있다. 공멸처럼 잃은 것 없는 것 좋지 않는 것만 바라보면 불행이 쌓이게 되고, 복자천처럼 얻은 것 있는 것 좋은 것만 바라보면 행복이 쌓이게 된다. 예수님을 믿고 하나님의 자녀가 되면 삶을 해석하는 눈이 바뀌게 된다. 관점과 시선이 변한다는 것이다. 주님을 믿으면 주님의 시선을 갖게 되기 때문이다. 주님의 시선으로 사건과 사람을 바라보는 것은 우리의 삶을 가치있고 풍요롭게 만든다.

 

신앙생활은 눈 바꾸는 훈련이다.

그런데 이것은 어디까지나 희망사항이고, 주님을 믿는다면서 여전히 세상의 기준과 관점, 시선으로 사건(문제)이나 상황(환경), 사람을 대한다. 한 마디로 쉽게 우리의 시선이 바뀌지 않는다는 것이다. 이것은 우리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종이었던 사무엘 선지자도 그랬다. 사도들도 그랬다.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하나님께 불순종한 사울을 대신할 새로운 왕을 세우는 임무를 주셨다. 그러면서 사무엘을 베들레헴 이새의 집으로 보내서 그 아들 중에 한 사람에게 기름을 붓도록 하셨다. 사무엘은 이새의 장남 엘리압을 보고 그가 바로 하나님께서 기름을 부어 성별하실 사람이라고 생각했다. 엘리압의 걸출한 외모를 보고 이렇게 생각한 것이다. 그런데 하나님은 사무엘에게 말씀하셨다. ‘용모나 신장을 보지마라. 그는 이미 내 눈 밖에 났다. 나는 사람처럼 보지 않는다. 사람은 겉모양을 보지만 나는 속마음을 들여다본다.’(삼상16:7).


하나님의 시선으로 사람을 바라보지 못한 사무엘에 대한 책망의 말씀이다. 사무엘이 어떤 사람인가? 사무엘은 구약성경에서 모세와 함께 경건한 기도의 사람으로 꼽히고 있다(15:1). 직접 하나님의 음성을 들으며 사역하는 기도의 사람 사무엘 선지자도 이 정도라면 우리는 어떻겠는가? 그러니까 굳이 시선을 바꿀 필요 없이 대충 믿어도 좋다는 뜻은 아니다. 그만큼 어려운 일이니까 분발해야 한다는 것이다. 신앙생활은 세상의 기준과 관점, 시선을 바꾸는 것이다. 주님의 기준과 관점, 시선으로 사건을 보고, 상황이나 사람을 보는 훈련이다. 그래서 이 시간에는 주님의 시선(기준과 관점)에 대하여 은혜를 나누고 한다.

 

허상에 붙잡혀 사는 사람들
명절이 되어 주님께서 예루살렘을 방문하셨다. 대개의 순례자들이 예루살렘을 방문하면 가장 먼저 예루살렘 성전을 찾았다. 그곳은 그들이 밤낮으로 그리워하는 곳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주님은 달랐다. 주님께서 예루살렘에 도착하여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예루살렘 성전이 아니라 베데스다 연못이었다. 정말 의외의 장소였다. 거기는 많은 병자들이 소문에 의지하여 삶을 지탱하고 있는 곳이다. 그곳에서 지금으로 말하면 여러 치료물질을 함유한 온천이 가끔 솟아오를 때(간헐천) 그 물로 몸을 씻어 치료를 받은 사람이 있었던 것 같다. 당시는 과학적 지식이 부족한 때라 가끔 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천사의 소행이라 믿었고 물이 솟아오를 때 가장 먼저 연못으로 뛰어든 사람은 무슨 병이든 치료받는다는 소문이 확대생산 되었다. 그래서 이 소문을 믿고 각지에서 각색 병자가 이 연못가에 모여 물이 솟아오르기를 기다리고 있었다. 한 마디로 확인되지 않은 소문에 의지하여 살아가고 있는 것이다.

 

문제는 누구나 치료를 받고자 하지만 물이 솟아오를 때 가장 먼저 연못으로 뛰어든 단 한 사람에게만 치료의 기회가 주어진다는 것이다. 상황이 이렇다보니 모두 치료를 받아야 할 병자이고, 이들을 돌보고 있는 가족인데도 서로 불쌍히 여기며 돕고 위로하고 격려하기는커녕 살벌한 경쟁의식만 가지고 있었다. 다른 사람보다 먼저 연못에 뛰어들어야 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곳에 38년 된 병자가 있었다. 그는 보살펴주는 보호자도 없고, 혼자서 일어날 수도 없는 사람이었다. 누구보다도 치료가 절실한 사람이지만 가능성은 거의 0%에 가까웠다. 하지만 그는 이런 불가능한 상황에도 그저 낫고자하는 희미한 희망을 가지고 그곳에 누워있었다. 자신에게 치료의 기회가 불가능하다는 사실을 잘 알면서도 이런 헛된 기대에 희망을 품고 있는 것이다. 그러니 삶이 얼마나 숭고한지, 얼마나 참담하고 안타까운지를 알 수 있다. 알고 보면 이 사람이 곧 우리의 모습이다. 그런데 그의 이런 불가능한 상황을 바꿔줄 분이 찾아오셨다. 예수님이시다. 주님은 연못물이 솟아오르는 것을 기다렸다가 연못으로 들어갈 것도 없이 말씀 한 마디로 즉시 온전하게 고쳐주셨다(8,9).

 

시선관리가 중요하다.

본문은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준다. 첫째는 예수님만이 치료자시라는 것이다. 연못에 들어가야 치료를 받는 것이 아니라 주님을 만나야 치료를 받는다는 것이다. 그러니 소문을 따라 살지 말고 주님을 따라 살고 주님의 말씀을 따라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지금 우리도 확인되지 않은 수많은 소문, 심지어는 가짜뉴스 홍수 속에 살고 있다. 이럴 때일수록 주님을 깊이 만나고, 주님의 말씀에 집중해야 한다. 그래야 치료를 보장받을 수 있다. 둘째는 육신의 치료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이다. 그곳에 많은 병자가 있었지만 주님의 치료를 받은 사람은 38년 된 병자가 유일했다. 왜 주님은 그 사람만 치료하신 것일까? 육신의 치료가 전부가 아니라는 것을 강조하기 위함이다. 성전에서 치료받은 사람을 만나 하신 말씀을 보면 더욱 분명해 진다. “보라 네가 나았으니 더 심한 것이 생기지 않게 다시는 죄를 범하지 말라.”(14). 사정이 딱하여 치료해주시긴 했으나 치료 후가 더 위험할 수 있으니 조심하라는 말씀이다.

 

셋째는 주님의 관심과 시선이 어디에, 누구에게 있는지를 잘 보여준다. 주님은 성전보다 병자들이 모여 있는 베데스다 연못을 먼저 찾아가셨고, 그곳에 있는 병자들 중에서도 병이 가장 심한 38년 된 사람을 찾아가셨다. 그리고 그 사람만 고쳐주셨다. 이는 주님을 따르는 우리가 어디에, 누구에게 관심과 시선을 두고 살아야할지를 보여주신 것이다. 시선관리의 중요성을 강조하고 있는 것이다. 아울러 우리가 눈여겨 보아야할 것은 치료를 받은 이 사람이 스스로 걷게 되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성전이었다는 점이다. 만약 걷게 된다면 가보고 싶은 곳이 얼마나 많았겠는가? 만나고 싶은 사람, 가보고 싶은 곳이 많았을 것이다. 그런데 걷게 되자 가장 먼저 찾은 곳이 성전이었다. 평생 자리에 누워있어도 마음이 성전에 있었음을 잘 보여준다. 우리 또한 주님처럼 주님의 사랑이 필요하고, 주님의 사랑을 필요로 하는 사람에게 시선을 두고, 치료 받은 이 병자처럼 자나깨나 주님의 전에 마음을 두자!

 

한 때, 고지론(高地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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