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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겸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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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781회 작성일 18-08-19 12:4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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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님을 본받아, ‘겸손

3:13~17

2018. 8/19. 11:00

거룩한 바보

정호승 시인의 빈손의 의미라는 소박하면서도 멋진 시가 있다. 내용을 소개하면 다음과 같다.

 

내가 누군가의 손을 잡기 위해서는

내 손이 빈손이어야 한다.

내 손에 너무 많은 것을 올려놓거나

너무 많은 것을 움켜쥐지 말아야 한다.

내 손에 다른 무엇이 가득 들어 있는 한

남의 손을 잡을 수 없다.

소유의 손은 반드시 상처를 입으나

텅 빈 손은 다른 사람의 생명을 구한다.

그동안 내가 빈손이 되어

다른 사람의 손을

얼마만큼 잡았는지 참으로 부끄럽다.

 

이 시를 읽다보니 겸손이란 단어가 떠올랐다. 그래서 나름 해석하기를 빈손을 겸손의 상징으로 생각했다. 움켜쥐고는 붙잡을 수도, 일으킬 수도, 껴안을 수도 없다. 빈손처럼 겸손해야 넘어지는 사람을 잡아줄 수 있고, 절망으로 주저앉은 사람을 일으켜줄 수 있고, 삶에 지친 사람을 꼭 껴안고 토닥여줄 수가 있다. 빈손처럼 자신을 텅 비워 겸손해야 자신도 채워지고 누군가에게 도움이 되고, 희망이 되고, 사랑이 되고, 생명이 될 수가 있다. 하지만 사람들은 빈손으로 상징되는 겸손의 삶보다는 3의 삶을 선택하고 있다. 자기 과장, 과대, 과시가 그것이다. 그들은 누군가에게 자신을 드러내려고 안달을 한다. 그것도 적극적으로 자신을 드러내고 선전한다. 그들은 아무리 능력을 갖추고 있어도 스스로 자신에 대해 마케팅을 제대로 하지 못하면 아무도 인정하지 않고, 오히려 바보취급 받는다고 생각한다. 그러니 이런 사람들에게 겸손은 더 이상 미덕이 아니라 능력부족이고, 못난이의 옹색한 자기 변명내지는 자기 합리화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그런데도 믿음의 사람들은 겸손을 강조하고, 바보취급을 받으면서도 그것을 실천하고 있다. 그러니 세속적 안목으로 이들은 바보. 하지만 그냥 바보가 아니라 거기에 거룩한이란 수식어가 붙은 거룩한 바보. 그리고 그 거룩한 바보행렬 가장 선두에 우리의 주님이신 예수님이 계신다. 이 시간에는 거룩한 바보의 삶을 가장 앞장서서 실천하셨던 주님의 겸손에 대하여 생각해 보려고 한다.

 

겸손, 주님의 삶을 대표하는 단어

바울이 전도여행 중에 세운 여러 교회 가운데 가장 아끼고 사랑했던 교회가 빌립보 교회였다. 빌립보 교회 역시 바울을 사랑하고 잘 섬겼다. 이 아름다운 교회에도 문제가 있었다. 그것은 섬김에 있어서 자신을 드러내려는 사람들 때문이다. 주님을 사랑하고 지체를 사랑하는 마음보다 칭찬받고 인정받고 싶은 마음이 앞섰다. 그러다보니 작은 일을 하고서도 생색을 내고, 알아주지 않으면 속상해하고, 아예 자신을 드러내는 일에만 관심을 보였다. 그래서 교회가 어지러웠다. 바울은 이런 세속적인 관점으로 주님을 섬기며 문제를 일으키고 있는 사람들에게 섬기되 겸손으로 섬기라고 권면하면서 그 모델로 우리 주님의 겸손을 소개하였다. 그것이 바울의 그리스도 찬가로 불리는 2:5~11이다(찾아서 함께 읽음). 우리 주님의 생애를 단 몇 구절로 압축해서 핵심적으로 잘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이 내용을 한 단어로 요약하여 표현하면 겸손이다. 겸손은 주님의 삶을 대표하는 단어다.

 

사실 전능하신 하나님이 유한한 사람이 되신 주님의 탄생은 겸손의 극치. 어떤 분이 주님의 탄생을 이렇게 표현했다. ‘성탄은 100m 키의 하나님이 1m 키의 사람이 되신 사건이다.참으로 실감이 나는 멋진 표현이다. 지극히 높고 크신 분이 사람이 되신 것도 모자라 가장 낮은 곳 짐승의 밥통에서 탄생하셨고, 사역도 높은 곳 예루살렘이 아니라 이스라엘에서 가장 낮은 땅 갈릴리를 중심으로 하셨다. 사역의 대상도 마찬가지다. 병들고 헐벗고 굶주린 사람, 국가로부터 백성 대접도 받지 못한 이방인과 같은 취급을 받은 사람들(ὄχλος)이었다. 이런 사람들과 접촉 자체를 꺼렸던 당시 유대교 지도자들과 달리 주님은 그들과 함께 먹고 마시며 동무가 되어 주셨다. 뿐만 아니라 사람들은 사소한 일도 드러내고 싶어 하는데 주님은 엄청난 일을 하시고도 주변에 알리지 말라고 엄히 경계를 하셨다. 그저 오른 손이 하는 일을 왼손도 모르도록 은밀하고 겸손하게 하셨다.

 

겸손한 사람이 하나님의 의를 이룬다.

본문 또한 주님의 겸손을 잘 보여주는 말씀이다. 주님께서 공적 활동을 시작하시기 전에 세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내용인데, 네 복음서에 모두 기록되어 있다. 그런데 마태복음에만 다음과 같은 주님과 요한 사이의 대화(14,15)가 첨가되어 있다. 요한의 세례는 죄는 씻는 상징이었다(3:6). 죄가 없으신 주님이시니 주님은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실 필요가 없었다. 이 사실을 잘 알고 있었던 요한은 자신에게 세례를 받으러 오신 주님께 세례 베푸는 것을 주저하며 오히려 자신이 주님께 세례를 받아야한다고 했다(14). 그러자 주님은 세례를 받는 것이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것이라며 굳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셨다(15). 이것은 당시 마태공동체가 처한 상황을 보여준다. 마태공동체 안에 주님은 죄가 없으신 하나님이 아니라 죄를 지닌 인간이고, 주님보다 요한이 더 크다고 여기는 사람들이 있었고, 이런 맥락으로 주님이 요한에게 세례를 받으신 것을 해석한 사람들이 있었다. 이것을 잠재우기 위해 마태는 이 대화를 첨가하여 주님은 하나님의 의를 이루기 위해서 받으실 필요가 없는 회개의 세례를 요한에게 겸손히 받으신 것이라고 강조한 것이다. 여기서 하나님의 의는 마태복음의 특징을 한마디로 요약하고 있는 주제어로 하나님이 세우실 포괄적인 구원질서를 뜻한다. 이렇게 해서 마태는 겸손의 모델이신 주님 사역의 시작을 알렸다.

 

마태는 주님의 이 수세사건을 통해 주님의 겸손과 겸손한 사람을 통해 하나님의 구원질서()가 이루어진다는 것을 보여주었다. 그리고 하나님의 의가 이루어지니까 세 가지 현상이 그곳에 일어났다. 첫째는 하늘이 열렸다. ‘구원의 시대가 시작되었다.는 의미다. 구시대의 상징인 율법시대가 가고 주님을 통한 은혜(구원)의 새로운 시대가 열렸다는 선언이다. 둘째는 하늘로부터 성령이 비둘기처럼 임하셨다. ‘예수님이 구약에서 약속하신 메시야시다.는 의미다. 셋째는 하늘에서 소리가 났다. ‘예수님이 신적 존재시다.는 의미다. 나사렛 출신의 목수 요셉의 아들이 아니라 하나님의 아들이라는 공개적인 하나님의 선포였다. 모두가 신비로운 사건이었다. 이는 겸손하신 주님의 모습과 더불어 겸손의 중요성을 잘 보여준다. 겸손은 곧 하나님의 의를 이루는 일이라는 것이고, 또한 겸손히 행할 때 하늘이 열리고, 성령의 기름 부으심이 있고, 주님의 음성이 들여진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겸손히 따르고 겸손히 섬겨야 주님의 뜻을 이룰 수 있고, 주님을 뜻을 이룰 때 갖가지 신령한 영적인 복을 경험할 수가 있다. 우리가 주님을 겸손히 따르고 겸손히 섬겨야할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그래서 어거스틴(St. Augustine)은 성도가 추구해야할 첫째와 둘째, 셋째의 덕이 모두 겸손이라고 했다. 그러면서 그는 천사를 사탄으로 만든 것이 교만이고, 인간을 천사로 만든 것이 겸손이라.고 했다. 겸손은 미덕의 바구니다. 무엇이든 겸손의 바구니에 담으면 유익하고 아름답게 된다.

 

뽐내면 바지 벗겨진다!

어느 신부의 글인데, 아마도 자신의 이야기 같았다. 친구들과 구슬치기를 하면 항상 구슬을 잃기만 하는 한 아이가 있었다. 그런데 하루는 구슬치기에서 계속 이겨 그동안 잃었던 구슬을 모두 되찾고도 남았다. 그래서 구슬이 양쪽 바지 호주머니에 가득 찼다. 집으로 가는 길에 여자 아이들이 놀고 있는 곳을 지나가게 되었는데, 은근히 구슬을 많이 땄다는 것을 자랑하고 싶었다. 그렇다고 내놓고 자랑할 수도 없고 해서 여자 아이들 앞을 지나가며 팔짝팔짝 뛰어 구슬이 서로 부딪치는 소리를 내게 해서 자랑하려고 했다. 그래서 그는 여자 아이들 앞에서 팔짝팔짝 뛰었고, 구슬 부딪치는 소리에 여자 아이들이 그를 처다 보았다. 기분이 매우 좋았다. 그런데 이게 어찌된 일인가? 구슬의 무게를 견디지 못한 바지의 고무줄이 뚝 끊어지면서 바지가 훅 벗겨지고 말았다. 정말 순식간에 일어난 일이었다. 다들 어려운 시절이라 홑바지만 입고 있어서 여자 아이들 앞에서 대형 사고를 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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