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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07-06-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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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4,011회 작성일 07-06-11 12:3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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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나님은 예배자를 찾으신다.
요4:23~24

나폴레옹이 워터루(Waterloo) 전쟁에서 패한 후 세인트 헤레나(Saint Helena) 섬에 유배되었습니다. 그 때 어떤 기자가 나폴레옹을 찾아와서 이런 질문을 했습니다.
“폐하께서 지금까지 살아오는 동안 가장 행복했던 순간이 언제였습니까?”
한참을 생각에 잠겨있던 나폴레옹이 대답을 했습니다.
“전투가 치열했던 어떤 주일이요. 그땐 졸병이었지만 철모를 벗고 교회에 가서 하나님께 감사하면서 눈물을 흘리며 예배를 드리던 때요. 그리고 나는 어느 때부터인가 예배에 빠지기 시작했고, 지금은 전쟁에 패하여 이처럼 유배되어 있소.”

나폴레옹은 자기 생애 가장 감격스러웠던 순간을 커다란 전투에서 승리한 날도, 장군으로 승진한 날도, 프랑스의 황제로 등극한 날도 아니었다고 말합니다. 졸병의 신분이지만 하나님 앞에 나아가 예배드리던 때가 가장 감격스러운 순간이었고, 예배를 잃어버린 것이 곧 인생실패의 원인이라고 고백합니다. 이는 인생의 영화를 다 경험한 사람의 고백으로, 우리 인생에서 가장 소중하고, 감격스러운 일이 무엇인가를 분명하게 가르쳐 주고 있습니다. 저는 이 시간 제 자신을 포함해서 여러분에게 묻고 싶습니다. 우린 지난 2년 반 동안 하나님 앞에 예배를 드려왔습니다. 그런데 그 많은 예배 중에 몇 번이나 예배의 감격을 경험하였습니까?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통해서 하시기를 원하시는 것이 세 가지가 있습니다. 첫째는 하나님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이 땅에서 우리를 부르시고 교회를 세우신 가장 본질적인 목적이요, 우리와 교회가 이 땅에 존재하는 이유입니다. 둘째는 이웃을 섬기는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한 지체가 된 신자들은 물론 아직 믿지 않는 사람들까지 섬기는 것입니다. 그리고 셋째는 사람뿐만 아니라 이 세상 모든 것을 섬기는 것입니다. 하나님이 우리를 섬기는 자로 부르셨습니다. 그런데 저는 지난 주일(6/3) 설교에서, 예배의 정신이 섬김이요, 예배자는 섬기는 자라고 말씀드렸습니다. 그러므로 하나님이 우리를 부르셔서 우리를 통해 하시기를 원하시는 이 세 가지를 모두 충족하는 길은 ‘예배’에 있는 것입니다. 예배가 곧 주님을 섬기고, 이웃을 섬기고, 세상을 섬기는 길입니다.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은 이 땅에서 크게 성공한 부자나 높은 지위를 가진 권력자가 아닙니다. 지식이 높은 학자도, 매일 여론을 주도하고 있는 지도자나 유명인도 아닙니다. 자신의 삶과 물질을 아낌없이 헌신하고 봉사한 사람도 아닙니다. 하나님이 진정으로 찾는 사람은 예배자(worshipper)입니다. 그래서 사도 베드로는 우리가 먼저 예배하는 자가 될 것을 말씀하고 있는 것입니다.

“너희가 주의 인자하심을 맛보았으면 그리하라. 사람에게는 버린 바가 되었으나 하나님께는 택하심을 입은 보배로운 산돌이신 예수에게 나아와, 너희도 산돌같이 신령한 집으로 세워지고 예수 그리스도로 말미암아 하나님이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를 드릴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벧전2:3~5).

여기서 ‘산돌이신 예수’는 우리 예배의 대상이시고, ‘예수에게 나아와’는 예배의 대상에게로의 초대입니다. 그리고 ‘기쁘게 받으실 신령한 제사’는 예배이고, ‘거룩한 제사장이 될지니라.’는 예배하는 자가 되라는 말씀입니다. 오늘 본문도 마찬가지입니다. 예배의 대상을 바로 알아 올바른 예배를 드리라는 것입니다. 하나님께서 이런 사람들을 찾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무엇’이 되기에 앞서 가장 먼저 주님께 나아가서 예배하는 예배자가 되어야 합니다. 왜냐하면 하나님께서 이 사람을 찾으시기 때문입니다. 이는 그 만큼 우리의 예배가 중요함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은 예배를 소중하게 여기시고, 예배자를 찾으시는가?

1.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경배(敬拜)입니다.
예배를 헬라어로 ‘프로스퀴네오’(προσκυνεω)라고 합니다. 이는 ‘절하다. 굽어 엎드리다. 입을 맞추다’는 뜻입니다. 흔히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경외, 혹은 경배란 말과 같은 의미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경외란 하나님을 공경하고 두려워하는 것입니다. 여기서 두려움은 공포가 아니라 존경과 존귀의 의미입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높여드리는 것, 오직 하나님께만 영광을 돌리는 것이 예배입니다.

하나님은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는 말씀을 비롯하여, 하나님을 경외하는 자를 천사로 지키시고(시34:7), 부족함이 없는 축복을 베푸시며(시34:9~10), 기뻐하신다(시147:11)고 하셨습니다. 또한 하나님을 경외함이 보배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너의 시대에 평안함이 있으며 구원과 지혜와 지식이 풍성할 것이니 여호와를 경외함이 너의 보배니라.”(사33:6). 이 모든 말씀의 결론은 하나님께서 우리의 예배를 이처럼 소중하게 여기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하나님은 예배자를 기뻐하시고, 예배자를 찾으시는 것입니다.

마태복음에, 예수님께서 세례요한에서 세례를 받으시고 물에서 올라오실 때, 하늘 문이 열리면서 성령이 비둘기처럼 예수님의 머리위로 내려왔습니다. 그리고 소리가 하늘에서 나기를 “이는 내 사랑하는 아들이요, 내 기뻐하는 자라.”(3:17, 참고 17:5)고 하였습니다. 예수님은 하나님의 기뻐하시는 자였습니다. 그 중요한 이유는 예수님이 하나님이시면서도 예배자의 삶을 사셨기 때문입니다. 이사야 선지자는 예수님의 삶에 대하여 이렇게 예언하였습니다. “그가 여호와를 경외함으로 즐거움을 삼을 것이며......” 이는 예수님의 삶이 예배에 집중하는 생활이 될 것을 예언한 것입니다(히브리어로 즐거움이란 ‘~에 집중한 것’, ‘~마음을 쏟아 부어 몰두한 것’을 의미함). 그래서 하나님이 예수님을 ‘내 기뻐하는 자’라고 말씀하신 것입니다. 우리 역시 주님의 기뻐하는 자가 되는 비결도 예배에 있습니다.

반면에 하나님은 예배를 무시하는 자를 용납하시지 않습니다. 예배를 무시하는 것은 하나님 자신을 무시한 것과 같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경멸히 여기리라.”(삼상2:30)고 하셨습니다.

이스라엘의 마지막 사사요, 제사장인 엘리의 이야기가 사무엘상 첫 부분에 나옵니다. 하나님께서 이 제사장 집안을 완전히 멸망시키십니다. 두 아들은 블레셋과의 전투에서 같은 날 전사하고, 이 소식을 듣고 임신한 며느리가 아이를 낳다 죽습니다. 엘리 역시 의자에 앉아있다 목이 부러져 죽습니다. 뿐만 아니라 하나님의 언약궤까지 블레셋에게 빼앗기는 수치를 당하게 됩니다. 그런데 이런 불행의 원인을 성경은 엘리와 그 자식들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멸시함에 있다고 말씀합니다. 그런데 이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지 않고, 멸시한 구체적인 행위란 예배입니다. 하나님께서 엘리와 그의 자녀들에게 이렇게 책망하십니다. “너희가 어찌하여 내가 나의 처소에서 명한 나의 제물과 예물을 밟으며, 네 아들들을 나보다 중히 여겨 내 백성 이스라엘의 드리는 가장 좋은 것으로 스스로 살지게 하느냐.”(삼상2:29). “이 소년들의 죄가 여호와 앞에 심히 큼은 그들이 여호와의 제사를 무시함이니라.”(삼상2:17)  

사랑하는 여러분, 하나님의 보호와 축복, 하나님이 기뻐하시고 찾으시는 그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하나님을 경외하는 참된 예배자가 되시기 바랍니다.

2.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사랑의 고백입니다.
하나님은 존중히 여기는 자를 존중히 여기시고(삼상2:30), 사랑하는 자를 사랑하시며, 간절히 찾는 자를 만나 주신다(잠8:17)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성경은 하나님에 대한 사랑을 강조하고 있는 것입니다.

한 율법교사가 예수님을 찾아와서 물었습니다. ‘가장 중요한 계명이 무엇입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이렇게 답하셨습니다. “네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뜻을 다하여 주 너의 하나님을 사랑하라....... 네 이웃을 네 몸처럼 사랑하라. 이 두 계명이 온 율법과 선지자의 강령이니라.”(마22:37~40). 사랑이 최고의 계명이라는 말씀입니다. 이런 이유로 우리 기독교 정신을 한 단어로 ‘사랑’이라고 한 것입니다.

그러면 우리가 어떻게 하나님을 사랑할 수가 있고, 간절히 찾을 수가 있을까요? 사실 하나님이 우리를 사랑하시고, 찾으신다면 모를까, 우리가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사랑하고 찾는다는 것은 불가능한 일입니다. 보이지도 볼 수도 없는 분을 어떻게 사랑하고 찾을 수 있겠습니까? 그럼에도 불구하고 성경은 하나님을 사랑하라. 하나님을 찾으라고 말씀하십니다. 그 방법이 바로 ‘예배’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께 대한 우리의 사랑의 고백이고, 표현입니다. 하나님을 존중히 여기고, 하나님을 찾는 방법입니다. 그래서 무엇보다도 우리의 삶에서 예배가 중요한 것이고, 예배를 삶의 중심이라, 예배에 목숨을 걸어야 한다고 말한 것입니다.

구약성경 역대기서는 구약성경 중에서 가장 나중에 기록된 책입니다. 바벨론 포로에서 돌아온 이스라엘 백성들을 위로하고 격려하기 위해서 기록된 책입니다(열왕기와 비교). 바벨론 포로는 이스라엘 백성들에게 정신적으로, 신앙적으로 큰 충격을 주어 하나님의 백성으로서의 정체성을 흔들어 놓은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자신들을 잊어버리셨다’고 탄식하며 스스로 절망 가운데 있었습니다.

이사야 49장에 이와 같은 상황이 간략하고 분명하게 소개되어 있습니다. “오직 시온이 이르기를 여호와께서 나를 버리시며 주께서 나를 잊으셨다 하였거니와, 여인이 어찌 그 젖 먹는 자식을 잊겠으며, 자기 태에서 난 아들을 긍휼히 여기지 않겠느냐. 그들은 혹시 잊을지라도 나는 너를 잊지 아니할 것이라. 내가 너를 손바닥에 새겼고 너의 성벽이 항상 내 앞에 있나니”(사49:14~16). 역대기는 이런 백성들에게 민족의 자존과 선민으로서의 정체성을 세우기 위해서 기록한 책이고, 이스라엘의 고민에 대한 하나님의 마음을 담은 책입니다.

역대기서 내용의 특징은 긴 족보 이야기(대상 1장에서 9장까지)와 왕들의 종교개혁 이야기입니다. 특히 종교를 개혁하여 예배를 부흥시킨 왕들마다 하나님의 은혜로 국가의 번영을 이루고 민족의 자존을 만방에 떨쳤다고 기록합니다. 즉 민족적인 자존심과 정체성을 회복하는 길은 하나님께 대한 예배의 회복에 있음을 보여준 것입니다. 우리 민족의 살길은 무너진 제단을 다시 쌓고, 꺼진 제단의 불을 살려서 예배를 회복하는 것. 그래서 신앙을 회복하는 것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이 원리는 오늘도 동일하게 적용되는 것입니다. 오늘날 우리 한국교회와 한국사회도 그렇게 희망적이 않습니다. 특히 신자와 교회의 위상은 바닥을 치고 있습니다. 그래서 교회가 부흥하기는커녕 타종교로 빠져나가고 있는 실정입니다. 그 원인이 예배에 있습니다. 신자 개인과 교회들에서 예배의 삶이 무너지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린 ‘교회는 온갖 장식품으로 화려하게 빛나지만, 정작 빛나야 할 보석인 예배를 잃어버렸다’는 토저(A. W. Tozer) 목사의 탄식을 새겨들어야 합니다. 이 잃어버린 보석인 예배를 회복하는 것만이 개인도 교회도 사회도 희망이 있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것입니다. 하나님을 지극히 높여 드리는 것입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찾아가는 방법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날 수 있습니다. 예배는 하나님을 사랑하는 고백입니다. 사랑의 고백인 이 예배를 통해 하나님의 사랑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하나님은 이런 예배자를 찾고 계십니다. 저와 여러분, 그리고 우리 교회가 하나님이 찾으시는 사람, 하나님이 찾으시는 교회가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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