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07-06-17) > 설교말씀 기뻐하는교회 - 대한예수교장로회

본문 바로가기

설교말씀

설교말씀 HOME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07-06-17)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9,313회 작성일 07-06-17 16:47

본문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사6:1~8

앤드류 존슨(Andrew Johnson)이라는 아이가 있었습니다. 가난 때문에 초등학교도 마치지 못하고 양복점에 취직하여 재봉 일을 했고, 17세에 양복점을 냈습니다. 그 다음해에 구두 수선공의 딸과 결혼했습니다. 존슨은 아내에게서 매일저녁 글을 배웠습니다. 사랑스런 아내에게서 글을 배우면서 공부에 대한 즐거움을 알게 된 존슨은 밤새워 책을 읽었습니다. 결국 존슨은 테네시주 주지사를 거쳐 상원의원이 되었고, 나중 미국 17대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그가 대통령에 출마했을 때, 상대편 당에서 그에게 비난을 퍼부었습니다. “초등학교도 졸업하지 못한 양복쟁이가 어떻게 일국의 대통령 자리를 꿈꾸는가?”고. 그러나 존슨은 주눅들지 않고 오히려 이렇게 되물었습니다. “예수님이 어느 초등학교를 졸업했는지 아는 사람 있습니까? 더구나 예수님은 목수 출신 아닙니까? 그러나 나는 아직까지 예수님보다 위대한 사람을 알지 못합니다.” 결국 존슨은 압도적인 지지로 미국 대통령(1865-1869, 제17대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그는 좋은 아내를 만나 가난한 양복점 재봉사에서 한 나라의 대통령까지 되었습니다.

인간의 삶은 만남의 연속입니다. 살아가면서 누구를 만나고, 무엇을 만나느냐는 너무도 중요합니다. 그것은 그 사람의 삶의 방향과 질, 그리고 그 사람에 대한 평가를 결정하기 때문입니다. 존슨 대통령이 좋은 예라고 생각합니다. 하물며 사람을 잘 만나도 이렇게 되는데 전능하신 하나님을 만나면 우리의 삶이 어떻게 되겠습니까? 얼마나 아름답고 놀랍게 변하겠습니까? 그런데 이 하나님과의 만남의 방법이 바로 예배입니다. 그리고 하나님은 이 예배를 통하여 우리와 만나기를 무척 즐겨하신다는 것입니다.

이집트에서 나온 이스라엘 백성들은 광양생활을 하면서 하나님께서 모세를 통해 말씀하신대로 하나님을 위해 집을 만들었습니다. 이를 성막이라고 부르는데, 이 성막은 하나님의 임재의 상징이었습니다. 하나님이 이스라엘 백성과 함께 하시고, 이스라엘 백성 가운데 계심을 상징하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들은 이 성막을 중심으로 생활을 했습니다. 그리고 제사제도를 세워 하나님을 섬기도록 했는데, 백성들은 이 제사를 통하여 하나님께 나아가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었습니다. 이 제사가 신약적인 의미로 예배입니다. 그러므로 예배는 만남입니다. 우리를 창조하시고 구원하신 영광스러운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우린 이 예배를 통해 영으로 계신 하나님을 만날 수가 있습니다. 그러니 지금 우리가 드리고 있는 이 예배가 얼마나 소중한지 아시겠지요? 그리고 교회는 만남의 장소이고, 주일은 만남의 날입니다. 지금 이 시간은 만남의 시간입니다.

본문은 선지자 이사야와 하나님과의 영광스러운 만남의 사건을 기록한 내용입니다. 이사야는 BC740~680년까지 (웃시야, 요담, 아하스, 히스기야 왕이 다스리던)남쪽 유다에서 활동했던 선지자입니다. 본문의 사건은 “웃시야 왕이 죽던 해......”(1)에 경험한 것입니다. 비록 말년에 하나님 앞에 교만하여 그 벌로 문둥병자가 되었지만, 웃시야 왕은 유대 중흥의 명군입니다. 그가 살아있는 동안 이웃 나라가 유대를 넘보지 못했는데, 그 왕이 죽은 것입니다. 반면에 그의 아들 요담은 그리 탁월하지 못한 사람이었습니다. 때문에 자칫 심각한 국가적 위기를 맞을 수도 있는 시기였습니다. 그래서 선지자 이사야는 나라의 장래가 걱정되어 성전으로 가서 하나님께 기도하게 된 것입니다. ‘위기는 기회’라는 말이 있듯이, 인간의 절망은 하나님과 만날 수 있는 기회입니다. 절망은 하나님의 기회요, 하나님을 만나는 기회요, 하늘 문이 열리는 기회요, 하나님의 축복이 나타나는 기회입니다. 선지자 이사야는 이 절망적인 상황에서 하나님을 새롭게 만나게 되었습니다.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잠기게 되었고, 자신의 본래성과, 아울러 자신의 사명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우리의 예배도 마찬가집니다. 우린 예배를 통해 하나님을 만날 수 있고, 예배를 통해 이사야와 같은 경험을 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그러면 하나님과의 만남의 축복이 어떤 것인지를 생각해 보겠습니다.  

1.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잠기게 됩니다(1~3).
이렇게 민족의 문제를 안고 성전에서 기도하던 중에 이사야는 하나님에 대하여 세 가지를 보았습니다(이는 이사야의 기도에 대한 응답이기도 합니다).

먼저, 그는 하늘 보좌에 앉아 계신 거룩하신 하나님을 보았습니다(1中). 이를 통하여 이사야는 유다를 다스리던 웃시야 왕은 죽었지만 웃시야 왕의 보좌보다 더 높은 보좌에서 이 나라를 지키시고 다스리시는 만왕의 왕 되시는 하나님. 살아계셔서 절대적인 주권과 능력을 가지시고 하늘과 땅의 모든 일을 주장하시며, 다스리시는 것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래서 왕의 죽음과 나라 장래에 대한 큰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다음으로, 성전에 가득한 하나님의 옷자락을 보았습니다(1下). 이 옷자락은 하나님께서 성전 안에 임재하신 상징이고, 하나님의 자비와 은총, 보호가 성전에 가득함을 보여 주는 것입니다. 여기서 이사야는 이 성전과 성전에서 예배하는 자들을 감싸주시고 보호해 주시는 하나님의 은혜를 깨닫게 되었습니다. 그렇습니다. 하나님은 하나님의 성전과 하나님께 예배하는 자들을 특별히 돌아보시고 축복하시는 분이십니다(계11:1).

그리고 마지막으로, 천사들(스랍)이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을 보았습니다(2,3). 천사(스랍)들도 거룩하신 하나님을 뵈올 수가 없어서 두 날개로 얼굴을 가리고(이는 하나님을 경외하는 태도), 둘로는 발을 가리고(겸손히 자기를 부인하는 태도), 둘로는 날면서(신속하게 하나님의 말씀에 순종하는 태도) 하나님의 거룩함을 찬양하고 있는 모습입니다. 이 스랍들은 하나님 보좌 주위에서 하나님을 섬기고, 하나님을 찬양하며, 하나님의 말씀을 준행하는 특별천사들입니다. 이사야는 하나님은 천사들과 천하 만민들에게 찬송과 경배를 영원토록 받으시기에 합당하신 분이심을 깨닫게 되었습니다. 이 때 하나님의 위엄과 권위로 성전이 진동하였고, 영광의 상징인 구름이 성전에 가득했습니다(4).

이사야는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한없는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경험하고 그 영광에 잠기게 되었습니다. 그는 이 때 하나님의 위엄과 영광 앞에서 죽는 줄 알았습니다. 사실 이 경험을 하기 전까지의 이사야는 부름받은 하나님의 선지자였지만 그의 신앙은 이성의 범주, 윤리적인 범주를 벗어나지 못한 상태였습니다. 체험적이 아니라 관념적인 신앙생활, 역동적이 아니라 형식적인 신앙생활이었습니다. 그런데 이 영광스러운 경험을 통하여 그의 삶에 엄청난 변화가 일어나게 되었고, 온통 하나님의 영광으로 그의 삶이 가득 채워지게 되었습니다. 특히 “문지방의 터가 요동하며” 라는 4절 말씀은 하나님이 임재하실 때 나타나는 현상이기도 하지만, 하나님을 만난 이사야의 존재상태에 대한 상징이기도 합니다. 기존의 사상, 가치, 생활 등 모든 것이 철저히 무너져 내리는 모습을 보여준 것입니다. 그래서 이사야는 완전히 새로운 사람으로 다시 태어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하나님을 예배하는 예배자만이 경험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역시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을 만나고, 그 만남을 통하여 이와 같은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을 경험할 수가 있는 것입니다.

우린 신앙생활을 하면서도 마음의 즐거움이나 기쁨, 감사, 감격이 없고, 여전히 무엇을 먹을까 무엇을 마실까 무엇을 입을까 하는 생활의 염려를 극복하지 못하고 있습니다. 그리고 육체적 욕심과 욕망의 노예가 되어 우리의 삶을 기쁘게 주님께 드리지 못하고 있습니다. 바로 그 이유가 예배의 영광을 경험하지 못한 까닭입니다. 그러므로 우리 모두 하나님과의 만남인 이 예배를 통하여 예배의 영광을 경험할 수 있도록 예배를 소중히 여기고, 예배를 기대하고, 예배를 사모할 수 있기를 바랍니다.

2.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본래성을 발견하게 해줍니다(5).
어떤 철인은 “가장 어려운 것은 자기를 아는 것이요, 가장 쉬운 것은 남의 말을 하는 것이다.”(탈레스)고 했습니다. 이사야는 영광스러운 주님의 모습을 뵐게 되자, 자신의 모습이 보였습니다. 그런데 그 모습은 말로 표현할 수 없는 끔찍한 모습이었습니다. 그래서 그는 이렇게 탄식합니다. “그 때에 내가 말하되 화로다 나여 망하게 되었도다. 나는 입술이 부정한 사람이요 입술이 부정한 백성 중에 거하면서 만군의 여호와이신 왕을 뵈었음이로다.”(5).

이 때 비로소 이사야는 자신의 참 모습을 보게 된 것입니다. 죄로 더럽혀진 형편없는 자신의 본모습(본래성)을 보게 된 것입니다. 그렇습니다. 사람은 거룩하신 하나님을 만나기 전에는 자신이 죄인이라는 본모습을 깨닫지 못합니다. 자신이 얼마나 심각하고 절망적인 죄인인지를 알지 못합니다. 오히려 하나님과 견줄 만큼 자신이 의롭다고 생각합니다. 하지만 거룩하신 하나님의 의로운 빛이 우리 심령 속에 비춰질 때 비로소 그 사실을 깨닫게 되고, 자기에 대한 절망감에 빠져 회개의 눈물을 쏟아 내놓게 되는 것입니다.

이것이 하나님과의 만남인 예배를 통하여 우리가 경험할 수 있는 일입니다. 아울러 그는 용서의 은혜도 경험하게 됩니다. 6~7절에 “때에 그 스랍의 하나가 화저로 단에서 취한바 핀 숯을 손에 가지고 내게로 날아와서 그것을 내 입에 대며 가로되 보라 이것이 네 입에 닿았으니 네 악이 제하여졌고 네 죄가 사하여졌느니라.”고 했습니다. 하나님은 죄인 된 자신의 모습을 보고 그 죄를 고백할 때 기꺼이 용서해 주십니다. “만일 우리가 우리 죄를 자백하면 저는 미쁘시고 의로우사 우리 죄를 사하시며 모든 불의에서 우리를 깨끗케 하실 것이요.”(1요1:9)라고 했습니다.

사랑하는 여러분, 내가 누구며 어떤 존재인가를 알기 원하십니까? 절망적인 죄로부터 진정한 자유를 원하십니까? 참된 예배자가 되십시오. 예배를 통하여 주님과의 진정한 만남을 경험하십시오. 그래야 자신의 본래성을 발견할 수 있고, 죄로부터 자유로울 수가 있습니다.

3. 하나님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사명을 발견하게 됩니다(8).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잠겨 자신의 본래성을 보고, 죄로부터 자유롭게 된 이사야는 사명에로의 초대를 받습니다. “내가 누구를 보내며, 누가 우리를 위하여 갈꼬?”(8)하는 주님의 음성이 이사야에게 들렸습니다. 이는 사명에로의 초대도 되지만 일군이 없음에 대한 하나님의 탄식이기도 합니다. 그 때 이사야는 망설이지 않고, “주여 내가 여기 있나이다. 나를 보내소서.”하고 응답하였습니다. 하나님의 마음을 이해하고 자신을 기쁘게 드리기로 결심한 것입니다. 자신이 이제 누구를 위해 살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분명하게 발견하게 된 것입니다. 이것을 가리켜 사명의식이라고 합니다. 이 사명의식은 자신의 존재의미와 목적을 깨닫는 것과 같은 의미입니다.

지난 예배에 대한 설교에서 누누이 강조했듯이 인간은 ‘예배하는 존재’입니다.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지음을 받았고, 하나님을 예배하도록 죄에서 구원함을 받았습니다. 예배가 목적이고 사명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이 예배를 통하여 누구를 위해 살고, 무엇을 해야 할지를 발견하는 것은 당연한 일입니다. 또한 사명이란 맡겨진 일을 위해 목숨을 거는 것인데,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잠기고, 죄 용서의 은혜를 경험하지 않고는 목숨을 내놓을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사야뿐만 아니라 많은 하나님의 종들이 예배를 통해 주님을 만나고, 이 만남에서 사명을 깨달아 사역의 길을 갔습니다.

“주를 섬겨 금식할 때에 성령이 가라사대 내가 불러 시키는 일을 위하여 바나바와 사울을 따로 세우라 하시니 이에 금식하며 기도하고 두 사람에게 안수하여 보내니라.”(행13:2~3). 이 본문에서 보듯이 바나바와 사울도 예배 중에 복음의 일군으로 부름을 받았습니다. 영국의 한 시골 교회에서 아프리카 의료사업을 위한 헌신예배를 드리고 헌금을 드리는 시간이었습니다. 한 소년이 자기 앞에 헌금 쟁반이 돌아오자 그 위에 성큼 올라앉았습니다. 사람들은 놀라며 야단을 쳤습니다. 그러자 소년이 말했습니다. “저는 바칠 돈이 없습니다. 그래서 몸을 드린 것입니다.” 이 소년이 훗날 아프리카에서 처음으로 의사 겸 선교사로 활동하였던 리빙스턴입니다. 이처럼 극적이고 감동적인 헌신 이야기도 드물 것입니다. 예배를 통하여 하나님의 영광을 경험하고 용서의 확신을 경험한 사람만이 보일 수 있는 태도입니다.

예배는 하나님과의 만남입니다. 만남을 경험하지 못한 예배는 형식적인 예배, 죽은 예배입니다. 이런 예배는 이사야 선지자가 말한 대로, 성전 마당만 밟을 뿐이며 하나님께서 가증하게 여기는 것입니다(사1:12~13). 우리 모두는 하나님과의 인격적인 만남이 있는 살아있는 예배를 드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리하여 매 예배마다 하나님의 영광스러움에 잠기고, 자신의 본래성을 깨닫고 용서의 기쁨을 경험하며, 주님과 주님의 나라를 위해 목숨을 걸 수 있는 사명자의 길을 갈 수 있기를 바랍니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

Total 836 / 6 page

설교말씀 목록

게시물 검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