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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이음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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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417회 작성일 19-12-26 11:4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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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화의 이음줄

2:11-22

2019. 12/22. 11:00

분노를 사라지게 하는 아이

고든 맥도날드(G. Mcdonald) 목사의 일화다. 어느 날, 그가 강의를 끝낸 후 나이지리아 출신의 한 여자의사와 얘기를 나누게 되었다. 그런데 그 의사 이름이 특이해서 그가 물었다. ‘이름의 뜻이 뭐냐?그러자 그녀는 자신의 이름의 뜻이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Child who takes the anger away)라고고 했다. ‘왜 그런 이름을 얻게 되었느냐?고 그가 또 물었고, 그녀는 자신의 이름을 얻게 된 사연을 말해주었다. 그녀의 부모는 서로 매우 사랑했는데, 조부모가 그들의 결혼을 심하게 반대했다. 그래도 서로 너무 사랑했기 때문에 부모와 가족의 의견을 무시하고 결혼했다. 그렇지만 그들은 몇 년 동안 가족사회에서 추방되었다. 그 후, 그녀의 엄마가 그녀를 낳고 처음으로 할아버지 할머니가 그녀를 안으면서 부모와 조부모 사이에 있었던 분노가 사라졌다. 그래서 부모님이 자신에게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란 이름을 주었다고 했다. 그 얘기를 들으면서 맥도널드 목사는 그 이름이 예수님에게도 아주 적합한 이름이라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고 했다


레가토 예수님
예수님도 이 땅에 분노를 사라지게 한 아이로 오셨다. 이를 기념하는 날이 성탄절이다. 오늘은 대강절 넷째주일로, 넷째주일은 평화’(화평)의 의미다. 사람 안에 있는, 그리고 사람과 사람 사이에 있는 모든 분노를 사라지게 하려고 평화의 빛으로 오신 주님을 기념하면서 기다리는 날이다. 음악부호 중에 사람의 눈썹처럼 생긴 것이 있다. 이것을 레가토라고 부른다. 우리말로는 이음줄이라고 하는데, 이 부호가 있으면 끊지 말고 부드럽게 이어지도록 연주를 하거나 노래를 불러야 한다. 2장은 크게 두 부분으로 되어 있다. 1~10절은 우리가 얻은 구원의 성격을 말씀하고 있다. 우리가 얻은 구원은 우리의 행위가 아니라 하나님의 선물이라는 것이다. 우리 기독교 구원관의 특징을 집약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리고 오늘 본문에 해당되는 부분(11~22)은 구원받은 우리의 현재 상태를 말씀하고 있다. 구원받기 전과 비교를 하면서, 구원받기 전 우리는 이방인이었고 무할례자였고 외인이었으며, 사방으로 가로막혀 있는 존재, 하나님과 단절되어 멀리 떨어져 있는 존재, 결코 하나님과 평화를 이룰 수 없는 존재였으나 모든 막힌 것 닫힌 것 단절된 것이 다 뚫리고 열리고 연결이 되어 이제는 하나님은 물론 유대인(사람)과도 화평하게 되고 한 가족이 되었다. 그런데 이 일을 이루신 분이 예수님이시라는 것이다. 본문에서 보여 지고 있는 이와 같은 우리 주님의 이미지를 굳이 음악부호로 표기를 한다면 레가토라고 할 수 있을 것 같다.


본문이 강조하고 있는 우리 주님의 삶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를 이어주고, 유대인과 이방인 사이를 어이주고, 사람과 사람 사이를 이어주는 것이다. 즉 주님은 모든 미움과 증오를 제거하고 사랑으로 이어주는 사랑의 레가토, 모든 불편한 것과 불화를 제거하고 화평으로 이어주는 평화의 레가토, 모든 죽어가는 것과 죽은 것에 생명을 부여하는 생명의 레가토, 은혜의 레가토, 축복의 레가토시라는 것이다. 그런데 본문은 여기서 그치지 않고 구원받은 우리의 사명에 대해서도 말씀하고 있다. 은혜로 받은 구원을 강조하는 전반부(1~10)를 마치면서 은혜로 구원을 받은 것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선한 일을 위하여’(10) 라고 했다. 그리고 본문 20~22절에서 우리가 그리스도 예수 안에서 행할 선한 일을 구체적으로 제시하고 있다. 그것은 우리 역시 주님처럼 레가토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레가토가 되라!

특히 본문(20~22)은 레가토가 되는 삶의 기초와 출발(기준)을 말씀하고 있다. 우선 레가토가 되는 삶의 기초는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20)이다. 아직 신약성경이 기록되기 전이니 사도들과 선지자들의 터는 그들의 믿음과 신앙고백을 뜻한다. 하지만 지금은 신구약성경말씀이다. 하나님의 말씀이 레가토가 되는 삶의 기초다. 말씀에 기초하여 이어주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레가토가 되는 삶의 출발(기준)예수님이시다. 예수님이 건물의 모퉁잇돌’(20)이시기 때문이다. 모퉁잇돌(foundation stone, 혹은 corner stone)은 건물 토대의 모서리에 놓이는 잘 다듬어진 커다란 사각형의 돌이다. 이는 건물의 기초와 형태를 정하여 벽돌을 세우는 기준이 되고, 벽과 벽을 연결하는 역할을 한다. 말씀의 기초()로 하고 우리 주님을 기준으로 하여 서로 이어주는 삶을 살 때 주님의 몸인 교회가 은혜의 공동체, 사랑의 공동체, 생명의 공동체, 축복의 공동체, 무엇보다도 평화(화평, 화목)의 공동체로 세워지게 되는 것이다.

 

그렇다면 이어주는 삶(레가토의 삶)을 가능하게 해주는 것은 무엇일까? 그것은 양보. 소리나라에 가장 시끄러운 소리마을이 있었다. 이 마을엔 도레미파솔라시의 일곱 소리가 살고 있었는데, 이들은 서로 자신의 소리만을 주장하며 한 치의 양보도 하지 않았고, 그 결과 소리나라에서 제일 시끄러운 마을이 되었다. 이 마을 아이들은 이런 어른들의 모습이 너무 싫었다. 그래서 그들이 모여 해결책을 의논하였으나 어른들을 설득시킬 방법이 없었다. 그러던 중 도도가 어른들이 싸우지 않게 해달라고 기도하자, ‘미미가 따라서 기도를 했고, ‘솔솔도 기도했다. 그러자 놀라운 일이 일어났다. 세 아이의 소리가 하나로 어우러져 듣기 좋은 화음(和音)이 된 것이다. 다른 아이들도 함께 어우러져 소리를 내보았고, 이 소리들은 멋진 화음이 되어 너무도 듣기 좋은 합창이 되었다. 아이들의 이 멋진 소리를 듣고, 늘 자신의 소리만 주장하던 어른들은 반성하게 되었고, 서로 조금씩 자신의 소리를 양보하여 멋진 화음을 만들었다. 그래서 소리나라에서 가장 아름다운 소리를 내는 마을이 되었다.

 

합창이나 중창에서 화음의 비결은 소리의 양보에 있다. 사람마다 혹은 악기 하나하나가 제 멋대로 자기만의 소리를 내면 소음이지만 함께 어울려 소리를 내면 화음이 된다. 아름다운 음악이 되고 예술이 된다. 그러기 위해선 자기 소리만 높이지 않고 다른 사람의 소리를 들으며 자신의 소리를 양보할 수 있어야 한다. 양보를 영어로 ‘concede’라고 한다. 이 단어는 함께’(con)라는 말과 가다’(cedere)라는 말의 합성어다. 즉 양보는 함께 가다는 뜻이다. 가령 어른과 아이가 길을 가고 있다면 아무래도 어른은 보폭이 넓고 힘이 좋아서 아이보다 훨씬 빨리 갈 수 있다. 이런 경우 어른이 아이의 속도에 맞춰준다. 함께 가기 위해서다. 이것이 양보다. 바로 이 양보가 평화의 레가토가 되는 삶을 가능하게 해준다.

 

권리포기와 희생

사람 사이의 화목도 마찬가지다. 자신의 불이익을 감수하며 양보할 때, 스스로 권리를 포기하고 양보할 때 화목하게 된다. 그래서 양보에는 반드시 두 가지가 전제되어야 한다. 하나는 권리포기이고, 다른 하나는 희생이다. 권리만 주장하고 어떤 희생도 감수하지 않으면 양보도 없다. 또한 양보가 없는 곳엔 긴장만 있을 뿐 평화도 화평도 화목도 기대할 수 없다. 지금 북미관계가 갑작스럽게 긴장관계로 치닫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다. 권리포기나 희생없이 서로 상대방에게 양보만 요구하기 때문이다. 양보는 스스로 내어놓은 것이지 요구나 강요사항이 아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평화의 레가토가 되기 위해선 기꺼이 희생을 감수하며 양보해야 한다. 이는 우리 주님께서 평화의 레가토가 되기 위해 어떻게 하셨는지를 보면 금방 알 수 있다. “그는 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 오히려 자기를 비워 종의 형체를 가지사......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하셨으니.....”(2:6~6). 주님은 하나님과 우리 사이 평화의 레가토가 되기 위해 말 그대로 권리포기(‘근본 하나님의 본체시나 하나님과 동등 됨을 취할 것으로 여기지 아니하시고’)와 철저한 희생(‘오히려 자기를 비워’, ‘자기를 낮추시고 죽기까지 복종’)을 하셨다.

 

이삭은 구약성경에 나온 대표적인 평화의 레가토였다. 이삭은 블레셋 사람들이 찾아와서 애써 파놓은 우물을 메우며 행패를 부릴 따마다 그곳을 그들에게 양보하고 다른 곳으로 장소를 옮겨가 그곳에서 또 우물을 팠다. 맞서 싸우지 않고 포기하고 희생하며 양보했다. 그러기를 몇 번이나 반복했다. 그래서 다툼을 피할 수가 있었다. 더 나아가 그들과 평화의 조약을 맺어 화평을 이루게 되었다(26). 권리를 포기하고 희생을 감수하면서 양보한 결과다. 우리는 말씀에 기초하고 주님을 기준으로 한 평화의 공동체를 세워야 할 사명의 사람이다. 무엇보다도 가정과 교회가 우리를 통해 평화의 공동체로 세워져야 한다. 그러기 위해선 권리포기와 희생을 통한 양보의 삶으로 평화의 레가토(이음줄)가 되어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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