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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아름다움(07-06-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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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6,955회 작성일 07-06-25 11:5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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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불어 사는 아름다움
전4:9-12

제레미 리프킨(Jeremy Rifkin)은 「소유의 종말」(원제는 「접속의 시대」‘The Age of Access'임.)이란 책에서 앞으로 소유의 시대가 지나고 접속의 시대가 올 것이라 말하고 있습니다.

접속의 시대는 제품판매보다는 지적재산권이 중요하고, 많은 제품을 판매하는 것보다 한 고객과의 지속적인 관계를 더 중요하게 생각합니다. 소유가 과거 산업사회의 특징이라면 접속은 정보화 사회의 특징입니다. 과거 산업사회에서 기업들은 물적 자산(소유)에 집착했지만 이제 정보화 사회에서 기업들은 브랜드 이미지, 지적 자산 등과 같은 무형의 소유에 관심을 가집니다. 상품의 거래도 상품을 팔고 무료 후속서비스를 제공하는 데에 주안점을 두던 산업의 시대와는 반대로 이뤄집니다. 상품이 오히려 무료로 제공되고 후속서비스가 수익을 냅니다. 요즘 우리 생활에서 흔히 경험하고 있는 정수기나 복사기 등 렌탈(rental) 서비스가 바로 그것입니다. 요즘 미국의 경우 차동차도 1/3가량이 임대해서 사용한다고 합니다. 이와 같은 접속시대가 강조한 것은 ‘관계’입니다. 얼마나 사람들과 좋은 관계망을 가지고 있느냐가 성공적인 삶의 비결이 되는 것입니다. 예를 들어 소유시대에는 부도가 나면 거의 재기할 수가 없었습니다. 하지만 접속시대에는 관계만 좋으면 얼마든 재기할 수가 있습니다. 그러므로 접속시대의 생명은 관계이고, 아무리 소유가 많아도 관계가 없는 사람은 왕따입니다.

오늘 본문은 관계의 중요성에 대한 말씀입니다. 그래서 “두 사람이 한 사람보다 낫다.”고 말씀합니다. 물론 한 사람이 두 사람보다 나은 때도 있습니다. 그것은 서로 협력이 안 되고 갈등, 다툼이 있을 때입니다. 이런 때는 갈라서는 것이 서로에게 유익합니다. 그러나 협력이 전제되어 있는 한, 두 사람은 분명 한 사람보다 낫습니다. 본문은 두 사람이 함께 수고할 때 좋은 상, 즉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이 주는 유익을 말씀하고 있습니다. 그러면서 세 가지 경우를 예로 드는데, 저는 이 시간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이 주는 유익 이 세 가지에 대하여 생각해 보고자 합니다.

1. 넘어지지 않고 일어날 수 있습니다(재기의 삶).
사람은 연약한 존재입니다. 그래서 자주 넘어집니다. 그때 곁에서 붙잡아주고, 넘어질 때 일으켜주는 사람이 있다면, 그는 재기하기 쉽습니다. 한자에서 사람을 의미하는 사람 인(人)자는 서로 버팀목이 되어 세워주는 존재가 사람임을 나타냅니다(10).

미국 샌프란시스코에 있는 유명한 다리 금문교는 두 줄로 2.8km의 다리를 지탱하고 있습니다. 그 줄은 1m의 두께인데, 그 안에는 2,700개의 철선이 들어있다고 합니다. 그 철선들이 한데 묶여져 시속 160km의 강풍도 감당한다는 것입니다. 프랑스의 자케 감독은 월드컵에 9번 진출했으나 한 번도 결승에 진출하지 못했던 프랑스를 우승(98년도 월드컵)으로 이끈 사람입니다. 자케는 프랑스 팀의 감독이 되면서 당시 최고 스타 칸토나를 제외시키고 철저히 팀플레이를 추구했습니다. 이로 인해 언론으로부터 많은 비난을 받았지만, 그는 자신의 소식을 굽히지 않습니다. 그리고 몇 명의 스타 플레이에 의존하는 브라질을 결승에서 3:0으로 이겨 월드컵 우승을 일궈냈습니다. 이때 두 골을 넣어 새로운 스타가 된 사람이 지네 지단입니다. 혼자서는 안되는 것도, 함께 하면 됩니다. 접속의 시대에는 더욱 그렇습니다. 서로 세워주는 협력이 있어야 넘어지지 않고 넘어져도 일어날 수 있는 것입니다.

우리 동양에서 라이벌의 대명사는 초나라 항우(項羽)와 한나라 유방입니다. 이들의 라이벌 관계가 장기 게임으로 변해서 오늘날까지 계속되고 있습니다. 이 두 사람의 개인적인 면을 비교하면 모든 면에서 항우가 탁월합니다. 그런데 천하를 통일한 사람은 항우가 아니라 유방이었습니다. 그 차이는 항우가 항상 혼자였다면, 유방은 장량이나 한신과 같은 훌륭한 참모들을 주변에 많이 두고 있었다는 점입니다. 결국 더불어 함께함의 차이입니다. 성경에도 이 항우를 능가하는 사람이 나옵니다. 그런데 그도 항우와 비슷한 길을 걸었습니다. 삼손이라는 사람(삿14:~16:)입니다. 그는 맨손으로 사자를 죽이고, 600여 마리의 여우를 붙잡았습니다. 나귀턱뼈로 천 여 명의 적을 죽인 굉장한 사람입니다. 그런데 그 역시 주변 사람들과 협력하지 않고 항상 혼자였습니다. 이것이 그가 탁월한 능력을 지니고도 실패한 인생을 살게 된 원인입니다.

더불어 사는 것이 넘어지지 않고 사는 비결입니다. 설령 넘어지더라도 다시 일어설 수 있는 비결입니다. 루터가 ‘교회는 피를 먹고 자란다.’고 했는데, 이는 교회의 역사가 피의 역사, 순교의 역사였음을 의미합니다. 실제로 교회의 역사는 순교의 역사입니다. 이렇게 핍박이 없는 평화로운 시기는 교회의 역사 중에 그리 길지 않습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회가 이 역사상에서 사라지지 않고, 오히려 더욱 왕성하게 부흥한 것은 더불어 사는 삶에 있습니다. 어렵고 힘들어도 교회는 부지런히 모였고, 함께 모여서 하나님을 예배하고 신자 간에 더욱 뜨겁게 사랑하며 돕고 격려하였습니다. 흩어지지 않고 똘똘 뭉쳐 한 덩어리가 되었습니다. 핍박을 받아도 함께 받고, 고난을 당해도 함께 당했습니다. 이것이 그 숱한 어려움 속에서도 넘어지지 않고 굳게 서게 된 비결입니다. 우리 모두 넘어지지 않도록, 다시 일어나 서도록 서로 붙잡아주고 세워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2. 춥지 않고 따뜻하게 됩니다(사랑의 삶).
성자 썬다 싱은 추운 날, 눈 덮인 산길을 가다가 추위에 쓰러진 사람을 업고 가는 바람에 땀이 나 살았다고 합니다. 그러나 혼자 살겠다고 간 친구는 얼어 죽고 말았습니다. 도와야 할 때 돕지 않고, 협력해야 할 때 협력하지 않으면 다른 사람의 불행이 나의 불행이 될 수 있고, 다른 사람의 슬픔이 나의 슬픔이 될 수가 있습니다. 하지만 서로 돕고 협력하는 것은 마음속에 있는 생명의 불씨, 사랑의 불씨에 불을 지피는 것과 같습니다. 그래서 서로 협력할 때 우리의 마음과 삶이 따뜻하게 되고, 주변까지도 따뜻하게 만드는 것입니다(11).

C.S.루이스는 「악마의 편지」에서, 악마가 자기 조카를 훈련시키는 내용을 이렇게 표현하고 있습니다. “더 나쁜 인간을 만들려고 애쓸 필요 없다. 내게 필요한 인간은 남에게 관심 없는 자다. 그로 하여금 ‘나는 빼달라.’고 주장하게만 만들어라. 그럼 우리 일은 성공이다.”

종종 공동체에서 ‘못한다, 빼달라.’ 하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이는 사람들에게 진을 빠지게 하는 말로, 마귀가 참 좋아하고 우리에게서 꼭 듣고 싶어 하는 말입니다. 우린 이런 사람, 형제/자매의 진을 빼고 마귀가 좋아하는 사람이 되지 말아야 합니다. 이런 사소한 말들이 사람들을 힘들게 하고 낙심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여 관계를 얼어붙게 만듭니다. 구체적인 어떤 나쁜 행위만 죄가 아닙니다. 상대방으로 낙심하게 하고 근심하게 하는 것도 죄입니다. 반면에 ‘하겠다. 해보자. 열심히 돕겠다.’고 하는 말은 서로에게 힘이 되고 격려가 됩니다. 도전의식뿐만 아니라 서로의 마음을 따뜻하게 해주고 나아가서 공동체를 하나 되게 합니다. 그래서 성경은,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고 말씀합니다. 서로를 부지런히 격려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도 끝 날이 가까울수록 더욱 그리하라고 말씀합니다. 말세가 되면 사람들마다 사랑이 식어지기 때문입니다. 격려(encouragement)는 용기를 불어넣는 것(in+courage)이고, 낙심(discouragement)은 용기를 제거하는 것(dis+courage)입니다. 서로의 관심과 칭찬과 격려는 따뜻한 공동체를 만들지만, 무관심과 비판 깎아내림은 불행한 공동체를 만듭니다.

우리 모두 상대방을 따뜻하게 해주는, 서로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는 사람이 됩시다. 서로 협력할 때, 서로 힘을 모아 도울 때, 가정이나 교회 사회가 위로와 격려와 따스함이 있는 공동체가 되는 것입니다. 그동안 나눔 이웃을 위한 예산을 세워놓고도 잡행하지 못함이 늘 마음에 짐이 되었습니다. 그런데 대상을 확정하게 되어 얼마나 기쁜지 모르겠습니다. 기관 한 곳과 네 명의 어려운 이웃들을 돕기로 했습니다. 사소한 작은 일이지만 주변을 따뜻하게 밝히는 불씨가 되리라 믿습니다.

3. 패배자가 아니라 승리자가 됩니다(승리의 삶).
징기스칸은 여섯 아들에게 젓가락을 하나씩 주며 부러뜨리라고 하자, 모두들 쉽게 부러뜨렸습니다. 이번에는 6개를 주며 부러뜨리라고 했고, 아무도 그것을 부러뜨리지 못했습니다. 그러자 아들들에게 이렇게 말했습니다. ‘바로 그것이다. 너희 하나하나는 약하지만 함께 힘을 합치면 큰 힘이 되고, 누구도 너희를 당치 못할 것이다.’ 1+1=2는 수학입니다. 협력은 1+1=3, 혹은 4, 그 이상을 만들어냅니다. 개미들이 비스킷을 옮기는 것을 본적이 있습니다. 자기 몸의 수 백 배가 되는 비스킷을 함께 협력해서 나르는 것이었습니다. 이것이 협력의 법칙입니다. 그리고 홍수가 나면 개미들은 수천 마리가 한 뭉치가 되어 떠내려가다가 안전지대에 이르면 그곳에서 번식합니다. 미물이지만 협력으로 불가능한 상황을 가능하게 하고, 어려움도 극복하는 것을 알 수가 있습니다.

협력할 때 협(協)이란 한자어는 여러 힘을 더하는 표시이고, 기독교적으로는 십자가를 중심으로 힘을 모은다는 의미입니다. 협력하면 승리합니다(출17:). 로마서 16장에 많은 사람들의 이름이 나옵니다. 그들은 모두 바울의 협력자들이었습니다. 바울이 복음사역에 큰 성과를 거둘 수 있었던 것도 신실한 협력자들 때문입니다. 누구라도 혼자는 패배합니다. 하지만 협력하면 무엇이든 성공할 수 있습니다(12).

지금 우리에게는 무엇보다 협력이 필요합니다. 기도의 협력, 전도의 협력, 봉사의 협력이 필요합니다. 우리 교회가 지금보다 더 나은 방향으로 부흥하여 성장하는 비결은 협력 여부에 달려 있습니다.

‘당나귀와 말’이란 동화가 있습니다. 짐을 지고 가던 당나귀가 힘이 들어 말에게 짐을 덜어줄 것을 요구했으나, 말이 거절합니다. 결국 당나귀가 쓰러져 죽자, 주인이 당나귀의 짐까지 말에게 지웠습니다. 그러자 말이, ‘이럴 줄 알았으면......’ 하고 후회합니다. 그러나 기회는 지나가버렸습니다. 우리가 서로 협력하면 서로를 세워주고, 따뜻하게 하고, 승리할 수 있습니다. 가정, 교회, 모든 공동체에서 협력자가 되길 주님의 이름으로 축원합니다. ‘두 사람’이란 인디언의 축혼시(祝婚詩)의 일부입니다.

   이제 두 사람은 비를 맞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지붕이 되어 줄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춥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따뜻함이 될 테니까.
   이제 두 사람은 더 이상 외롭지 않으리라.
   서로가 서로에게 동행이 될테니까.
   .............................................................
우리 모두 더불어 사는 아름다움을 통해 이와 같은 삶, 가정, 교회를 만들어 갑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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