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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 ‘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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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0,015회 작성일 21-05-04 07: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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열어주소서! ‘

13:30~33

2021. 5/2. 11:00

보는 것의 중요성

일체유심조(一切唯心造)라는 말이 있다. ‘마음이 모든 것을 지어낸다.는 뜻으로, 불교용어다. 인간의 모든 번뇌를 뜻하는 오욕칠정(五慾七情)이 바로 여기서 나온다고 생각하고, 그들은 이 번뇌를 없애기 위해 마음공부를 강조한다. 그리고 이 마음을 잘 다스리기 위해 보는 것()이 중요하다고 말한다. 견물생심(見物生心)이라 그렇다. 곧 보는데서 마음이 생기기 때문이다.


맞는 말이다. 보는 것이 중요하다.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느냐는 매우 중요하다. 마음이 그렇게 생기기 때문이다. 두 명의 죄수가 있었다. 그들은 틈만 나면 감방의 창살을 통해 밖을 보았다. 한 사람은 여러 편의 시를 써서 시집을 발간까지 한 시인이 되어 감옥을 나왔고, 다른 한 사람은 정신병이 생겨 정신병원으로 옮겨졌다. 두 사람의 삶을 이렇게 갈라놓은 것은 다름 아닌 보는 것 때문이었다. 시인이 된 죄수는 창살너머로 빛나는 하늘을 보고, 공중을 날아다는 새들을 보고, 세찬 바람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를 보고, 저녁에는 쏟아질 것은 별을 바라보았다. 그래서 그는 하늘을 노래하고, 새를 노래하고, 바람을 노래하고, 별을 노래하는 시인이 되었다. 반면에 정신병에 걸린 죄수는 감옥 담장 밑의 진흙탕만 밤낮으로 바라보았다. 그러면서 진흙탕 같은 세상, 진흙탕 같은 자기 인생을 한탄하고 탄식했다. 그러니 그의 정신이 온전할 수 없었던 것이다. 보는 것이 생각에 마음에 영향을 미친 것이다. 그래서 눈 관리가 중요하다. 여러분은 지금 무엇을 보고, 어디를 보고 있는가? 우리의 눈이 무엇에 많이 노출이 되어 있는지를 진지하게 살펴야한다.

 

보는 눈도 훈련이 필요하다.

그러나 더 중요한 것은 어떻게 보느냐. 우리의 눈은 보이는 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다. 보고 싶은 대로 본다. 좋아하는 것, 사랑하는 것, 관심이 있는 것만 늘 보려고 하고, 집중해서 보려고 한다. 정치권에서 같은 문제를 두고 여당과 야당 간에 전혀 다른 평가를 하는 것을 자주 본다. 서로 다르게 보기 때문이다. 다르게 본다는 것은 다른 시각(관점)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프레임(Frame)이란 말을 들었을 것이다. ‘’, ‘액자이런 뜻인데, 어떤 사물이나 사건을 바라보는 시각을 두고 하는 말이다. 예를 들어, 정사각형 틀을 통해 세상을 보면 모두가 정사각형으로 보이고, 직사각형의 틀을 가지고 보면 직사각형으로 보인다. /야 정치인이 가지고 있는 틀이 다르니까 같은 문제를 다르게 보고, 다르게 평가한 것이다. 그러니 우리 눈이 보이는 대로만 보는 것이 아니라 자신이 가지고 있는 틀대로 보는 것이다. 한 마디로 자기가 보고 싶은 대로 본 것이다. 그래서 제 눈의 안경이라고 한다. 아무리 봐도 어울리지 않는데 좋아 어쩔 줄 몰라 하는 사람이 있다. 제 눈의 안경이라 그렇다. 그런 틀을 가지고 있기 때문이다. 보이는 대로 보는 것도 문제가 될 수 있지만 자신의 틀을 가지고 보고 싶은 대로 보는 것도 문제다. 그러므로 좋은 것을 보고, 아름다운 것을 보고, 유익한 것을 보고, 경건한 것을 볼 수 있어야 한다. 또한 올바르게 볼 수 있도록, 아름답게 볼 수 있도록, 좋게 볼 수 있도록, 경건하게 볼 수 있도록 우리의 눈을 훈련시키는 것이 중요하다. 이런 틀을 가져야 한다.

 

이기리라’ Vs ‘못하리라

본문은 이스라엘이 이집트를 나온 지 1년 만에 도착했던, 가나안의 문턱 가데스 바네아에서 일어난 일이다. 모세는 다소 상기된 목소리로 백성을 향해 외쳤다. ‘너희 하나님 여호와께서 이 땅을 너희 앞에 두셨은즉 너희 조상의 하나님 여호와께서 너희에게 이르신 대로 올라가서 차지하라. 두려워하지 말라. 주저하지 말라.’(1:21). 그러나 백성의 반응은 싸늘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먼저 그 땅을 살펴보고 올라가야 하지 않냐고 했다. 이에 모세는 마음이 몹시 상했다.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이니, 약속의 말씀을 믿고 올라가서 취하기만 하면 될 일인데, 알아보고 올라가겠다는 것은 하나님께 대한 불신이고 불순종이었기 때문이다. 하지만 하나님은 모세에게 그들의 요구대로 하라고 하셨다. 그래서 모세는 각 지파별로 대표를 한 명씩 12명을 뽑아 40일 동안 가나안 땅을 알아보고 오라고 했다. 본문은 이 12명의 대표가 땅을 알아보고 와서 백성에게 보고한 내용의 결론이다.


12명의 대표는 40일 동안 가나안 땅과 그 땅 주민을 같이 알아보고 왔다. 그리고 그 증거물도 가지고 왔다. 그런데 그 땅에 대한 평가와 결론은 둘로 완전히 갈렸다. 여호수아와 갈렙은 우리가 곧 올라가서 그 땅을 취하자. 능히 이기리라.’(30)고 했고, 이 둘을 제외한 10명은 우리는 능히 올라가서 그 백성을 치지 못하리라. 그들은 우리보다 강하니라.’(31)고 했다. 그러면서 그들은 하나님께서 약속하신 땅을 악평했다. 그 땅은 거주민을 삼키는 땅이고, 그곳에 거주하는 사람들은 모두가 신장이 크고, 심지어 거인족도 있고, 그들에 비하면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보였다는 것이다. 아마 그들이 보기에도 그랬을 것이라고 했다(32,33). 여기서 우리는 두 가지 생각이 충돌하고 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다. ‘능히 이기리라.’(30)능히 치지 못하리라.’(31). 같은 기간에 같은 땅과 같은 사람을 보고 왔는데, 여호수아와 갈렙은 이기리라.고 했고, 나머지는 못하리라.고 했다. 어떻게 이와 같은 전혀 다른 결과를 내놓을 수 있는 것일까? 바로 시각 차이에서 비롯된 것이다. 상황을 어떻게 보았느냐의 차이다. , 어떤 틀(Frame)을 가지고 보았느냐의 차이다.

 

현상과 배후

능히 치지 못하리라.고 부정적인 평가를 내놓은 10명은 눈에 보이대로만 봤기 때문이다. 그들의 말대로 그 땅은 거민을 삼키는 땅이었다. 그곳이 그 지역에서 유일하게 비옥한 곳이었고, 때문에 주변의 모든 민족이 항상 넘보는 땅이었다. 그래서 전쟁이 그치지 않았다. 거민을 삼키는 땅이란 전쟁이 그치지 않는 땅이란 뜻이다. 그곳을 점령하여 사는 사람은 힘이 있는 사람일 수밖에 없다. 강자만이 차지할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런 그들을 430년 동안 노예살이하다 탈출한 자신들을 통하여 본 것이다. 그러다보니 하나님과 하나님의 약속은 보이지도 않고, 그저 현실과 문제만 넘을 수 없는 벽처럼 크게 보이고, 자신들은 메뚜기처럼 초라하게 보였던 것이다. 그래서 능히 치지 못하리라.는 비관적인 결론에 도달한 것이다.

 

그렇지만 여호수아와 갈렙은 달랐다. 우리가 두루 다니며 정탐한 땅은 심히 아름다운 땅이라. 여호와께서 우리를 기뻐하시면 우리를 그 땅으로 인도하여 들이시고 그 땅을 우리에게 주시리라. 이는 과연 젖과 꿀이 흐르는 땅이니라...그 땅 백성을 두려워하지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라. 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하시느니라.’(14:7~9). 여호수아와 갈렙은 눈에 보이는 대로 보지 않고, 그 너머를 보았다. 눈에 보이는 현상이 아니라 보이지 않는 배후를 주목한 것이다. 물론 가나안 주민이 장대하고 강했다. 이는 부인할 수 없는 사실이다. 그들이 거주하는 곳도 이집트에서는 볼 수 없었던 난공불락의 요새였다. 하지만 그들에겐 보호자가 없었다(‘그들의 보호자는 그들에게서 떠났고’). 겉은 우람하고 강해 보이는데 속이 텅 빈 고목나무와 같은 존재였다. 반면 자기 민족은 그들과 비교하여 메뚜기 같지만 강력한 보호자가 계시다는 것이다(‘여호와는 우리와 함께 계시느니라.’). 여호수아와 갈렙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점이다. 우리가 세상을 살면서 주목해야 할 것도 바로 이점이다. 그래야 무력한 우리가 힘을 얻고, 무지한 우리가 지혜를 얻고, 무능한 우리가 능력을 얻고, 무익한 우리가 유익하고 쓸모 있는 사람이 될 수 있기 때문이다.

 

보호자 여호와 하나님이 누구신가? 사실 이 사실이 신앙생활에서 가장 중요하다. 신앙의 대상이신 하나님에 대한 올바른 이해와 믿음에 우리 신앙이 세워지기 때문이다. 우리의 신앙은 근거 없는 자기 확신에 기초한 것이 아니라 분명한 사실과 그 사실에 대한 생생한 경험에 기초하기 때문이다. 이런 의미에서 이스라엘 백성은 이 하나님을 이미 경험을 했고, 지금도 경험하고 있다. 보호자이신 여호와 하나님은 초강대국 이집트의 파라오를 굴복시키신 분, 홍해바다를 육지처럼 건너게 하신 분, 지난 1, 광야를 건너는 동안에 바위를 깨뜨려 마실 물을 제공하시고, 만나를 내려주시고, 무서운 적 아말렉을 물리치고 승리하게 하신 분, 지금도 여전히 낮에는 구름기둥 밤에는 불기둥으로 함께 하시는 분이시다. 이 하나님이 보호자로 그들과 함께 하고 계신다. 여호수아와 갈렙이 주목한 것은 바로 이 하나님이셨다. 그리고 하나님을 통하여 가나안 주민(현상)을 바라본 것이다. 때문에 그들은 능히 이기리라.는 결론을 내렸고, ‘가나안 거주민을 두려워 말라. 그들은 우리의 먹이니라.고 외쳤던 것이다. 10명의 정탐꾼처럼 문제만 보고, 무기력한 자신을 통해 그 문제를 보면 절망하고 낙심할 수밖에 없다. 그러나 여호수아와 갈렙처럼 문제의 배후를 보고, 그 배후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을 보면 용기와 소망을 갖게 된다. 문제를 넘어 승리의 확신을 품게 된다. 그리고 앞에서 말한 대로 무력하고, 무지하고, 무능하고, 무익한 우리가 힘을 얻고 지혜를 얻고 능력을 얻어 유익하고 쓸모있는 사람이 될 수가 있다.

 

복이 있는 눈

신앙생활은 바꾸는 훈련이다. 현상만 보고, 문제만 보고, 보이는 대로만 보는 눈을 현상과 문제의 배후를 보고, 그곳에서 역사하시는 하나님의 손길을 보도록 하는 훈련이다. 이것을 다른 말로 믿음의 눈이다. 믿음의 눈을 열리도록 하는 것이다. , 하나님을 믿는 믿음의 눈으로 현실도 보고, 문제도 보고, 사건도 보고, 사람도 보는 것이다. 내 자신도 믿음의 눈으로 보아야 한다. 그래야 영적 메뚜기 의식을 벗어날 수 있다. 아무튼 눈의 가치는 보는 것이다. 무엇을 보는가에 따라서 눈의 가치가 달라진다. 보는 것이 지식이 되고, 보는 것이 인격이 되고, 보는 것이 삶에 중요한 영향을 준다. 영적 성장도 마찬가지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도 너희 눈은 봄으로서 복이 있다고 하셨다. 주님을 보는 눈, 주님의 눈으로 보는 눈이 복 있는 눈이다. 주님의 눈으로 자신도, 세상도, 문제도, 사건도, 사람도 바라보는 믿음의 눈이 활짝 열리는 복이 있기를 바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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