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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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549회 작성일 21-06-14 12:09본문
열어주소서! ‘눈Ⅶ’
눅24:29~35
2021. 6/13. 11:00
헨델의 메시야와 가장 오래된 성경사본
어느 날, 헨델이 가발을 잃어버렸다. 한참 동안 난처해하고 있는데, 한 아름다운 아가씨가 가발을 찾아주었다. 그녀는 근처 미용실에서 일하고 있었다. 그 후, 헨델은 고마운 마음에 그녀를 자주 찾아가게 되었고, 그러다 보니 어느덧 그녀와 사랑하는 사이가 되었다. 헨델은 사랑하는 여인에게 자신의 오라토리오 ‘메시야’의 친필악보를 선물로 주었다. 그녀와 결혼할 생각을 가지고 있었던 것이다. 어느 날 헨델은 그 미용실에 들렀고, 아가씨는 헨델이 온 줄 몰랐다. 이발을 하러 온 한 손님의 머리를 만지고 있던 그녀는 무심코 다른 미용사에게 ‘머리를 말게 악보 몇 장만 갖다 주세요.’ 라고 말하는 것이었다. 이 말을 들은 헨델은 충격을 받았다. 조용히 미용실을 나왔고, 그 후로 다시는 그녀를 만나지 않았다.
이와 비슷한 이야기가 또 있다. 이집트 시나이 반도에 모세가 십계명을 받은 산으로 알려진 시내산이 있다. 그 시내산 중턱(해발 1,500m)에 잿빛의 성 캐서린 수도원이 자리하고 있다. 성서학을 전공한 사람이라면 누구나 한 번쯤 가보고 싶어하는 곳이다. 여기서 가장 오래된 구약성서 대부분과 신약성서가 기록된 성경사본이 발견된 곳이기 때문이다. 1844년 독일 문헌학자 콘스탄틴 폰 티센도르프가 이곳을 방문했는데, 대강당에서 낡은 양피지가 담긴 바구니를 발견했다. 도서관 사서에게 무엇에 쓰려고 둔 것이냐고 물었더니 수도사들이 불쏘시게 사용하는 것이라고 했다. 살펴보니 아주 오래된 글씨체로 기록된 헬라어 구약성경이었다. 그 후 그곳에서 신약성경이 기록된 사본도 발견이 되어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고 있는 신약성경이 탄생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아무리 귀한 것도 그 가치를 깨닫지 못한 사람에겐 머리 마는 종이에 불과하고, 불을 피우는 불쏘시개에 지나지 않는 것이다. 가치에 눈이 열려야 가치를 알게 되고, 또한 소중히 여기게 된다. 훗날 티센도르프의 일기장에서 이런 내용이 발견되었다. ‘당시 나는 잠을 자는 것은 신성모독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흥분과 경외하는 마음으로 잠을 자지 못하고 말씀에 집중하였다는 것이다. 말씀을 대하는 그의 태도를 잘 보여주는 대목이다.
들어도 깨닫지 못하고, 보고 알지 못한다.
이것이 하나님의 말씀인 성경에 대한 올바르고 아름다운 태도라 생각한다. 그런데 우리의 현실은 그렇지 못한 것 같다. 성경은 영원한 베스트셀러라는 영예를 가지고 있으면서 동시에 가장 읽히지 않는 책 중에 하나라는 불명예도 가지고 있다. 가지고 있는 사람은 많지만 열심히 읽고 묵상하면서 그대로 살아보려고 애쓰는 사람이 많지 않다는 뜻이다. 실제로 현대 신앙인의 특징이 성경에 대해 무지하다. 성경을 접할 수 있는 기회는 많아도 성경에 대해 아는 것이 별로 없다는 것이다. 성경을 읽지 않고, 듣지 않고, 공부하지 않고, 묵상하지 않으니까 그렇다. 그렇다면 왜 하나님의 말씀이라고 하면서 이토록 성경을 외면한 것일까? 그것도 성경을 믿고 따른다는 사람들이 말이다. 헨델의 미용사 연인처럼, 캐서린 수도원 수도사들처럼 가지고는 있지만 그 가치를 모르기 때문이다. 말씀의 가치에 눈이 열리지 않아 그렇다.
물론 이렇게 말한 사람도 있다. 성경을 읽어보려고 하는데, 도무지 무슨 말인지 모르겠다는 것이다. 읽으면 잠만 쏟아진고 한다. 그래서 성경을 수면유도제처럼 사용하는 사람도 있다. 이 또한 마찬가지다. 말씀에 눈이 열리지 않아 그렇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보아도 본 것이 아니고, 들어도 듣는 것이 아니다. 본문에 이런 사람들이 나온다. 3년 동안이나 예수님을 따랐던 사람들인데, 주님께서 비참하고 허망하게 돌아가시자 주님 따르미의 생활을 접고 다시 고향으로 돌아가고 있었다. 그들은 주님께서 돌아가신 이야기와 함께 주님의 빈무덤을 보았다는 여인들의 이야기를 나누며 슬픈 마음으로 길을 걷고 있었다. 그때 한 나그네가 다가와서 그들과 합류했다. 이 나그네는 다름 아닌 ‘부활’하신 예수님이셨다. 낙심하여 옛 생활로 다시 돌아가는 그들을 회복시키기 위해 찾아오신 것이다. 그렇지만 그들은 주님을 전혀 알아보지 못했다. 주님은 그들에게 모세와 모든 선지자의 글로 시작하여 성경에 기록된 주님에 관한 모든 이야기를 자세히 설명해 주었다. 그래도 그들은 주님께서 하신 말씀을 깨닫지도 못하고 주님을 알아보지도 못했다. 저녁이 되어, 주님께서 식사에 대한 축복기도를 드리고 떡을 떼어줄 때 비로소 그들의 눈이 열려 주님을 알아보게 되었고, 길에서 가르쳐주신 말씀도 깨달아졌다. 그래서 그들은 다시 예루살렘으로 돌아가 이 사실을 다른 제자들에게 알렸다. 눈이 열리지 않으면 함께 있어도, 함께 걸어도 알아보지 못하고, 말씀을 들어도 깨닫지 못한다.
말씀에 눈이 열린 사람들
반면에 성경을 보면 말씀에 눈이 열린 사람들이 나온다. 대표적인 사람이 다윗이다. 그리고 다윗과 함께 말씀에 대한 눈이 가장 크게 열린 사람은 시119편의 저자인 것 같다. 그래서 어떤 사람들은 시119편의 저자를 다윗이라고 말하기도 한다. 그는 ‘눈을 열어서 주의 법의 기이한 것을 보게’ 해달라고 기도했다. 말씀에 대한 눈이 열려야 말씀의 가치, 말씀의 능력, 말씀의 은혜, 말씀의 지혜를 깨달을 수 있다는 것을 알았기 때문이다. 그는 말씀이 발의 등이고, 길의 빛이라고 고백했다. 말씀이 그의 즐거움이고, 고난 중에 위로고, 소망이고, 노래이고, 소유(분깃)라고 했다. 그래서 그는 말씀을 천천금은보다 좋아했고, 말씀을 향하여 손을 들고 작은 소리로 읊조렸고, 말씀을 사랑하여 종일 작은 소리로 읊조렸다. 밤중에 일어나 말씀을 기억하였고, 마음이 상하도록 말씀을 사모했다. 이 모든 고백은 말씀의 가치에 눈이 열린 사람만이 할 수 있는 내용이다. 다윗도 말씀에 대한 놀라운 고백을 했다. ‘여호와의 율법은 완전하여 영혼을 소생시키며, 여호와의 증거는 확실하여 우둔한 자를 지혜롭게 하며, 여호와의 교훈은 정직하여 마음을 기쁘게 하고, 여호와의 계명은 순결하여 눈을 밝게 하시도다. 여호와를 경외하는 도는 정결하여 영원까지 이르고, 여호와의 법도 진실하여 다 의로우니, 금 곧 순금보다 더 사모할 것이며 꿀과 송이꿀보다 더 달도다.’(시19:7~10).
신약성경에서 바울도 복음의 말씀에 눈이 열리기 전에는 예수님을 이단자로, 예수님의 삶과 사역을 가르치는 복음을 이단사설로, 믿고 따르는 성도와 교회를 이단을 퍼트리는 악성 바이러스 정도로 생각하고 이들을 제거하는 것을 사명으로 여겼던 사람이다. 그러나 다메섹으로 가는 길에서 주님을 만나 그의 눈이 열린 다음에는 예수님을 믿음의 대상으로 삶의 주인으로 모시고, 그의 복음을 영혼을 살리는 생명의 말씀으로 믿고, 이 복음을 전하기 위해 자기의 목숨을 걸었다. 이런 비슷한 사례는 수도 없이 많다. 교회사에서 성 어거스틴이 그랬고, 아시시의 성자 성 프랜시스가 그랬다. 가깝게는 이 자리에 있는 여러분이나 저도 이런 사람 중에 하나다. 복음의 말씀에 눈이 열려 여기까지 왔고, 지금도 따르고 있고, 원하기는 더 많이 더 크게 열리기를 바란 것이다.
말씀에 눈이 열리려면
아무튼 복 있는 삶을 결정짓는 것, 복이 따라다니는 삶을 결정짓는 것은 말씀에 대한 우리의 ‘태도’다. 그리고 이 태도를 결정짓는 것이 말씀에 눈이 열리는 것이다. 말씀에 눈이 열리면 말씀을 ‘좋아’하고, 말씀에 ‘몰두’하고, 말씀에 ‘헌신’하게 된다. 이런 사람은 자연히 주야로 말씀을 묵상하게 되고, 그래서 악인의 꾀, 죄인의 길, 오만한 자의 자리에 앉지 않게 된다. 마치 시냇가에 심어진 나무처럼 형통의 복이 찾아오고, 형통의 복을 누리게 된다. 또한 이와 같은 말씀에 대한 태도를 ‘은혜의 표지’라고 말한다. 은혜를 경험한 사람은 말씀의 중요성을 확신하고 말씀을 붙들며 그것에 집중하고, 견고하게 그 입장을 견지하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어떻게 말씀에 더욱 눈이 열리게 할 수 있을까? 물론 주님께 열어주셔야만 된다. 신앙생활의 모든 결정권은 ‘주님께’ 있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우리 편에서 해야 할 부분이 있다. 흔히 하나님을 인격적인 분이시라고 말한다. 다른 말로 우리와 공감되는 부분이 많다는 뜻이다. 그래서 성경을 보면 하나님을 사람처럼 소개한 표현이 자주 나온다. 소위 하나님을 인간처럼 의인화시켜 우리로 잘 이해하도록 한 것이다. 이를 신학적인 용어로 ‘신인동형론’(Anthropomorphism)이라고 한다. 즉, 하나님의 손, 팔, 입김, 눈, 발, 머리카락, 옷, 보좌 등. 실제로는 없지만 이해를 돕기 위해 사용된 상징이다. 이런 견해에 따라, 눈을 열어서 말씀의 기이한 것을 볼 수 있도록 하는 것은 전적으로 하나님의 몫이지만 우리의 작용에 반응하시는 하나님에 대해서도 충분히 생각해볼 수가 있다. 즉, 우는 아이에게 떡 하나 더 준다는 속담처럼 하나님께도 이런 면이 있다는 뜻이다. 그러니까 우리가 어떻게 반응하느냐에 따라 하나님께서도 응대하신다는 것이다. 이에 대해 성경이 말씀하고 있다. ‘나를 존중히 여기는 자를 내가 존중히 여기고, 나를 멸시하는 자를 내가 멸시하리라.’(삼상2:30b). ‘나를 사랑하는 자들이 나의 사랑을 입으며 나를 간절히 찾는 자들이 나를 만날 것이니라.’(잠언8:17). 이 외에도 기도와 관련된 말씀들도 여기에 속한다. 이를 그대로 말씀에 적용할 수 있다. 말씀의 은혜를 사모하면서 눈을 열어서 말씀의 기이한 것을 볼 수 있게 해달라고 기도하는 것, 그리고 말씀에 관심을 갖고, 말씀을 사랑하고, 말씀에 집중하는 것이다. 그러면 하나님께서 말씀에 대한 우리의 눈을 열어주실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게 된다. 물론 신앙생활에서 애쓰는 것이 답은 아니지만 애쓰는 만큼 주님의 은혜에 가까이 다가가는 것도 사실이다. 그러므로 말씀에 대한 우리의 눈이 더 크게, 더 많이 열리게 해달라고 기도합시다! 그리고 주님께서 눈을 열어주실 것을 기대하며 생명의 말씀, 은혜의 말씀, 치유와 회복의 말씀, 능력의 말씀을 더욱 사랑하고 사모하고 갈망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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