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눈Ⅷ’
페이지 정보
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9,445회 작성일 21-06-21 15:59본문
열어주소서! ‘눈Ⅷ’
시150:1~6
2021. 6/20. 11:00
황소 한 마리의 가치
우연히 접한 어떤 분의 간증이다. 다리를 다쳐 목발에 의지해서 생활하는 사람인데, 그는 매일 집 근처 개척교회에서 잠을 자며 새벽예배를 드렸다. 어느 날, 기도하던 중 앉아있던 의자를 잡고 일어서봐야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렇지만 일어서려다 그만 자리에 그대로 주저앉고 말았다. 그는 다음 날 새벽에도, 그 다음 날 새벽에도 의자를 잡고 일어서는 행동을 반복했다. 어느 순간 의자를 잡고 설 수 있게 되었고, 기쁜 마음에 의자에서 손을 놓았는데 놀랍게도 넘어지지 않았다. 이렇게 그는 목발에 의지하지 않고 서게 되었고, 나아가 걷게도 되었다. 그는 너무 기뻐 걷기도 하고 뛰기도 하며 하나님께 감사를 드리고, 목이 터져라 찬양도 드렸다. 이런 감격과 함께 그를 괴롭히는 것이 있었다. 이와 같은 큰 은혜를 받았으면서도 주님께 드릴 것이 없다는 것이었다. 그것이 너무 죄송하기도 하고 괴로웠다. 그런 그가 말씀을 읽던 중 놀라운 사실을 발견하였다.
‘내가 노래로 하나님의 이름을 찬송하며 감사함으로 하나님을 위대하시다 하리니 이것이 소 곧 뿔과 굽이 있는 황소를 드림보다 여호와를 더욱 기쁘시게 함이 될 것이라.’(시69:30,31).
하나님께 기쁨과 감사로 찬양을 드리는 것이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내용이다. 아무것도 드릴 것이 없다고 생각했던 그에게 이 말씀은 참으로 기쁜 소식이었다. 감격 그 자체였다. 그에게도 드릴 것이 생겼기 때문이다. 그것도 황소보다 더 기뻐하시는 것을 드릴 수 있게 되었으니 말이다. 그래서 그는 그때부터 황소를 드리는 심정으로 찬송을 드리기 시작했다. 한 곡을 수십 번씩 반복해서 부르기도 하고, 하나님이 감동을 주시는 찬양을 찾아서 부르기도 했다. 찬양을 드리다가 눈물이 흘러 얼굴이 퉁퉁 붓고, 찬양을 부르다가 잠이 들기가 일쑤였다. 이렇게 찬양을 드리다보니 그 동안 질병에 찌든 마음과 영혼이 온전히 회복되는 것을 경험했다고 한다. 찬양의 중요성과 가치를 일깨워주는 간증이었다.
영적 매너리즘을 조심하라!
좋은 습관은 신앙생활에 큰 유익이 된다. 어떤 사람은 새벽에 일어나는 것이 너무 힘들어 새벽예배를 드리는 것이 그토록 힘겨운데, 어떤 사람은 일찍 일어나는 습관 때문에 전혀 문제가 되지 않는다. 이 한 가지만 두고 봐도 습관이 신앙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는 것을 알 수 있다. 하지만 경계해야 할 것도 습관이다. 습관적으로 하는 일은 자칫 매너리즘에 빠질 수가 있다. 즉, 습관에 젖어버리는 것이다. 여기에는 감사도 감격도 어떤 역동성도 사라지게 된다. 그저 무미건조하고, 생명력이 없는 형식적인 신앙생활의 반복이 되고 만다. 신앙생활에서 경계해야 할 부분이다. 분명히 종교적인 행위는 무성한데, 열매가 없다. 살펴보면 우리의 기도생활이나 찬양생활, 예배생활이 습관에 젖은 경우가 많다. 신앙생활을 오래하고, 소위 잘 한다는 사람에게서 흔히 발견되는 아주 나쁜 병증이다. 경험에 의존하여 습관적으로 하는 경우가 많다. 언젠가 수요예배에서 소개한 스펄젼의 이야기는 이런 우리의 신앙생활에 도전을 준다. 어느 날, 스펄젼 목사가 서재에서 슬피 울고 있었다. 놀란 그의 아내가 물었다. ‘혹 성도나 교회에 무슨 좋지 않는 일이라도 있습니까?’ 그러자 그가 정색을 하고 말했다. ‘정말 그 이유를 알고 싶소? 주님의 십자가를 바라보는데, 아무런 감동이 없어서 그렇소. 나에게 십자가의 감격이 없는데, 어떻게 다른 사람에게 십자가를 바라보라고 말하겠소. 이 사실이 너무 가슴이 아파서 운 것이오.’ 습관적인 신앙생활을 경계하는 스펄젼의 통곡이다.
찬양도 마찬가지다. 습관에 젖어서, 그저 입술로만 드리는 것은 경계해야 한다. 이것은 주님 앞에 소음일 뿐이다. 앞의 간증을 소개한 것은 우리의 찬양에 감동의 불을 지필 수 있겠다 싶어서다. 우리가 드리는 찬양의 가치와 함께 주님께서 우리의 찬양을 얼마나 좋아하시는지를 알게 해주기 때문이다. 찬양을 드리는 것이 ‘황소’를 드리는 것보다 하나님을 기쁘시게 한다는 것은 충격이 아닐 수 없다. 구약시대에 황소는 제사의 제물로 주로 제사장이나 백성의 지도자가 드리는 가장 비싼 제물이었다. 그러니까 이 말씀은 가장 비싼 제물인 황소를 드리는 제사보다 찬양의 제사를 더욱 기뻐하신다는 것이다(히브리서 기자는 찬양을 제사의 요소가 아닌 제사 자체라고 함). 제물의 제사보다 찬양의 제사를 하나님이 기뻐하신다는 뜻이다.
찬양의 삶을 회복하려면
본문은 시편 전체의 결론이다. 본문은 6절로 된 짧은 시이다. 할렐루야로 시작해서 할렐루야로 마친 것은 물론 ‘찬양하라’는 뜻의 ‘할렐루’란 명령형이 11회나 사용되고 있다. 두 번의 할렐루야까지 합치면 13번이나 된다. 이렇게 시편 전체의 결론을 찬양하라는 단어로 가득 채워 끝을 맺고 있는 이유가 있다. 그것은 우리가 이 땅에 존재하는 목적이 무엇인지를 보여주기 위함이다. 그 목적은 하나님을 ‘찬양하는’ 것이다. 현재 우리가 처한 삶의 자리가 어떠하든지 즉, 시험 중이든, 고난 중이든, 슬픔 중이든...또한 고난을 주신 것도, 탄식에 대한 해답도, 우리를 보호하시고 승리하게 하신 것도 결국 찬양에 있다. 이것은 시편이란 제목을 통해서도 알 수가 있다. 시편을 내용별로 분류를 해보면 비탄과 탄식의 시가 거의 2/3에 해당된다. 감사나 찬양시보다 압도적으로 많다. 그런데도 시편의 제목이 ‘에카’가 아니고 ‘테힐림’이다. 테힐림은 ‘찬양의 시들’이란 뜻이다. 모든 상황을 뛰어넘어서 하나님을 찬양하라는 것이다. 비록 태어날 때는 울며 이 세상에 왔지만 생의 마지막은 기쁨과 찬양으로 마쳐야 한다는 것을 강조한 것이다.
아무튼 본문은 ‘찬송(양)신학’의 요약이라 해도 될 만큼 찬양에 대해 잘 정리해 놓고 있다. ‘어디서’ 찬양하고, ‘왜’ 찬양을 하고, ‘어떻게’ 찬양을 하고, ‘누가’ 찬양해야 할 것인지를 말씀하고 있다. 특히 어떻게 찬양해야 할지에 대한 말씀(3,4,5)은 습관에 젖은 찬양을 결코 용납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 수 없다. 밋밋하게 찬양하는 것을 거부하고 온갖 악기를 다 동원하여 찬양을 하라고 한다. 이렇게 악기까지 동원하여 찬양하라고 했는데, 찬양할 때 손뼉을 치고, 발을 구르고, 춤을 추는 것은 당연한 것이다. 이렇게 호흡이 있는 모든 존재가, 하나님께서 임재하신 모든 곳에서 찬양하라고 말씀한다. 어떻게 이와 같이 찬양생활을 할 수 있을까? 무엇이 이와 같은 찬양생활을 가능하게 해줄까? 그것은 찬양의 ‘이유’다. 왜 찬양을 해야 하는지 분명한 이유를 알고, 이유가 분명하면 이런 격한 찬양을 어디서나 드릴 수가 있다. 찬양의 이유를 알면 찬양의 중요성과 가치를 깨닫게 되기 때문이다.
찬양의 이유에 눈이 열려야 한다.
본문은 그 이유를 두 가지 말씀하고 있다. 하나는, ‘그의 능하신 행동’이고, 다른 하나는, ‘그의 지극히 위대하심’이다. 능하신 행동이란 하나님께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뜻하고, 지극히 위대하심은 하나님의 성품을 뜻한다. 하나님께서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을 기억하면 하나님을 찬양하지 않을 수가 없다. 그리고 하나님이 우리에게 행하신 놀라운 일들은 하나님의 지극히 위대하심(성품)과 연결이 된다. 아무짝에도 쓸모없는 나 같은 죄인을 구원하시겠다고 하나 밖에 없는 아들을 이 땅에 보내시고, 비참한 생애를 보내시다 비참하게 돌아가시게 한 사건은 나를 향한 하나님의 지극한 사랑을 보여준다. 하나님께서 나를 위해 행하신 이 놀라운 일과 이 일을 통해 보여주신 나를 향한 이 엄청난 사랑을 생각하면 찬양하지 않을 수 없고, 격하게 찬양할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러므로 이러한 사건 하나하나에 우리의 눈이 열려야 한다. 그러면 찬양의 달인이 되고, 매번 황소와 같은 제물로 하나님을 섬기는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예배자가 될 수 있다.
프랑스에서 있었던 일이다. 한 할아버지가 병원에 입원하여 치료를 받고 퇴원할 때 주치의가 직접 찾아와서 이 할아버지에게 의료 계산서를 보여주었다. 그러자 할아버지는 눈물을 흘리기 시작했다. 의사는 할아버지를 달래면서 생명을 건지셨으니 계산서 때문에 너무 괴로워하지 말라고 달랬다. 그러자 할아버지가 말했다. ‘나는 지불하게 될 치료비를 보고 눈물을 흘리는 것이 아닙니다. 나는 치료비를 지불할 수 있습니다. 내가 눈물을 흘리는 것은 고작 24시간 공급받은 산소 금액이 5천 프랑이나 된다는 사실입니다. 나는 93년 동안이나 하나님께서 주신 산소를 마시면서 한 번도 돈을 지불한 적이 없습니다. 그러니 내가 하나님께 얼마나 많은 빚을 졌는지 아십니까?’ 의사도 이 말을 듣고 고개를 숙이고 눈물을 흘렸다. 숨 쉬고 먹고 마시고 사는 일상의 삶도 하나님께서 베풀어주시는 놀라한 은혜인 것이다. 이런 것 하나하나를 생각하면 하루하루를 감사하면서 목이 터져라 찬양을 드려도 모자란 우리다. 우리에게 시급한 것은 바로 이점이다. 이런 은혜를 베풀어주신 주님의 놀라운 일들, 주님의 지극히 위대하신 성품에 우리의 눈이 크게 열려야 한다. 철이 든다는 것은 은혜를 알고, 은혜를 깨닫는 것이다. 은혜에 대해 감사하고 찬양하는 것이다, 철이든 성도가 되었으면 좋겠다. 그래서 우리 모두 찬양의 달인이 되었으면 좋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