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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07-07-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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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9,114회 작성일 07-07-16 14: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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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
딤후1:15~18

목사에게 있어 '설교’란 면류관이면서 십자가입니다. 부족하고 연약한 인간으로서 하나님의 말씀을 선포한다는 면에서 영광이고 면류관이지만, 한 편의 설교를 준비하여 이것을 청중에게 전달하는 모든 과정은 피를 말리는 일이기에 십자가인 셈입니다. 그러기에 애를 써서 준비한 설교가 잘 전달이 안 되는 날은 말 그대로 고통입니다.

어떤 목사님이 일주일 내내 준비한 설교를 힘있게 외쳤지만 왠지 사람들에게서 별 반응이 없었습니다. '오늘 설교는 죽 쒔구나.’하는 생각이 들어 예배를 마치고 힘없이 사무실로 돌아왔습니다. 이 때 주책이 없는 교인 한 사람이 목사님을 쪼르르 따라 왔습니다. 그리고 신이 나는 듯한 얼굴로 이렇게 초를 치는 것이었습니다. "목사님, 오늘 설교 죽 쑤셨지요?" 순간 목사님은 마음이 확 달아올랐으나 이렇게 대답하였습니다. "예, 내가 오늘 강단에 올라가 보니, 몇몇 교인들이 병든 닭처럼 꾸벅꾸벅 졸기에 죽을 써서 먹여주었지요." 교인들은 목사의 설교에 은혜를 받지만, 목사는 설교에 대한 교인들의 반응에 은혜를 받는 것입니다.

존 맥스웰(John C. Maxwell)은 「함께 승리하는 신뢰의 법칙」이란 그의 책에서 사람을 네 가지 유형으로 분류하고 있습니다.

첫 번째 유형은,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사람입니다. 이는 이웃에게 보탬이 되는 사람. 이웃에게 무언가를 베풀기를 좋아하고, 이웃의 짐을 함께 져주는 사람. 그래서 누구에게나 환영받는 유익한 사람입니다. 성경에서 요셉 때문에 (그가 노예로 섬기던)보디발의 집이 복을 받고, (억울하게 감옥에 갇혔을 때는)감옥의 옥사장이 복을 받고, (애굽의 총리가 되어 전국을 다스릴 때는)애굽이 복을 받았던 것처럼 자기 주변을 잘되게 하는 사람입니다.

두 번째 유형은, 삶의 의미를 빼앗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돕고, 짐을 덜어주기는커녕 요구만 하고 오히려 짐을 더해서 무겁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이웃을 낙심시키고, 상처를 주는 사람입니다. 함께 있어서 유익이 되지 않는 사람입니다.  

세 번째 유형은,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보탬이 되는 사람보다 더 한 단계 나아가는 사람입니다. 단순히 유익이 되는데서 그치지 않고 이웃을 풍요롭고 행복하게 만드는 사람입니다. 제가 아는 어느 장로님은 직원들에게 자신의 기술을 전수해서 가게를 차려주기까지 했습니다. 바로 이런 사람입니다.

네 번째 유형은, 삶의 의미를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모든 관계를 파괴하는 사람입니다. 그저 빼앗는 사람들과 달리 의도적으로 나쁜 행동을 하는 사람, 이웃에게 상처를 주고 누군가를 짓밟고 올라서야 자신이 높아진다고 생각하며 만족을 느끼는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은 관계도 망치고 남의 인생도, 나아가서는 자신의 인생도 망치게 됩니다. 만드는 것과 부수는 것은 큰 차이가 있습니다. 예쁜 의자 하나를 만들려면 숙련된 기술자의 세심한 손길과 시간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그것을 부수는 것은 한순간이고 누구라도 할 수 있습니다. 삶도 마찬가집니다. 이웃을 세워주기는 어려워도 파괴시키는 것은 쉽습니다.  

여러분은 어느 유형에 속한 것 같습니까? 어느 유형의 사람이 되기를 원하십니까? 이 네 가지 유형은 ‘이웃에게 유익한 사람이냐, 유익하지 못한 사람이냐! 이웃을 세워주는 사람이냐, 파괴하는 사람이냐!’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오늘 본문에 이웃에게 유익한 삶, 이웃을 세워주는 삶을 살았던 사람이 소개되고 있습니다. 오네시보로가 바로 그 사람입니다.

디모데후서는 바울의 마지막 편지입니다. 복음 사역을 성실히 수행하다가 이제 죽음을 눈앞에 둔 바울 자신의 회고담을 기록하고 있습니다. 로마의 감옥에 갇혀 이제 서서히 죽음의 그림자가 다가오고 있음을 느끼면서, 에베소에서 목회하고 있는 사랑하는 제자 디모데에게 보낸 편지입니다. 본문에서 사도 바울은 자신을 저버린 사람들에 대한 섭섭한 심경과 함께, 끝까지 자기를 살피고 도와준 오네시보로와 그 가정에 대한 고마운 마음을 표현하고 있습니다. 특히 본문은 오직 예수, 오직 복음전파를 위해서만 살았던 사도 바울의 인간적인 모습을 보여주는 부분입니다.

사람이라면 누구나 격려가 필요하다.
바울의 이런 인간적인 모습을 통해 사람이라면 누구나 격려가 필요하다는 사실, 격려가 필요 없을 만큼 강한 사람은 없다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그리고 누구라도 격려자가 될 수 있다는 사실입니다. 바울은 복음을 전하는 사람으로서 평생을 격려자와 위로자로 살았습니다. 오직 앞에 있는 푯대만을 바라보고 쉬지 않고 달려온 바울이지만, 그도 역시 격려가 필요한 사람이었던 것입니다. 그 동안 많은 사람들이 바울 곁에서 바울의 사역을 도왔습니다. 그런데 어떤 사람은 사역 때문에 바울을 떠났고, 부겔로와 허모게네와 같이 신앙을 버린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렇게 신앙을 버린 사람들에 대한 섭섭함도 있었고, 멀리 떨어져 있는 디모데나 사랑하는 성도들에 대한 보고픈 심정도 있었습니다. 그런데 오네시보로가 곁에 있어주어 큰 힘과 용기를 얻게 되었고, 유쾌한 마음이 되었던 것입니다.

16절에서, 바울은 오네시보로가 "자주 유쾌하게 하였다."고 말합니다. 여기 "유쾌하게 하다"는 말은 영어로는 'refresh’입니다. '신선하게 하다, 힘을 내게 하다, 용기를 북돋아주다’라는 뜻입니다. 힘을 내게 하는 것, 용기(courage)를 불어 넣어주는(in) 것. 이것이 바로 격려(encouragement)입니다. 오네시보로를 통하여 바울이 격려를 받고, 용기를 얻었다는 말씀입니다. 바울같이 위대한 하나님의 종도 따뜻한 위로와 격려가 필요했다면, 우리들은 말할 것도 없지 않겠습니까? 서로 위로하고 격려하여 용기를 북돋아주며 살 수 있기를 바랍니다. 그래서 성경은 말씀하십니다. "서로 돌아보아 사랑과 선행을 격려하라!"(히10:24).

용기를 북돋아주는 방법(격려의 방법)
1. 부끄러워하지 않는 것(16).
오네시보로는 감옥에 갇혀있는 사도 바울을 부끄러워하지 아니하였습니다. "나의 사슬에 매인 것을 부끄러워 아니하여"(16). 공동번역은 "감옥에 갇힌 나를 부끄럽게 생각하지 않았습니다."라고 했습니다. 부끄러워하지 않았다는 말은 소극적인 표현이고, 적극적으로는 소중하게 생각하고, 오히려 자랑스러워했다는 표현입니다. 왜냐하면 오네시보로는 바울이 왜 감옥에 갇혔는지를 알고 있기 때문입니다. 그것은 주님을 위하여, 복음을 위하여 옥에 갇힌 것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것은 그 일의 가치와 중요성을 이해해야만 합니다. 그래야 그 일을 위해 당하는 수고나 고통의 가치도 알게 되는 것입니다. 오네시보로는 주님의 가치, 복음의 가치를 알았습니다. 이 때문에 옥에 갇힌 바울을 소중하고 자랑스럽게 여긴 것입니다. 이와 같이 자신이 한 일과 그 일 때문에 당한 수고를 알아주는 오네시보로를 통하여 바울은 큰 격려와 위로를 받은 것입니다.

사람은 누군가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고, 나의 하는 일을 소중하게 여기는 사람이 있을 때 큰 위로와 격려를 받는 것입니다. 부모의 가장 큰 위로와 격려는 자녀들이 자신을 자랑스럽게 여길 때입니다. 목회도 마찬가집니다. 신자들이 목회자를 자랑스럽게 여길 때 목회의 보람을 느낍니다.

미국인들로부터 존경을 받는 여인이 있습니다. 루즈벨트 대통령의 부인이었던 엘레나 루즈벨트 여사입니다. 그녀는 20세에 루즈벨트와 결혼을 했는데, 당시 루즈벨트는 패기가 있고, 장래성 있는 청년이었습니다. 그런데 뜻하지 않은 사고로 관절염에 걸려 다리가 말라 버리는 불행에 직면하게 됩니다. 하는 수 없이 쇠붙이를 다리에 대고 다리를 고정시킨 채 휠체어를 타고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루즈벨트가 엘레나에게 물었습니다. "내가 불구자가 되었는데도 당신은 날 사랑하오?" 그러자 엘레나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그럼 내가 그 동안 당신의 다리만 사랑한 줄 알았어요? 내가 사랑하는 것은 당신의 인격과 당신의 삶입니다." 이 말은 장애로 인해 열등의식과 패배의식에 사로 잡혀 있던 루즈벨트에게 새로운 용기를 주었습니다. 결국 그는 1932년 미국의 대통령에 당선된 이래 1948년까지 미국 역사상 유일한 4선 대통령이 되었습니다. 남편의 불구를 부끄러워하지 않는 엘레나의 태도가 루즈벨트에게 용기를 불어넣어 주었던 것입니다.

상대방의 처지에 상관없이 믿고, 인정하고, 신뢰하는 자세. 이것이 오네시보로의 바울을 향한 자세였습니다. 오네시보로의 이와 같은 태도를 통하여 바울은 용기를 얻게 된 것입니다. 부모(자녀)를 자랑스러워하는 자녀(부모), 남편(아내)을 자랑스러워하는 아내(남편), 작지만 우리교회와 우리교회 공동체를 자랑스러워하는 신자가 되시기를 바랍니다. 그래야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격려자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삶의 의미를 더해주는 사람, 삶의 의미를 풍요롭게 만드는 사람이 될 수가 있습니다.

2. 자주 찾아 만나는 것(17).
17절에, "로마에 있을 때에 나를 부지런히 찾아 만났느니라."고 했습니다. "로마에 있을 때"란 지금 바울이 로마 감옥에 갇혀 있을 때, 여러 이유로 주변 사람들이 다 떠나고 혼자 있을 때를 의미합니다. 그때 오네시보로가 바울을 자주 찾아와 함께 있어주었다는 말씀입니다. 다른 아무 말을 하지 않더라도 내가 힘들고 어려울 때, 누군가 곁에 있어주는 사람이 있다는 사실만으로도 용기가 납니다. 그래서 어려움과 고통을 이길 수 있습니다. 함께 있어 주는 것, 그 자체가 위로가 되고 격려가 되고 힘이 되는 것입니다. 전 교회를 시작하면서 이를 절감했습니다. 예배시간에 그냥 자리를 채워주기만 해도 그것이 큰 위로가 되었습니다. 오네시보로는 부지런히 바울에게 찾아와서 바울과 함께 있어 주었습니다.

오클라호마 시에서 목회를 하던 엔트림(Eugene Antrim)목사의 목격담입니다. 큰길가에 있는 호텔의 창문으로 밖을 내다보고 있는데, 전차가 갑자기 급한 소리를 내며 정거를 했습니다. 사람들이 소리를 치며 모여들고 경찰이 달려오는 것을 보니 누가 전차에 치인 것에 틀림이 없었습니다. 엔트림 목사가 밖으로 뛰어나가 보니, 사람들은 전차 밑에 치어서 끼어있는 사람을 꺼내려고, 경찰, 응급구조 대원들이 애를 쓰는 것을 도우며 야단이었습니다. 그렇지만 방법은 대형 중장비 특수 차량을 가지고 와서 전차를 들어올리고 그 사람을 끌어내는 수밖에 없었습니다. 그런데 그 차량을 사고 장소까지 가져오려면 최소한 30분은 걸릴 것 같았습니다. 한편 전차에 치인 사람은 고통과 두려움 속에서 "살려 달라고, 꺼내 달라고" 소리를 지릅니다. 이 상황에서 누구도 이 사람을 진정시키지 못하고 그저 장비가 오기만을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그 자리에 있던 한 청년이 이 문제를 해결했습니다. 그 청년은 전차 밑으로 기어 들어가더니 전차에 치어있는 사람 곁으로 가서 자기의 팔을 펴서 겁을 먹고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이 사람에게 베도록 해주고, 자기도 그 사람과 나란히 누워 귀에다 대고 친절히 이야기를 하기 시작했습니다. 그러자 사고를 당한 사람은 금방 공포와 고통에서 침착을 회복하였습니다. 드디어 안정을 되찾은 그 사람은 아파서 벌벌 떨면서도 그 청년을 바라보고 미소를 지으며 말을 했습니다. "친구여, 감사합니다!" 드디어 장비가 도착되어 구조작업이 이루어지고 사고를 당한 사람이 응급차에 실려 가자, 그 청년은 말없이 군중 속으로 사라져갔습니다.

여러분 사랑이라는 것, 격려라는 것이 그렇게 거창한 것이 아닙니다. 그냥 함께 있어주는 것. 그것이 사랑이고 격려입니다. 고통 중에 있는 사람 곁에, 어려움과 고독한 중에 있는 사람 곁에 함께 있어 주는 것만으로 그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주게 됩니다. 오네시보로는 부지런히 바울을 찾아가 함께 있어 줌으로, 감옥에 고독하게 갇혀 있던 바울에게 큰 위로와 용기를 줄 수 있었던 것입니다. 함께 있어주는 것이 사랑입니다. 특히 어려운 일을 당한 사람들에게는 함께 있어주는 것 자체가 위로이고 격려입니다.

나의 오네시보로는 누구인가?
나의 오네시보로는 누구입니까? 우리 예수님이십니다. 우리 예수님은 세상 끝 날까지 우리 함께 하신다(마28:18)고 말씀하셨습니다. 항상 우리와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즉 기쁠 때나 슬플 때, 아플 때나 건강할 때, 일이 잘 풀리지 않을 때 형통할 때 어떤 형편에든지 항상 함께 하신다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우리를 영광스러운 하나님의 자녀로 소중한 존재, 자랑스러운 존재가 되게 하셨습니다. 또한 지금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이 나의 오네시보로입니다. 지금의 내가 있는 것은 내 곁에 있는 형제/자매 때문입니다. 그의 격려와 위로로 오늘의 내가 있는 것입니다. 동시에 나 역시 내 곁에 있는 그 사람을 위한 오네시보로임을 기억해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는 주님이 그리하셨던 것처럼, 서로를 귀하게 여기고 자랑스러워하며 그가 있는 곳에 항상 함께 하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서로에게 용기를 북돋아주는 사람이 되어야 합니다. 우리 인생의 오네시보로 되신 주님은 우리 모두가 서로에게 오네시보로가 되기를 원하십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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