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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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22,091회 작성일 21-07-26 08:28본문
열어주소서! ‘귀’
눅18:35~43
2021. 7/25. 11:00
듣기만 하는 귀
우리의 눈, 코, 입, 귀에 대해 생각을 해보았다. 눈은 볼 뿐만 아니라 감정도 표현을 한다. 슬프거나 기쁠 때 눈물을 흘리고 웃기도 한다. 코는 숨도 쉬고 냄새 맡는 일도 한다. 입은 먹고 마시는 일과 함께 숨을 쉬고, 말도 하고 노래도 부른다. 그런데 이러한 기능에서 비교적 동떨어진 기관이 하나있다. ‘귀’다. 귀는 ‘오로지 듣는 것’만 한다. 또 귀는 얼굴 옆에 있어서 그다지 귀하게 여기지 않는다. 눈, 코, 입은 신경 써서 꾸미고, 성형수술도 하지만 귀는 성형은 물론 잘 꾸미지도 않는다. 기껏 귀걸이를 하는 정도가 전부다. 눈은 감을 수 있고, 입은 닫을 수도 있다. 그러나 귀는 전혀 움직일 수가 없다. 늘 열려만 있다. 하나님이 이렇게 만드신 것이다. 왜 이렇게 만드신 것일까? 아마도 ‘듣는 것’의 중요성을 강조하기 위함인 것 같다. 항상 귀를 열고 듣는 것에만 집중하라는 의미가 아닐까 생각해 보았다. 그것도 두 개씩이나 주신 것을 보면 더욱 그렇다.
귀가 멀면 관계도 멀어진다!
헬렌 켈러의 말이다. ‘눈이 멀면 사물과의 거리가 멀어지고, 귀가 멀면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특히 ‘귀가 멀면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진다.’는 말이 의미가 있는 것 같다. 잘 듣지 않으면, 잘 들어주지 않으면 사람과의 관계가 멀어진다. 반면에 누군가 내 말에 귀를 기울여 잘 들어주면 호감을 갖게 되고, 신뢰하게 되고, 좋아하게 된다. 좋은 친구가 된다. 익히 아는 대로 상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이 상담자와 내담자 간의 ‘신뢰’쌓기다. 그 방법이 내담자로 하여금 말을 하도록 하고 상담자가 충분히 잘 들어주는 것이다.
이는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이 된다. 바울은 로마서에서 복음전파의 중요성을 강조하며 이렇게 말했다. ‘그러므로 믿음은 들음에서 나며 들음은 그리스도의 말씀으로 말미암았느니라.’(10:17). 믿음과 들음이 직접적으로 관련이 있다는 것이다. 복음을 전해서 사람들에게 복음을 들려주어야 할 이유를 역설한 것이다. 믿음은 복음의 말씀을 들어야 생기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관계에도 마찬가지다. 잘 들어야 주님과의 관계가 가까워진다. 신앙생활이란 주님과의 거리(간격)를 좁히는 일인데, 주님과의 간격을 좁히고, 거리를 좁히는 비결, 주님과 친밀함을 갖는 비결이 ‘잘 듣는’데 있다. 연인끼리 큰 소리로 말하는 것 봤는가? 서로 바짝 얼굴을 대다시피 하고 소곤거린다. 그렇게 작은 소리로 속삭여도 다 알아듣는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기울이고 있기 때문이다. 주님과의 관계도 듣는 것으로 결정이 된다. 그러므로 건강한 인간관계를 위해서도 그렇지만 특히 주님과의 친밀함을 위해서 잘 듣는 열린 귀를 갖는 것은 너무 중요하다.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 사람
본문에 주님의 마음을 훔친 사람, 그래서 인생대박을 경험한 사람이 나온다. 지난 주일에 소개했던 디매오의 아들 소경 거지 ‘바디매오’가 그 주인공이다(막10:46 참조). 성경이 매우 이례적으로 그의 아버지 이름까지 밝히고 있다. 이는 그의 아버지가 그 지방의 유력인사였다는 뜻이다. 이런 유력인사의 아들인 그가 구걸을 한 것은 가족으로부터 버림을 받은 상황인 것 같다. 장애도 서러운데 가족으로부터 버림까지 받아 구걸로 생계를 이어가야 하는 그의 형편이 얼마나 절망적이었을지는 충분히 짐작할 수 있다. 그런 그에게 놀라운 기회가 다가오고 있었다. 그것은 다른 아닌 예수님께서 갈릴리를 출발하여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는 중이셨다. 그 과정에 반드시 통과를 해야 하는 곳이 ‘여리고’다.
본문의 사건은 이 여리고 입구에서 일어났다. 여리고는 예루살렘으로 가는 교통의 요지라 사람의 출입이 많고, 그래서 걸인들이 구걸하기에 아주 좋은 장소였다. 본문처럼 유월절이 다가올 때는 순례객으로 더욱 붐볐다. 말 그대로 대목인지라 바디매오는 이른 아침부터 길가에 앉아서 지나가는 행인에게 구걸을 하고 있었다. 그때 갑자기 많은 사람의 웅성거림과 발자국 소리가 들렸다. 그는 주변의 한 사람에게 ‘무슨 일이냐’고 물었고, 그 사람이 ‘나사렛 예수가 지나간다.’고 전해주었다. 이 말을 듣고 그는 갑자기 큰 소리로 외쳤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38). 그의 외침에 주변 사람들이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아마도 그들은 그가 구걸을 한 것으로 생각했던 것 같다. 그러자 그는 더욱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 ‘다윗의 자손이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39). 특히 여기서 ‘울부짖다’는 동사가 미완료형이다. 계속해서 큰 소리로 울부짖었다는 것이다. 이는 간절하고 절실한 그의 태도를 보여준다. 이때 기적 같이 주님께서 걸음을 멈추시고 그를 데려오도록 하셨다.
사람들은 그의 외침을 동냥을 위한 것으로만 들었다. 그래서 조용히 하라고 꾸짖었다. 그렇지만 주님은 그들과 달리 들으셨다. 그가 무엇을 위해 그토록 간절하게 외치는지를 아셨다. 그리고 그를 오게 해서 그가 그토록 소원했던 볼 수 있는 복을 허락하셨다. 눈을 뜨게 하신 것이다. 같은 장소에서 같은 사람의 소리를 같이 들었는데, 반응이 이렇게 다르다. 듣는 귀가 달기 때문이다. 이렇게 주님은 우리 마음의 소원을 들으시고, 간절한 부르짖음에 귀를 기울여주시는 분이다. 특히 주님은 믿음의 소리에 예민하시고, 믿음의 소리가 주님의 마음을 훔칠 수가 있고,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한다. 이것이 바디매오가 인생대박을 경험한 비결이다.
잘 들으면 복이 된다.
주님은 바디매오의 이렇게 말씀하시면서 그의 눈을 뜨게 하셨다. ‘보라. 네 믿음이 너를 구원하였느니라.’(42). 그렇다면 그를 구원한 그의 믿음이 무엇인가? 주님은 어디서 그의 믿음을 보신 것일까? 바로 그의 고백이다. ‘다윗의 자손 예수여 나를 불쌍히 여기소서!’가 바로 그것이다. 주변에 있던 사람이 그에게 ‘나사렛 예수’라고 전해주었는데, 그는 ‘다윗의 자손 예수’로 고쳐 불렀다. 나사렛 예수와 다윗의 자손 예수는 완전히 다르다. 나사렛 예수는 인간 예수, 나사렛 출신의 훌륭한 랍비라는 뜻이다. 반면에 다윗의 자손 예수는 구약성경에 약속된 다윗의 혈통을 오실 세상의 구세주 ‘메시야’를 뜻한다. 그러니까 예수님이 구세주(구원자)란 것이다. 이는 베드로가 고백했던,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다.’(마16:16)와 같은 의미다.
참으로 놀라운 대조가 아닐 수 없다. 두 눈을 멀쩡히 가지고 주님을 따라다니며 주님의 말씀도 듣고, 행하신 기적들도 똑똑히 본 그들은 주님을 훌륭한 랍비 정도로 알았다. 반면에 눈이 멀어 주님을 본 적도 없고, 만난 적도 없고, 말씀도 들은 적도 없는 바디매오는 주님을 메시야라고 고백했다. 그렇다면 주님을 보지 못했고, 만난 적도 없는 소경 바디매오가 어떻게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놀라운 고백을 하게 되었을까? 그가 ‘잘 듣는’ 열린 귀를 가졌기 때문이다. 당시 주님의 소문이 유대 전역은 물론 인근 나라에까지 퍼져 있었다. 자기처럼 눈이 먼 사람을 고쳐주시고, 문둥병자, 중풍병자, 앉은뱅이, 말 못하는 사람을 고쳐주시고, 귀신을 쫓아내주시고, 죽은 사람을 살리시고, 적은 음식으로 많은 사람을 먹이시고, 물 위를 걸으신 것 등. 이와 같은 주님에 대한 소문을 들었을 것이다. 이런 소문을 통해 주님이 메시야이신을 확신하게 된 것이다. 그렇다. 귀가 열려야 들은 것이 믿음으로 작용하고, 그 믿음이 능력으로 나타나게 된다.
주님의 마음을 훔쳐라!
나는 신앙생활을 이렇게 생각한다. 주님의 걸음을 멈추게 하는 것, 그래서 주님의 시선(관심)을 나에게 혹은 나의 문제에 집중시키는 것이다. 즉, 주님의 마음을 ‘훔치는’ 것이다. 주님의 귀를 훔치고, 주님의 눈을 훔치는 것이다. 그 비결은 간절히 믿음의 소리를 내는 것이다. 본문의 바디매오가 좋은 모델이다. 이와 같은 믿음의 소리는 잘 듣는 귀, 복음에 열린 귀에서 시작이 된다. 들어야 믿음이 생기고, 믿음이 있어야 믿음의 소리를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래서 우리 기독교 영성을 ‘들음’의 영성이라고 한다.
흔히 외국어를 잘 하려면 먼저 귀가 열려야 한다고 한다. 어떻게 해야 귀가 열릴까? 그것은 ‘많이’ 듣고, ‘자주’ 듣는 것이다. 어느 글에 보니 아기가 ‘엄마’라는 말을 하기까지 1만 번 이상 들려주어야 한다고 했다. 아기에게 많이, 자주 들려주니까 귀가 열리고, 입이 열려 엄마라는 말을 하게 된 것이다. 신앙생활도 다르지 않다. 주님에 대해, 주님의 말씀에 대해, 주님의 삶과 사역에 대해 많이 듣고, 자주 들으면 믿음의 귀가 열리게 되고, 믿음의 귀가 열리면 바디매오처럼 주님의 마음을 훔칠 수 있는 믿음의 고백을 할 수 있게 된다. 그리하여 주님의 귀와 주님의 눈과 주님의 마음을 나에게 집중시킬 수가 있는 것이다. 그러니까 주님과 친밀함을 유지하게 되는 것이고, 장애가 있어도 그것을 뚫고 거침없이 나아가는 형통의 삶을 살게 되는 것이다. 모쪼록 자주 듣고 많이 들어서 믿음의 귀가 열리고, 믿음의 고백을 들여서 주님의 마음을 훔치는 여러분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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