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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을 알아주라.(07-07-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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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7,588회 작성일 07-07-23 17:4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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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런 사람을 알아주라.
고전16:15~18

다른 사람의 잘못에 대해서 사람들은 대개 세 가지로 반응을 보인다고 합니다. 첫째는 비난과 정죄입니다. 예를 들어 아이가 컵을 깨뜨렸을 때, ‘너는 왜 항상 그 모양이냐.’ ‘정신을 어디에 두고 있는 거냐.’고 말하는 사람이 여기에 해당됩니다. 그런데 이런 비난과 정죄는 실수를 못하도록 하는 교육적 측면보다, 더 나쁜 방향으로 가게 만듭니다. 비난이나 정죄, 책망은 반항심과 좌절감을 심어주기 때문입니다.

두 번째는 있는 그대로 사실을 말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컵을 깨뜨렸을 때, ‘컵을 깼구나!’하는 정도입니다. 있는 사실 그 자체만을 말하는 것입니다. 하지만 이 역시도 별로 좋은 반응이 아닙니다. 자칫 상대방에게 무관심하게 보일 수가 있기 때문입니다. 사실 아이들의 이런 행동은 두 가지 원인에서 일어납니다. 하나는 단순한 실수이고, 다른 하나는 부모의 관심을 끌기 위한 의도적인 행동입니다. 이럴 때 무관심은 비난이나 정죄보다 더 나쁜 영향을 아이에게 주게 됩니다.

세 번째는 상대를 위하는 마음에서 격려하는 것입니다. 아이가 컵을 깨뜨렸을 때, ‘컵이 깨졌구나, 어디 다치지 않았니?’ 혹은 ‘네가 다치지 않아 천만 다행이다.’고 말합니다. 이는 깨진 컵보다는 아이를 먼저 걱정해 주는 태도입니다. 이런 적극적인 위로나 격려의 말을 통해 ‘내가 존중받고, 사랑받고 있다’는 느낌을 갖게 되고, 또한 감동을 받습니다. 특히 아이들의 경우는 이럴 때 자존감이 쑥쑥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서양 속담에 ‘수만 톤의 가시는 벌 한 마리도 불러 모으지 못하지만, 한 방울의 꿀은 수많은 벌 떼를 불러 모은다.’는 말이 있습니다. 칭찬과 격려는 인생을 춤추게 합니다. 괴테는 '사람을 현재의 모습으로 대해주면 현재의 모습에 머물러 있을 것이지만, 마땅히 되어야 할 모습으로 대한다면 더 크고 훌륭한 사람이 될 수 있다.'고 말했습니다. 잭 웰치(전 GE 회장)는 어린 시절 심한 말더듬이었다고 합니다. 그런 그에게 어머니는 ‘네가 말을 더듬는 이유는 생각의 속도가 너무 빨라서 입이 그 속도를 따라주지 못하기 때문이란다. 걱정 마라. 넌 잘하고 있단다. 너는 커서 큰 인물이 될 것이다.'라고 칭찬하며 격려해 주었다고 합니다. 칭찬은 상처에 치료제를 발라주는 것과 같습니다. 반면에 책망이나 비난은 상처를 뭉개는 것과 같고, 무관심은 상처를 방치한 것과 같습니다. 아무튼 칭찬을 즐기면 인생이 즐거워집니다.

바울은 위대한 복음 전도자이면서 동시에 감사와 칭찬, 격려의 사람이었습니다. 바울의 편지들을 보면(특히 편지들의 서두와 결론부분 참조) 이런 사실을 확인할 수가 있습니다. 오늘 본문도 이와 같은 바울의 삶을 잘 보여줍니다. 바울이 개척한 교회들 중에 고린도교회는 여러 교회문제로 바울을 무척 힘들게 했던 교회였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성경에서 보듯 이렇게 긴 장문의 편지를 두 번이나 고린도교회에 보내게 된 것입니다. 본문은 고린도교회에 보낸 바울의 첫 번째 편지의 결론 부분인데, 여기서 바울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 세 사람의 이름을 거명하며 이런 사람들을 알아주라고 권면합니다(18). 이는 고린도교회 신자들에게 칭찬과 격려를 부탁하는 모습으로 주변 사람들을 각별히 위하는 바울의 모습을 볼 수가 있습니다.

이들 세 사람은 고린도교회 사람들입니다. 특히 스데바나는 아가야 지방에서 최초로 믿은 사람으로 바울이 유일하게 직접 세례를 베푼 사람입니다(15). 이들이 바울을 방문한 것은 고린도교회의 소식과 고린도교회가 바울에게 질문한 내용을 기록한 편지를 전달하기 위해서였습니다. 당시 고린도교회는 바울파, 베드로(게바)파, 아볼로파, 그리스도파로 나뉘어 신자들끼리 다투고 있었습니다. 이 과정에서 많은 신앙(학)적, 윤리적인 문제들이 나타났고, 특히 고린도교회를 개척한 바울을 비방하는 사람들도 있었습니다. 이와 같은 고린도교회의 소식을 듣고 상심해 있을 바울을 위로하고, 또한 교회의 문제들을 지도받고자 이 세 사람이 바울을 방문한 것입니다. 이들의 방문은 바울에게 큰 기쁨(17)과 위로(18)가 되었습니다. 바울은 이들 손에 교회문제의 해결책을 기록하여 보내면서, 이제는 고린도교회에게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하라고 당부한 것입니다. "내가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의 온 것을 기뻐하노니 저희가 너희의 부족한 것을 보충하였음이니라.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고전16:17~18).

악천우와 빙판길을 운전하는 것처럼, 문제가 있는 교회를 섬기는 것은 힘들고 어려운 일입니다. 그래서 대개의 사람들은 교회문제가 생기면 침묵을 하거나 그 상황을 피해버립니다. 그런데 스데바나와 브드나도와 아가이고는 주님을 사랑하고, 주님의 몸된 교회를 사랑하고, 자신들에게 복음을 전해준 바울을 사랑하는 마음에서 교회문제 해결을 위해 앞장섰습니다. 이것이 믿음의 용기이고, 주님을 위한 교회를 위한 희생과 헌신입니다. 이런 이야기가 있습니다. 험한 산길을 다니느라 돌부리와 가시에 발이 성할 날이 없는 여우가 있었습니다. 그래서 여우는 토끼를 잡아서 그 가죽으로 자기가 다니는 길을 포장하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그 때 토끼 한 마리가 여우에게 다가와서, ‘여우님, 언제 그 많은 토끼들을 잡아서 길을 포장하려고 하십니까? 차라리 제 꼬리를 잘라서 신발을 만들어 신으십시오.’라고 제안을 했습니다. 동료들을 생각하여 스스로를 희생하기로 작정한 이 토끼의 모습이, 바로 스데바나 일행의 모습입니다. 바울은 이들의 이런 아름다운 헌신과 수고를 칭찬하면서 고린도교회도 함께 이들을 위로하고 격려할 것을 부탁한 것입니다.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

1. ‘알아주는’ 것은 섬기는 사람에게 위로와 격려를 줍니다.
신자는 주님을 바라보고 주님의 위로와 칭찬만 기대하며 섬기는 사람들입니다. 때문에 교회를 섬기고 지체들을 섬길 때 알아주기를 기대하고 섬기지는 않습니다. 그렇지만 누군가 나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고 인정해줄 때, 위로를 받고 격려를 받아서 더욱 즐겁고 힘있게 일할 수가 있는 것도 사실입니다. 왜냐하면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때때로 격려와 위로가 필요한 사람이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알아주고 인정해 줄 때 사람은 세워집니다. 그래서 바울은 본문에서뿐만 아니라 데살로니가교회에게도 이렇게 권면했습니다. "형제들아 우리가 너희에게 구하노니, 너희 가운데서 수고하고 주 안에서 너희를 다스리며 권하는 자들을 너희가 알고, 저의 역사로 말미암아 사랑 안에서 가장 귀히 여기며, 너희끼리 화목하라."(살전5:12~13). '너희 가운데서 수고한 자들을 너희가 알라.'고 합니다.

중국의 고전인 「열자」의 ‘탕문편(湯問篇)’에 '백아절현(伯牙絶絃)'이란 고사가 나옵니다. ‘백아(伯牙)가 거문고 줄을 끊었다.'는 뜻으로, 자기를 알아주는 절친한 벗의 죽음을 슬퍼하는 말입니다. 춘추전국시대 초(楚)나라 사람으로 진(晉)나라에서 높은 벼슬을 한 거문고의 달인 백아가 있었습니다. 그에게는 그의 거문고 소리를 알아주는 종자기라는 친구가 있었는데, 그가 병으로 갑자기 죽자 너무도 슬픈 나머지 그토록 아끼던 거문고 줄을 스스로 끊어 버리고, 죽을 때까지 거문고를 켜지 않았다고 합니다. 백아는 자신의 음악을 알아주는 사람이 이 세상에는 더 이상 없다고 생각하였기 때문에 거문고 줄을 끊어버린 것입니다.

주님 안에서 형제와 자매가 된 신자들 사이에도 이처럼 서로를 알아주는 관계가 필요합니다. 그래야 교회 안에 아름다운 거문고 소리가 울려 퍼질 것이고, 또한 세상을 향해서도 아름다운 연주를 할 수 있을 것입니다. 지금 우리교회에도 이 한 시간의 예배를 위해 수고와 헌신을 아끼지 않는 손길들이 많습니다. 이들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줄 수 있기를 바랍니다. 이는 교회에서 뿐만 아닙니다. 가정이나 직장에서도 마찬가집니다. 서로의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고 인정해 줄 때 더욱 화목하고 화락한 삶, 공동체가 될 것입니다. 나를 알아주는 사람이 있는 세상은 살맛이 나는 천국이지만 알아주는 사람이 없는 세상은 무덤과 같은 것입니다.

2. ‘알아주는’ 것은 섬기는 사람에게 보람과 긍지를 갖게 합니다.  
수고와 헌신을 알아주고 인정하는 것은 귀히 여기는 태도입니다. 그 사람과 그 사람의 일을 귀하게 여기고, 그 사람의 수고와 헌신을 귀하게 여기는 태도입니다. 이 때 사람들은 자신이 하는 일에 보람과 긍지를 갖게 됩니다. 건강한 공동체와 건강하지 못한 공동체의 차이가 바로 여기에 있습니다. 열심히 봉사하고 헌신적으로 일하는 사람들이 존경받는 공동체는 건강한 공동체입니다. 그리고 이 사람들의 특징은 한결같이 자신의 일에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열심히 일하고 수고하는 사람들을 존경하고 칭찬할 줄 아는 아름다운 분위기를 조성해야 합니다.

바울은 빌립보 교회를 향하여 이렇게 편지하였습니다. "이러므로 너희가 주 안에서 모든 기쁨으로 저를 영접하고 또 이와 같은 자들을 존귀히 여기라. 저가 그리스도의 일을 위하여 죽기에 이르러도 자기 목숨을 돌아보지 아니한 것은 나를 섬기는 너희의 일에 부족함을 채우려 함이니라."(빌2:29~30). 이는 빌립보 교회가 로마에 있는 바울에게 보낸 젊은 목회자 에바브로디도에 대한 말씀입니다. 바울은 여기서 에바브로디도의 헌신과 수고를 소개하면서 이런 사람을 귀히 여기라고 부탁합니다. 주님의 몸인 교회 공동체가 건강하고 아름답게 세워진 것은 바로 이런 사람들 때문입니다. 그러므로 교회는 이런 사람들의 수고와 헌신을 귀히 여기야 하는 것은 마땅한 일인 것입니다.

그런데 성숙하지 못한 공동체에서는, 섬기는 사람들을 귀하게 여기지 않습니다. 도리어 열심히 섬기는 사람을 비난하고, 깎아 내리며, 상처를 주어, 그들로 하여금 더 이상 일하지 못하도록 만들어버립니다. 일하는 사람들 역시 보람과 긍지를 갖지 못하고 일손을 놓거나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악화가 양화를 구축(驅逐)한다(몰아낸다).'는 '그레샴 법칙'이 있습니다. 이는 경제용어인데 본래의 의미와는 달리 일반적으로 아름다운 것이 추한 것에 밀려나고 가짜가 진짜를 몰아내며 현상을 두고 사용되고 있습니다. 마찬가지로 공동체 안에서도 수고와 헌신의 사람들은 밀려나고, 일은 하지 않으면서 비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만 무성하게 됩니다. 그러면 그 공동체는 병이 들고 맙니다. 이렇게 되면 아무도 앞장서서 선한 일을 하려고 하지 않게 되고, 뜻있는 사람들이 그 공동체를 떠나게 되는 것입니다. 교회도 마찬가집니다.

어떤 분이 말하기를, 교회 안에는 어려우나 힘드나 한결같이 한 지아비만 섬기는 조강지처(糟糠之妻)와 같은 교인과, 첩(妾)과 같은 교인이 있다고 합니다. '첩'(妾)이란 한자를 풀어 보면, 설 '립'(立)자 밑에 계집 '녀'(女)자 입니다. 이 글자의 모습대로 첩이란 진득이 앉아 있는 것이 아니라, 항상 서 있다가 여차하면 나가 버리는 여자라고 합니다. 힘들과 어려워도 조강지처처럼 교회를 지키는 신자와 첩처럼 조금만 마음이 불편하면 떠나버리는 신자가 있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저는 첩과 같은 신자를 만든 것이 교회의 책임이라고 생각합니다. 교회 공동체가 성숙하지 못하여 이런 사람들을 정착하지 못하게 만든 것이 더 큰 원인인 것입니다. 이런 사람들이 교회 공동체에 잘 적응토록하기 위해선 건강한 공동체를 만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 비결은 서로를 귀히 여기는데 있습니다. 특히 수고와 헌신을 다하여 섬기는 이들을 칭찬하고, 이들을 귀히 여기는 아름다운 풍토를 만들어야만 하는 것입니다. 또한 이런 사람들을 귀히 여기다 보면 이들을 사모하게 되고, 나아가서 이들의 삶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좋은 교회는 섬기는 이들이 많은 교회입니다. 그리고 좋은 교회는 섬기는 이들을 귀히 여기는 교회입니다. 섬기는 이들이 보람과 긍지를 가지고 섬기는 교회가 좋은 교회입니다. 그러면 교회는 섬기는 이들로 가득 차게 될 것입니다. 저는 작지만 우리 기뻐하는교회가 이런 교회가 되기를 소망합니다.

캘빈 밀러가 쓴 「격려」라는 책에 이런 글이 있습니다. “우리 모두는 다른 사람들의 삶을 어루만질 수 있는 놀라운 초능력을 소유하고 있다. 그것은 바로 '격려의 힘'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런 능력을 사용하고 있지 않는 것일까? 세상은 새로워지기를 간절히 고대하고 있다. 그리고 우리는 세상을 바꿀 능력을 가지고 있다. 그것은 한 번의 칭찬과 격려로 지옥을 에덴으로 변화시킬 수 있는 놀라운 힘이다. 하나님께서는 우리를 영광의 자리로 부르셨다. 그 부르심은 '인간의 가치‘라는 황금빛 항로를 지난다. 그러니 이제 나와 함께 가자. 이 세상을 변화시키자. 그전에 잠깐, 당신에게 할 말이 있다. '당신 모자 참 마음에 드네요!’"

"이 세상에는 그 누구도 다른 이의 사랑을 필요로 하지 않을 만큼 부유한 자도 없고, 다른 이에게 사랑을 나누어주지 못할 만큼 가난한 자도 없다."는 말이 있습니다. 사람들 중에는 나름대로 웃고 떠들고 재미있게 사는 것처럼 보이는 사람도, 그 내면을 들여다보면, 그 나름대로 아픔이 있고, 상처가 있고, 고독이 있습니다. 어쩌면 이 땅에서 살아가는 우리의 삶 자체가 이래저래 슬픈 일들 속에 엉켜 살아가고 있고, 죄 많은 세상에서 살아있다는 자체만도 슬픔일 수 있습니다. 그래서 바울은 "저희가 나와 너희 마음을 시원케 하였으니, 그러므로 너희는 이런 자들을 알아주라."라고 말합니다. 우리 모두 서로를 알아주고 인정하여 위로와 격려, 보람과 긍지를 주는 사람들이 됩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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