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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서 지켜야 할 것.(07-07-2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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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성자 장양식 댓글 0건 조회 14,999회 작성일 07-07-30 17:1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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힘써서 지켜야 할 것
엡4:1~6

2007년 1월 30일 동아일보 경제란에 “삼성에서 별을 달려면 하지 말아야 할 네 가지”라는 제목의 기사가 실렸습니다. 고액 연봉을 받고, 좋은 차와 의료 혜택, 그리고 사회적인 명예를 누릴 수 있는 임원이 되기 위해 피해야 할 네 가지 기준이 있다는 것입니다.

첫째, 이성입니다. 고급 유흥업소를 출입하거나 이성관계가 깨끗하지 않는 사람은 임원이 될 수 없다고 합니다. 이런 사람은 기업 이미지는 물론 이런 생활을 유지하기 위하여 부정한 돈에 대한 유혹을 받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둘째, 도박입니다.  
셋째, 골프입니다. 직원이 골프에 빠지면 일의 능률도 떨어지고, 비용 때문에 회사 공금을 유용할 위험이 있기 때문입니다.
넷째, 주식투자입니다. 단기 투자자가 되어서, 주식으로 돈을 벌고자 할 경우 회사 일에 집중하고 최선을 다 할 수 없기 때문입니다.

여기에는 공통점이 있습니다. 그것은 이 네 가지를 행할 경우에 회사의 이미지와 자기 업무에 집중하여 최선을 다할 수 없고, 자칫 부정을 택할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아무리 능력이 있고, 탁월하여도 이 네 가지의 기준에 합하지 않으면 임원이 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기업도 “기업 나름대로 어떤 사람을 원하는지에 관한 기준”이 있고, 그 기준에 부합한 사람을 뽑아서 사용합니다. 하나님의 나라도 마찬가집니다. 그것은 ‘하나 됨’입니다. 이것이야말로 신앙공동체들에게 하나님께서 기뻐하시고 원하시는 중요한 기준입니다.

시편133:1에, “형제가 연합하여 동거함이 어찌 그리 선하고 아름다운고!”라는 말씀이 있습니다. 이스라엘 온 백성이 하나가 되어 한 마음으로 즐거워하면서 하나님의 언약궤를 예루살렘으로 모셔올 때 그 모습에 감동하여 다윗이 한 말입니다. 여기에 아주 중요한 단어가 있습니다. “선하다.”란 말입니다. 이를 히브리어로 “토브”라고 하는데, 그 뜻은 “선하다. 좋다. 아름답다.”입니다. 그런데 이 단어를 하나님께서 천지를 창조하시고, “보시기에 심히 좋았더라!”고 말씀하실 때에도 사용하셨습니다. 이 단어는 신학적으로 하나님의 마음에 쏙 든다(만족하다)는 의미이고, 윤리적으로는 완벽하다(흠이 없다), 미학적으로는 아름답다는 의미입니다. 신앙 공동체의 연합과 신자의 하나 됨이 하나님의 창조성을 회복한 것임을 의미한 것입니다. 하나님이 천지를 창조하시고 스스로 만족해하시고 감탄하신 것처럼 신자의 하나 됨도 그렇게 바라보신다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린 여기서 신앙 공동체의 연합과 신자의 하나 됨이 얼마나 중요한가를 알 수가 있습니다.

왜 하나 됨을 지켜야 합니까?
1. 부르심에 합당한 삶입니다(1,3).
이는 신자가 마땅히 추구하고 따라야 할 삶의 방식입니다. 바울은 하나님의 부르심을 받은 우리에게 합당한 삶은 하나 됨에 있다고 말합니다(1). 우리가 구원을 받은 것은 하나님의 은혜입니다(엡2:8). 하나님의 은혜로 구원받아 하나님의 자녀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하나님의 자녀가 된 우리에게 이에 ‘어울리게’(하나님의 자녀답게, 하나님의 자녀에 어울리게) 생활을 해야 할 책임이 있습니다. 이것이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입니다. 그 하나님의 자녀다운 생활이 ‘하나 됨’입니다. 그래서 바울은 이 하나 됨을 힘써 지키라(3)고 권면합니다. 3절에서 ‘힘써 지키라.’는 단어를 바울은 현재분사명령형으로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는 신자와 신앙 공동체가 하나 됨에 목표를 두고 진지하고도 부지런히 매진할 것을 의미한 것입니다. 예수님께서도 말씀하시기를 “내가 하버지 안에 있는 것같이 저희도 다 하나가 되어 우리 안에 있게 하사 세상으로 아버지께서 나를 보내신 것을 믿게 하려 함이라”(요17:21).고 하셨습니다. 특히 예수님의 이 말씀에서 신자의 하나 됨이 주님 안에 있는 것이요, 세상으로 주님을 믿도록 하는 주님의 뜻이라는 것입니다.  

2. 신앙의 존재방식입니다(4-6).
본문에서 바울은 우리가 하나 되어야 할 이유를 구체적인 예를 들어서 말하고 있습니다. 여기에 7가지의 하나 됨의 예가 나옵니다. 몸(그리스도의 신비한 몸, 즉 우주적인 영적인 교회), 성령, 소망(구원의 궁극적인 목적), 주, 믿음, 세례, 하나님입니다. 이 모두는 우리 신앙의 내용들입니다. 이 모두가 하나로 존재하기 때문에 신자도 신앙 공동체도 하나여야 한다는 말씀입니다. 물론 개인에 따라, 민족이나 문화에 따라 신앙을 표현하는 방식은 다를 수 있습니다. 그렇지만 신앙의 내용은 다를 수가 없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하나가 되어야 할 이유입니다. 6절에서 바울은 하나님의 유일성을 통하여 신자와 신앙 공동체의 하나 됨을 강조하고 있는데, 특히 “만유 위에(over all) 계시고, 만유를 통일(through all)하시고, 만유 가운데(in all)계시면서” 신자와 신앙공동체의 일치를 위해 일하시는 하나님을 강조합니다. 여기서 만유란 좁은 의미로 신자와 신앙 공동체인 교회입니다. 하나님은 신자와 교회를 초월하여 계신 동시에 신자 안에 교회 안에 계시면서 신자와 교회를 주관하시며 다스리신다는 것입니다. 때문에 신자와 교회는 하나가 되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어떻게 하나가 될 수 있습니까?
1. 겸손입니다.
통밀을 가지고는 반죽을 만들 수 없습니다. 밀을 잘 빻아야만 반죽을 만들 수 있습니다. 겸손이 하나 됨의 비결인 이유가 여기 있습니다. 겸손은 자기를 낮추는 것입니다. 자기를 부정하는 권리포기, 내려놓음, 덩어리가 없이 철저하게 부서짐이 겸손입니다. 대신 상대방을 귀하게, 나보다 낫게, 소중하게 여기는 것이 겸손입니다. 이런 겸손함이 있어야 하나가 됩니다. 겸손한 사람은 자기주장을 하지 않기에 평화를 깨는 일이 없고, 상대방을 나보다 낫게, 귀하고 소중하게 여기기에 다른 사람들과 어울려 하나가 될 수 있는 것입니다.

바울은 빌립보교회에게 이렇게 권면하고 있습니다. “아무 일에든지 다툼이나 허영으로 하지 말고 오직 겸손한 마음으로 각각 자기보다 남을 낫게 여기고.”(빌2:3). 다툼이나 허영은 신앙공동체의 하나 됨을 깨뜨리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 다툼과 허영은 교만한 마음에서 생겨납니다. 이 다툼과 허영을 그치고 신앙공동체를 하나 되게 만드는 것은 남을 나보다 낫게 여기는 겸손입니다. 겸손은 신자가 추구해야 할 최고의 덕입니다. 겸손함이 있는 곳에 하나 됨이 있습니다.

2. 온유입니다.
온유는 야생마를 적토마, 천리마, 명마로 만드는 것과 같습니다. 이렇게 잘 길들여진 말을 ‘온유의 말’이라고 합니다. 그러므로 온유란 훈련되어진 것, 잘 길들여진 것. 영적으로는 하나님께 잘 길들여진 삶의 태도를 의미합니다. 온유한 사람은 원수를 위하여 기도하고, 저주하고 핍박하는 사람을 위하여 축복합니다. 오리를 가자하면 십리까지 가주고, 오른 뺨을 치면 왼뺨까지 돌려 댑니다. 악을 악으로 갚지 않고 선으로 악을 이기려는 마음이 온유입니다. 온유한 사람은 분열과 분리, 차별을 싫어하고 화평과 평화, 하나 됨을 좋아합니다.

우리가 이와 같이 온유한 사람이 되기 위해선 하나님께 우리의 삶이 길들여져야 합니다. 하나님께 길들여져야 할 가장 중요한 부분은 우리의 언어생활입니다. 우리의 하루는 말로 시작해서 말로 마칩니다. 그러다 보니 길들여지지 않는 말 때문에 상처를 받기도 하고 상처를 주기도 하며, 낙심시키기도 하고 낙심하기도 합니다. 하나 됨의 심각한 장애가 길들여지지 않은 우리의 말입니다. 그러므로 우리의 언어생활이 하나님께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래서 은혜로운 말, 축복의 말, 감사의 말. 상대방을 위로하고 세워주고 용기를 북돋아주는 말을 하여야 합니다. 이 외에도 우리의 감정, 거친 행동, 건강하지 못한 습관들이 하나님께 길들여져야 합니다. 그리하여 온유한 사람, 하나 됨을 이루어가는 사람이 될 수가 있는 것입니다.

3. 오래 참음입니다.
밥을 짓는데도 2~30분, 집을 짓는데 몇 개월, 나무를 심어 열매를 맺는 데는 몇 년이 걸립니다. 무언가 좋은 결과를 위해선 오래 참음이 필요합니다. 야고보는 사람의 성숙도를 인내로 측정합니다. 온전하고 조금도 부족함이 없는 성품이 있다면 그것은 인내라고 강조합니다. “이는 너희 믿음의 시련이 인내를 만들어 내는 줄 앎이라. 인내를 온전히 이루라. 이는 너희로 온전하고 구비하여 조금도 부족함이 없게 하려 함이라.”(약1:3~4). 오래 참는 것은 성숙의 표지(sign)입니다. 성숙한 관계를 맺는 원리입니다. 대부분의 관계의 문제는 참지 못한 데서 옵니다.

헨리 나우엔의 「영적 발돋움」에, ‘사람을 변화시키는 것이 아니라 변화가 일어날 수 있는 자리를 그들에게 주는 것입니다.’라는 말이 나옵니다. 상대방을 변화시키려고 하려말고 스스로 변화할 수 있도록 여백을 주라는 말입니다. 이를 두고 어떤 사람은 ‘여백을 주는 사랑’이라고 표현하였습니다. 사랑하는 사람을 소유하고 조정하고 지배하려는 욕망은 사랑이 아닙니다. 항상 붙어 있다고 사랑하는 것이 아닙니다. 참된 사랑은 여백을 통해 성장합니다. 서로 떨어져 있으므로 더욱 그리워하고, 안타까워하면서 사랑을 키워가는 것입니다. 나무도 붙여서 심어놓으면 함께 자라지 않습니다. 둘 다 자라지 않거나 둘 중 하나가 죽게 됩니다. 일정한 간격을 두고 심을 때 둘 다 잘 자라게 되는 것입니다.

저는 우리의 관계에 있어서 여백을 주는 사랑이 인내, 곧 참고 기다리는 것이라고 생각합니다. 지금은 많이 부족하지만 지켜보면서 기다려 주는 것, 그 여백들이 채워지기를 기대하면서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실수를 했을지라도 참고 기다려 주는 것입니다. 변화시키려고 몸부림을 치는 것이 아니라 변화할 수 있도록 공간을 마련해 줍니다. 그리고 참고 기다립니다. 이런 기다림과 참음 속에서 사람이 성숙하게 되고, 사람들의 관계도 성숙해 지는 것입니다. 앞에서도 말씀드렸듯이 참지 못함이 신앙공동체의 하나 됨을 파괴합니다. 하지만 서로에게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두고 참고 기다릴 때 하나 되는 역사가 일어나게 되는 것입니다.

여러분에게 간곡히 부탁드리고 싶은 것이 있습니다. 저나 우리 지체들이나 우리교회를 볼 때 부족한 부분이 많이 보일 것입니다. 이를 볼 때 실망하거나 비난하지 말고 서로에게 변화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해 두고 참고 기다려 주십시오. 그러면 틀림없이 우리 주님께서 아름답고 만족할만한 모습으로 우리를 변화시켜 주실 것입니다. 바로 이와 같은 여백을 주는 사랑 안에서 하나 됨이 이루어지는 것입니다.

4. 용납(서)입니다.
용납이란 서로를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서로를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입니다. 주님께서 죄 많은 나, 실수와 흠이 많은 나를 그대로 받아 주신 것처럼 서로를 받아주는 것입니다. 서로를 용서하는 것입니다. 그런데 이 용납에는 전제가 있는데, 그것은 사랑입니다(3下). 주님의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납(서)하는 것입니다. 서로를 사랑으로 용납할 때, 서로를 가로막고 있던 담이 무너지고, 그곳에 화평의 길, 화목의 길이 만들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하나 됨이 이루어지게 되는 것입니다. 그러므로 우리가 하나 됨으로 부르심에 합당한 생활을 하기 위해선 사랑 안에서 서로를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입니다.

용서란 상대를 위해 면죄부를 주거나 그의 행동을 정당화 하는 것이 아닙니다. 내 자신으로 하여금 아픈 과거를 버리고 앞으로 나아가게 하는 것입니다. 용서가 그리스어로 “놓아 버리다.”는 뜻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을 놓아 버리는 것입니다. 상대로부터 받은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을 용서하지 못하면 계속해서 과거에 받은 그 상처, 아픔, 고통, 불행, 미움, 원망 등에 매여 있게 됩니다. 나에게 상처를 준 그 사람, 내게 상처가 되었던 그 사건에 묶이게 되고, 내 자신을 개방하여 다른 사람과 하나 되지 못하게 만듭니다. 그러나 용서하면 미움의 끈, 증오의 끈, 원망의 끈이 사라지고, 더 이상 증오나 분노, 상처를 받을 필요가 없게 되는 것입니다. 내 자신을 개방해서 당당하게 다른 사람에게로 나아갈 수가 있게 되고, 이웃과 화해가 일어나게 됩니다. 또한 하나 됨의 역사가 일어납니다.

여기서 우리가 기억해야 할 것은 우리가 다른 사람들과 하나 되지 못하고, 신앙공동체를 하나 되지 못하게 한 가장 중요한 원인은 우리 자신입니다. 아직 놓아버리지 못한 우리 자신이 문제입니다. 그러므로 용서하고 용납하는 것이야말로 하나 됨 가장 중요한 비결입니다.

게는 바구니의 뚜껑을 열어놓아도 밖으로 나오지 못합니다. 밖으로 나가려고 바구니 가장자리로 올라가면 다른 게가 잡아당겨서 끌어내리기 때문입니다. 하나 되지 못하고 서로 나뉘어 갈등하는 곳이 이와 같습니다. 거기엔 발전도, 비전도, 자유도, 행복도 없습니다. 말 그대로 생지옥입니다. 근대사를 보면, 영국이 오랫동안 인도를 지배했는데, 그 방법은 부족간의 갈등을 부추기는 것이었습니다. 그래서 자기들끼리 갈등하고, 분열하여 싸우도록 만들었습니다. 서로 싸우느라 독립은 꿈도 못 꾸었습니다. 이처럼 마귀는 신자들이 하나 되지 못하도록 이간질합니다. 우린 이런 마귀의 계략에 빠져서는 안됩니다. 반면 우리가 힘써 지켜야 할 것이 있습니다. 그것은 내 재산, 자존심, 명예나 명성, 의견 등이 아닙니다. 성령의 하나 되게 하심입니다. 이 하나 됨 속에 성장과 성숙이 있고, 아름다운 부흥이 있고, 평화가 있고, 행복이 있고, 희망찬 미래가 있는 것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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