열어주소서! ‘입Ⅲ’
페이지 정보
작성자 kagathos 댓글 0건 조회 27,568회 작성일 21-10-31 14:55본문
열어주소서! ‘입Ⅲ’
마16:13~20
2021. 10/31. 11:00(종교개혁 기념주일)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다.
흔히 표현하지 않는 사랑은 사랑이 아니라고 말한다. 그러니까 사랑은 표현해야 한다는 것이다. 자주, 많이, 과하게 표현해도 좋은 것이 사랑이다. 부부나 부모자식 간에는 더욱 그렇다. 꼭 말로 표현해야만 아느냐고 말하는 사람도 있다. 몰라서가 아니라 표현을 하는 것이 그렇지 않는 것보다 훨씬 좋기 때문이다. 간혹 진짜 모르는 사람도 있다. 언젠가 참으로 가슴 아픈 사연을 읽은 적이 있다. 10살에 집을 나와 45년 만에 다시 가족을 만난 사람의 사연이었다. 이들이 헤어진 사연이 참으로 기가 막혔다. 부모에게 ‘집에서 나가’라는 말을 듣고 집을 나왔고, 그 길로 45년을 헤어져 살았다. 그때 그는 부모가 정말 자기를 나가라고 한 것으로 알았다는 했다. 몇 번이나 집으로 돌아오려고 했지만 부모가 자기를 받아주지 않을 것 같아서 포기를 했다고 했다. 이 말에 부모형제가 오열을 하며, 얼마나 애타게 찾았는지를 이야기했다. 표현이 충분이 되지 않다보니 말 한 마디에 오해가 생겨 이런 불행한 일이 일어난 것이다.
미국 스텐포드 대학에서 이런 실험을 했다. 여러 쌍의 부부를 A와 B 두 그룹으로 나눠서 관찰을 했다. A그룹은 매일 십여 차례씩 서로 쓰다듬어주며 포옹을 하고 사랑의 고백을 하도록 하고, B그룹은 일체의 신체접촉이나 고백을 금지시켰다. 이렇게 1년 동안 시행한 후, 두 그룹 사이의 신체적인 변화와 건강상태를 살펴보았다. 그 결과, 사랑을 적극적으로 표현한 A그룹의 건강상태가 B그룹보다 월등히 좋고, 평균수명도 2년이나 긴 것으로 조사됐다. 반대로 사랑을 표현하지 못한 부부들은 피부도 거칠고 맥박이 불규칙하고 불쾌지수가 일반인보다 3배나 높은 것으로 나타났다. 여러분, 오래 살고 싶은가? 건강하게 오래오래 살고 싶은가? 자주 표현하고 많이 표현하라! 고백이 건강과 수명을 늘리는 비결이다.
고백의 중요성
부부든 연인이든, 혹은 부모와 자식이든, 모든 관계에서 고백은 참으로 중요한 수단이다. 고백은 자신을 공개하는 것이다. 열어 보이는 것이다. 상대방에게 사랑의 고백했을 때 이때부터 숨겨져 있던 마음이 공개되고 열어 보이는 것이다. 고백이 없는 사랑은 짝사랑이다. 물론 짝사랑이 가성비가 높다고 말한 사람도 있지만 어쨌든 짝사랑은 슬픈 사랑이다. 나는 그를 보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보고 있을 수 있기 때문이다. 나는 그를 생각하고 있는데 그는 다른 사람을 생각하고 있을 수 있다. 그러니 얼마나 슬픈 사랑인가! 고백은 이런 슬픈 사랑에 대한 마침표다. 그런데 이 고백이 쉽지 않다. 그래서 어떤 사람은 맨 정신으로 못하니까 술을 마시고 가서 사랑을 고백했다는 사람도 있다. 요즘에는 고백을 대행해주는 업체까지 생겼다고 한다. 달리 말하면 고백이 그토록 중요하다는 의미다. 그래서 술을 먹고라도 하고, 대행업체를 통해서라도 하는 것이다. 아무튼 고백은 나의 마음을 표현하는 수단이다. 나의 진심을 보여주고, 전해주고, 알려주는 진솔한 전달수단이다.
이 고백은 신앙생활에도 그대로 적용된다. 신앙생활에서 고백은 매우 중요하다. 이것이 따르는 사람의 필수조건이기 때문이다. 그래서 로마서는 이렇게 말씀하고 있는 것이다. ‘사람이 마음으로 믿어 의에 이르고 입으로 시인(고백)하여 구원에 이른다.’(10:10). 공개적으로 고백하면 몇 가지 유익이 생긴다. 하나는 ‘정체성’이다. 고백을 통해 영적 정체성이 분명해진다. 또 하나는 ‘자존감’이다. 영적 자존감이 생긴다. 고백은 확신의 결과이고, 확신은 자존감을 강화시켜 준다. 이런 정체성과 자존감은 책임 있게 행동하게 만든다. 즉, 하나님의 자녀로서 책임감을 가지고 살아가게 만든다. 이와 같은 영적 정체성과 자존감은 경건생활은 물론 일상생활에도 막대한 영향을 끼치게 된다. 더욱 결정적인 것은 이를 ‘주님께서 기뻐하신다.’는 것이다.
고백을 기뻐하시는 주님
성경에는 주님께 칭찬을 받은 사람들의 이야기가 많다. 가나안 여인(마15:21~28)과 가버나움에 거주한 로마군 백인대장(마8:5~13), 그리고 제자 베드로도 그들 중에 하나다. 이들은 주님께 큰 칭찬을 받았는데, 공통점이 있다. 그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그들의 ‘고백’ 때문이었다. 가나안 여인은 자녀의 떡을 취하여 개들에게 줄 수 없다는 차별적이고 모욕적인 주님의 말씀을 듣고도, ‘주여 옳소이다마는 개들도 제 주인의 상에서 떨어지는 부스러기를 먹나이다.’(마15:27)고 재치있게 응수하며 주님을 향한 자신의 신앙을 고백했다. 이에 대해 주님은 ‘여자여 네 믿음이 크도다.’(마15:28)라고 칭찬해 주셨다. 백인대장은 주님께서 집으로 가셔서 그의 하인을 고쳐주시겠다고 하시자, ‘주여 내 집에 들어오심을 나는 감당하지 못하겠사오니 다만 말씀으로만 하옵소서. 그러면 내 하인이 낫겠사옵나이다.’(마8:8)고 했다. 말씀 한 마디면 장소에 상관없이 능력을 보이실 수 있는 분이라고 고백한 것이다. 이에 주님은 ‘이스라엘 중 아무에게서도 이만한 믿음을 보지 못하였노라.’(마8:10)고 칭찬하셨다. 그리고 본문에서 베드로는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는 주님의 물으심에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고 고백했다. 주님은 그의 고백을 들으시고 극도로 기뻐하시며 칭찬을 아끼지 않으셨다(17).
본문은 주님께서 빌립보 가이사랴 지방을 방문하셨을 때다. 이곳이 지금은 이스라엘 변방의 폐허로 남은 시골마을 정도지만 주님 당시에는 웅장하고 화려한 이방의 신전이 즐비한 신들의 도시였다. 그 화려한 곳을 내려다보시며 주님께서 제자들에게 물으셨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 하더냐?’(13). 제자들은 자신들이 들은 대로 대답을 했다. 어떤 이는 세례 요한, 어떤 이는 엘리야, 혹은 예레미야나 선지자 중에 한 사람이라 하더라고 했다. 왜 주님께서 갑자기 제자들에게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일까? 정말 사람들의 반응이 궁금해서 그랬을까? 그것은 제자들의 고백을 듣고 싶으셨던 것이다. 이어지는 주님의 질문이 이를 말해준다. ‘너희는 나를 누구라 하느냐?’(15), 그때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베드로가 대답했다. ‘주는 그리스도시요 살아 계신 하나님의 아들이시니이다.’(16). 그러자 주님께서 매우 기뻐하시면서 축복까지 하셨다(17). 이 땅 위에서 하늘을 열고 닫는 권세(천국의 열쇠)까지 주시겠다고 하셨다(19). 여기서 우리가 주목해야 할 점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 무엇이냐는 것이다. 그것은 바로 고백이다. 고백이 주님께 얼마나 큰 기쁨이 되었는지를 짐작하게 해주는 대목이 19절 말씀이다. 신전은 고사하고 머물 집도 없는, 말 그대로 초라하기 그지없는 주님을 향해 이런 고백을 하니 제자들이 얼마나 대견하고, 또한 기뻤겠는가? 당시 사람들은 눈에 보이는 웅장하고 화려한 신전의 주인들을 주(主)로 고백하며 믿었다. 그런데 베드로를 비롯한 제자들은 그들의 눈앞에 웅장하고 화려하게 보이는 신전의 주인들이 주가 아니라 예수님을 ‘주’(主)라고 고백한 것이다.
그렇다면 주님은 왜 이곳에서 하필이면 이런 질문을 하신 것일까? 여기에는 주님의 의도가 있다. 그것은 주님을 따르는 신앙의 본질을 보여주기 위함이다. 사실 본문은 신학적으로 이방종교와 우리 기독교의 차이 즉, 기독교의 본질을 잘 보여주는 사건이다. 이방종교는 눈에 보이는 물질(건물)에 기초하고 있다. 그래서 그들에게는 웅장하고 화려한 신전이 중요하다. 거기에 집착했다. 그러나 우리 기독교는 눈에 보이는 것보다 보이지 않는 신앙고백에 기초한다. 주님께서 제자들의 고백을 듣기 원하시고, 고백을 기뻐하시고, 또한 고백에 큰 축복을 하신 이유가 바로 이 때문이다. 그런데 유감스럽게도 우리 기독교 2천년의 역사도 박해의 시기였던 초대교회 시절과 잘못된 기독교를 바로잡았던 종교개혁 시대를 제외하면 고백보다는 보이는 건물에 더 집착했었다. 그래서 경쟁적으로 화려하고 웅장한 교회를 건축했고, 경쟁적으로 교회의 첨탑을 높이 세웠다. 그러면 주님이 기뻐하실 것이라고 생각하면서 말이다. 착각이다. 오늘은 루터가 종교개혁을 일으킨 지 제504주년이 되는 기념주일이다. 개혁자들이 추구한 것은 교회의 본질회복이었다. 즉, 고백적인 신앙회복이 그들의 목표였다. 개혁자들의 신앙을 생각하며 다시금 신앙생활에서 신앙고백의 중요성을 새겨보는 시간이 되었으면 좋겠다. 예나 지금이나 주님의 소원은 오직 한 가지다. 그 무엇이 아니라 주님께 집중하기를 바라시고, 주님이 전부이시고, 주님이 삶의 주인이시라는 고백을 기대하신다는 사실이다.
주님이 기뻐하시는 삶을 위하여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은 신앙생활의 목표일뿐만 아니라 우리 인생의 목표이기도 하다. 그래서 잘 믿고, 잘 산다는 것은 주님을 기쁘시게 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우리 교회 이름의 뜻이고, 비전이다. ‘주님을 기뻐하는 교회, 그래서 주님께 기쁨이 되고 영광이 되는 교회, 주님의 마음을 시원하게 해드리는 성도다!’ 지난 주일에 부모를 기쁘게 해드리는 것이 효(孝)의 으뜸인 것처럼 신앙생활도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는 것이라고 했다. 물론 주님을 기쁘시게 해드리는 방법은 여러 가지다. 고백도 그 중에 하나다. 우리는 남편이나 아내, 자녀들, 손주들이 나를 사랑하고 좋아하는지 다 알지만 그들의 입으로 ‘좋아한다.’, ‘사랑한다.’는 말이 듣고 싶어서 자꾸 고백을 하도록 한다. 그 고백을 들으면 기쁘기 때문이다.
몇 달 전, 어떤 아이가 내 손을 잡고 ‘나는 목사님이 좋아요.’ 라고 했다. 그냥 하는 말이라 생각하고 적절하게 응대해 주었다. 그런데 또 같은 말을 했다. 그리고 조금 후에 또다시 ‘나는 목사님이 좋아요.’ 라고 했다. 아이의 말이지만 연거푸 세 번이나 같은 말을 듣게 되자 마음이 뭉클했다. 눈물이 날만큼 감동이 되었다. 그래서 그 아이를 꼭 안아주면서 ‘나도 네가 좋다! 사랑한다! 좋아해줘서 고맙다!’고 말해 주었다. 그러면서 나를 향한, 우리를 향한 주님의 마음도 이런 마음이겠구나 하는 생각을 했다. 주님도 우리가 자주 ‘사랑합니다.’, ‘감사합니다.’, ‘열심히 어디든지 목숨 걸고 따르겠습니다.’고 고백해주기를 바라시고, 또한 이런 우리의 고백을 기뻐하시고, 감격해 하신다. 사랑하는 사람은 함께 있으면서도 항상 고백을 듣고 싶어 한다. 주님 역시 우리의 고백을 듣고 싶어 하신다
댓글목록
등록된 댓글이 없습니다.